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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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경력 단절? 사실은 경력 확장 아닐까 연말에 살림 재택의료센터의 간호사, 재활치료사들과 우리의 일년 활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무릇 직원이라면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를 ‘원장과의 일대일 면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직원들은 재택의료를 담당하면서 느낀 점들이 무엇인지, 내년을 위해 무엇을 더 준비하면 좋을지 최선을 다해 이야기해주었다. 재택의료. 환자의 가정으로 의료인들이 방문하는 것이 재택의료이다. 사실 나도 하고는 있지만, 재택의료를 배운 적은 없다. 의료기관에서의 진료와 환자 가정에서의 진료가 어떻게 다른지 경험적으로 알아가고 있을 뿐. 게다가 한국에선 아직 재택의료가 온전한 제도로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와 일차의료 방문진료제를 통해 방문진료(왕진), 방문간호를 나가고 있지만 몇 년째 시범사업 상태이고, 우리의 방문재활은 그나마 시범사업으로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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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숫자로 상상한 것 너머에서부터 가정으로 방문진료(왕진)를 나가기 전까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에 와상의 환자분이 살고 계시는 건 잘 상상하지 못했다. 병원비는 저렴하지만 사설 구급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한 번 병원 갈 때 교통비만 왕복 20만원이 든다는 것도, 그러다 보니 가는 차비라도 아끼고자 119를 타고 응급실을 찾게 된다는 것도, 응급상황이 아닌데 응급실을 자주 찾으니 응급실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도, 찬밥 신세 응급실이 꺼려져 정말 응급상황이 될 때까지 집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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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세상 참 좋아졌어’란 꼰대 감성 최근의 나는 성추행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다. 대학생 때까지 버스, 지하철 안에서 성추행당했던 일들이 종종 있었고,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수련의 시절에도 남자 환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적이 있다. 한창 성추행을 많이 겪던 시절에는 대중교통만 타도 몸을 사리곤 했는데, 요즘은 ‘성추행’을 떠올리는 일조차 드물다. 이럴 때 ‘와, 요즘은 성추행이 줄었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 나에게 성추행이 덜 일어날까?’ 생각해야 한다. ‘세상 참 좋아졌어’라는 건 꼰대 감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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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1식 1사레’ 탈출 훈련 나의 별명은 ‘1식 1사레’이다. 식사할 때마다 꼭 한 번씩 사레가 걸려 캑캑거린다.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에 참으로 민망하게도, 음식점에서 식사 도중 사레가 걸리는 바람에 나를 돌아보는 무수한 불안한 눈동자들에 대고 “아, 제가 사레가 걸려서요”라고 변명하듯이 고한 적도 있을 정도다. “좀 천천히 먹어”라는 충고도 들어본 적 있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편은 아니다. 내가 사레에 잘 걸리는 이유는 첫 번째는 해부학적으로 식도와 기도가 가깝기 때문이고(이건 엄마를 닮았다), 두 번째는 자세가 좋지 않은 거북목이라 고개를 앞으로 쑥 빼고 먹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이건 아빠를 닮았다). 고개를 앞으로 빼고 먹으면 식도와 기도 사이의 후두개가 잘 닫히지 않아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기 쉬워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도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어 신체적 노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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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국 할아버지와 치매 지표 병원에 오기 싫어하시는 분이라 했다. 그래서 왕진을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민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70대 남성. 집을 방문했을 때 반지하 문 앞에는 소주병이 널려 있었고, 집 안은 초파리로 가득했다. 어두침침한 조명, 쉬어서 냄새나는 누룽지, 찬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방바닥에 깔린 얇은 홑겹 이불. 주민센터에서는 발목의 욕창을 치료해달라 요청했지만, 욕창은 아니었다. 그저 손으로 긁어서 생긴 상처가 낫지 않고 오래 가고 있는 것일 뿐. 그리고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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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며느리 같아서 좋냐고요? 우리 동네에는 중증 장애인분들이 생활하고 있는 빌라가 있다. 이 빌라에는 주로 전신마비, 하반신마비의 장애인분들이 입주해 있는데, 시설이 아니라 각 장애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임대한 주택이다. 빌라 한 채에 이런 주택들이 모여 있어 의료와 간호, 돌봄을 제공하기에 원활하면서도 주택 입주자인 장애인들의 사생활과 개인 공간이 보장되는 그야말로 엄연한 ‘집’이라, 새로운 커뮤니티 케어의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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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하다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날의 불편한 증상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끝났는데, 아직 뭔가 할 말이 남은 표정으로 환자분이 앉아 계셨다. 나는 사실 저 질문을 하기 전에 살짝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를 묻는 것은 진료실에서 꼭 필요한 질문이라고 배우기는 했지만, 대기 중인 다른 환자분들의 명단이 눈앞에 떠 있는 상황에서 이 질문을 매번 모든 환자분들에게 건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오묘한 표정으로 앉아 계시는 분들께는 이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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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차별받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임상 의사를 한 지 10년쯤 지나자 뭔가를 보충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을 한창 알아보고 있을 무렵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았고 선별진료소 자원활동이다, 생활치료센터 야간 당직이다 바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고자 했던 대학원이 수업을 온라인으로 한다기에 지금은 때가 아닌가 싶어 마음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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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치료적 일상에 대한 상상력 환자들의 댁으로 왕진을 다녀보면 집 안에서 병원의 환자복을 입고 생활하시는 분들이 있다. 퇴원한 지 이미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환자복을 입고 계신다. 한때는 선명한 푸른빛으로 인쇄되어 있었을 병원의 이름이 색 바래가는 것으로 언제쯤 퇴원하셨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와상 환자라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하시니 땀과 분비물 흡수가 잘되면서도 깨끗하게 빨 수 있고, 몸에 배기지 않고 알레르기가 없는 순면의 튼튼한 옷이 중요할 터이다. 환자복이 그런 조건에 딱 맞기는 하다. 무엇보다 간병하는 가족이나 요양보호사들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옷을 갈아입히는 횟수가 줄어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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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서로 다른 ‘의료의 문법’을 이해할 때 대학병원에서 응급의학과 교수를 하는 친구가 내가 일하는 곳의 방문진료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녀는 응급의료자원이 정말로 필요한 환자들에게 적절하게 쓰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고 했다. 나도 또한 방문진료를 통해 사람들이 불필요하거나 과도하게 응급실을 방문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마을에서 하고 있으니, 일하는 직장의 심급은 달라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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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성별정정’ 이후 마주한 고민 나는 지난 진료 차트의 내용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되셨어요?” 주어도 목적어도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그도 나도 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아니요. 안 됐어요.” “아니, 이유가 대체 뭐예…?”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진료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물어보나 마나 뻔하다. 아마도 그가 아직 남성 성기를 재건하는 수술을 하지 않았기에, 이번 판사는 성별정정 신청을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는 몇 년째 호르몬 치료를 받아온 성전환남성/트랜스맨(Transman, Female to Male Transgender)으로 주민등록으로는 여전히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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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갱년기’ 잘 보내기 갱년기가 왔는지 궁금하다고 검사를 받으러 오신 분이 있었다. 만 50세 여성인데 생리가 1년 전부터 없다고 했다. 나는 갱년기 호르몬 검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예상보다(평균보다) 젊은 나이에 생리가 중단되었다면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혹은 자궁적출술로 언제 생리가 중단되었는지 모르면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분의 경우는 별로 검사할 필요가 없었다. 이 나이대에는 호르몬 검사에 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