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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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벚꽃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는 일본인들 사이에 흔히 하는 말이다. 꽃 중 최고는 벚꽃이고, 벚꽃이 지듯 죽음을 맞이하는 무사가 아름답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원래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는 당나라에 파견된 사절단에 의해 일본에 도입됐다.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꽃이라 귀족들은 모두 매화를 사랑했다. 그러다 무사가 등장하던 가마쿠라 시대부터 벚꽃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항시 공존하던 무사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벚꽃에서 찾았다. 그들은 낙화의 무상함을 자신들의 삶에 투영하면서 벚꽃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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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태조 이성계와 억새 한식(寒食)인 지난 5일, 경기 구리 동구릉 내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에서 국가유산청이 ‘청완 예초의’를 거행했다. 봉분에 자라는 억새(청완)를 잘라주는 행사다. 건원릉 봉분에는 태조 이성계의 유교(遺敎)에 따라 억새를 심었다. 억새가 다른 풀보다 크게 자라니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은 능을 관리하지 않아 풀이 무성한 걸로 오해하기도 한다. 능침(陵寢·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은 사초 작업도 중요하지만, 산불 관리가 가장 중대한 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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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클로드 모네와 수양버들 연초에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마침 클로드 모네 전시회가 열렸다. 게다가 전시회장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우에노 공원의 국립서양미술관이었다. 한 곳에서 세계적 대가의 혼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니, 이런 호재가 어디 있을까.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다. 그 빛을 찾아 ‘방구석 화가’들을 바다로, 들로 내몰아 바깥바람을 쐬게 한 이가 모네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 풍광에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담아 화폭에 옮겼다. 중년에 그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꾸미고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전시회는 바로 지베르니 정원에서 보낸 마지막 10여년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만년의 모네: 수련, 물의 풍경’이 주제였다. 모네 하면 수련, 수련 하면 모네 아닌가. 그동안 여러 곳에서 3~4점씩 찔끔찔끔 보았던 그의 작품을 한꺼번에 무려 60여점이나 감상할 수 있어 그런 호사가 없었다. 모네의 작품 대부분이 역동적이거나 격정적이지도 않고 잔잔하다. 게다가 미디어에 수시로 노출되다 보니, 사실 내겐 그간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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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허균과 방풍 요즘은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온통 전쟁 모드다. 춤과 노래 경연은 물론 퇴역 군인들의 힘겨루기와 요리사들의 대결까지 격렬한 전투다. 음악으로, 힘으로, 또는 맛으로 상대방을 꺾고 올라가 깃발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중 요리 경연은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데다, 불과 칼을 다루는 종목이다 보니 더욱 치열하고 살벌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에는 모두 환호한다. 이름이 오르내린 식당 앞에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룬 손님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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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마거릿 대처와 국화, 아니 해바라기 “군중을 따르지 말고, 군중이 당신을 따르게 하라.”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한 말이다. 대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력한 리더십과 고집불통이다. 굳센 뱃심이 선한 방향으로 작동되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피곤하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그녀는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기도 하여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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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나치 회스와 라일락 칸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휩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기묘한 영화다. 얼핏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괴와 살육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섬뜩함과 잔인함이 밀려오는 공포영화에 가깝다. 글레이저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담장을 기준으로 안팎이 대비되는 모습은 흡사 키아라 메잘라마의 어린이 동화 <안팎정원>을 연상시킨다. 일부 장면은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 현실을 잔혹동화처럼 보여주는 것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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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이덕무와 윤회매 매화는 눈 속에 핀 것이 제일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나 전기의 ‘매화초옥도’ 등도 설매(雪梅)가 주제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꽃망울을 터트리는 고절한 자태에 모두 탄복했다. 지조, 절개 등의 덕목을 자랑하는 사대부들이 매화에 자신을 투영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양 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며 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추앙했으니, 매화가 사람이었다면, 꽤 젠체하며 거드름 피웠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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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식물 대통령과 식물 언제부턴가 ‘식물 국회’ ‘식물 정부’ ‘식물 대통령’이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은 식물 국회를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국회’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식물 대통령은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대통령’이란 뜻이다. 안타깝게도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관점이 이 용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국에는 이런 용어가 없는데, 급기야 외신에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식물 국회든 식물 대통령이든 그 속에 숨은 뜻은 의당 부정적이니, 식물에 빚진 나로서는 못마땅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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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괴테와 크리스마스트리 오래전, 독일 유학 시절에 크리스마스트리 판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독일 친구와 함께 대형 슈퍼마켓 입구에 좌판을 벌였다. 전나무, 독일가문비 등 다양한 나무를 판매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보다 용돈벌이가 더 중요했던 젊은 날.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거리며 크리스마스트리를 팔던 일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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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노벨과 꽃 ‘한강의 기적’. 인터넷에서 맨 처음 접했던 헤드라인이었다. 순간 새마을운동 시절 구호가 떠올랐다. 다행히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었다.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물론 노벨상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도 없거니와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우러러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국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시점에 노벨상, 그것도 문학상이라니. 잠깐이나마 눈이 번쩍 뜨이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리는 노벨보다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그간 노벨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별 감동 없다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참으로 얄궂은 심사다.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를 뒤적여본 것도 이런 연유였는데, 노벨의 마지막 여정과 노벨상 연회에 관한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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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박용래와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흔하디흔한 풀이다. 화려한 꽃이 피는 식물도 아니다. 그저 길가나 풀숲 귀퉁이에 자라 눈여겨보는 이도 없다. 사는 곳이 어디건 주인 행세도 하지 않는다. 긴 수염이 달린 좁쌀 같은 열매가 강아지 꼬리를 닮아 한자로는 구미초(狗尾草)라 한다.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강아지풀을 시인 박용래는 ‘가장 사랑하는 한마디의 말’이라 했다. 고개 숙인 강아지풀의 턱밑을 간질이며 강아지 어르듯 ‘오요요 내 강아지’ 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아지풀을 집에서 기르는 털북숭이 강아지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 그의 만물 사랑은 넓고도 깊어 동식물 구분이 없었다. 그는 강아지풀을 보고 “빛을 바라며 어둠 속에서 우는 어린이 같은 존재”라고 했지만, 나는 시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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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유박(柳璞)과 화품(花品) 어느 시대나 덕후는 있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에 꽂혀 모든 걸 쏟아붓는 열정은 옛날이라고 다를 리 없다. 조선 후기 꽃에 꽂힌 덕후가 있었으니, 황해도 배천의 금곡 출신 유박이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벼슬의 꿈을 버리고 서해 바닷가에 백화암이라는 정원을 짓고 평생을 살았다. 돈만 생기면 꽃에 몰빵하며 외국산 꽃도 마다하지 않았다. 채제공과 유득공 등 당대 문인들도 앞다투어 그의 화벽(花癖)에 관한 글을 남겼다. 당시에는 꽃의 모습과 생리, 운치와 상징성 등을 기준으로 꽃을 품평하는 것이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