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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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복온 공주와 모란 ‘꽃 중의 왕’이라. 모란을 이르는 말이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한때 중국의 국화(國花)로 물망에 올랐다.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뿐 아니라 모란에도 푹 빠져 살았다. 그 외에도 한·중·일의 수많은 사람이 모란을 사랑했다. ‘백화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너도나도 앞다투어 칭송했다. 고려시대에는 스님들까지 모란에 열광했는데, 모란이 상징하는 바를 알고서도 총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란과 관련된 수많은 인물 중에 복온(福溫) 공주를 소개하는 이유는, 모란꽃 가득 수놓은 그의 혼례복을 지금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란 이야기는 대부분 책으로만 남아 있고, 실제 인물과 관련된 유물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마침 7월 초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안녕(安寧), 모란’전이 열렸다. 모란과 관련된 유물을 마주하니 그 의미가 새롭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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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보들레르와 악의 꽃 보들레르의 <악의 꽃> 1857년 초판본이 새로 출간되었다. 표지의 범상치 않은 꽃 그림에 눈길이 먼저 갔다. 중앙에 그려진 복주머니난이 강렬하다. 이 그림을 보들레르가 요청했을까, 아니면 출판사의 제안이었을까. 젊은 날에는 어쭙잖게 시를 해석하느라 땀을 빼더니, 지금은 얼치기 기호학자가 되어 표지 그림 해석에 몇 날을 허비했다.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져도 그 배경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땐 이리저리 꿰맞춰 보는 수밖에 없다. 복주머니난의 영어 이름은 ‘여인의 신발’인데, 아래쪽 꽃잎 형태가 여성의 신발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노랑복주머니난은 프랑스어로 ‘비너스의 신발’이다. 꽃말은 변덕스러운 미인이지만, 미국 시인 윌리엄 브라이언트는 죽음을 상징하는 꽃으로 표현했다. 그 꽃을 휘감아 오르며 유혹의 혀를 날름거리는 검은 뱀은 그의 뮤즈인 ‘검은 비너스’ 잔 듀발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 아래쪽에 그려진 시계꽃은 예수를 상징한다. 꽃 모양에 따라 우리는 시계꽃이라 부르지만,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와 연관된 꽃으로 해석한다. 빅토르 위고를 위시한 기존의 낭만주의와 기독교적인 시학을 상징한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서 한 발짝 물러섰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보들레르의 심상을 표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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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정조와 석류나무 어느새 추석이 다가왔다. 설 차례가 조상께 드리는 새해 문안 인사라면, 추석 차례는 그간의 경과 보고인 셈이다. 그래서 더욱 풍성하다. 원래는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중구, 동지 등 주요 명절에 차례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 ‘의례준칙’에 따라 설과 추석에만 차례를 지내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차례에는 전통적인 과일을 올리지만, 요즘은 고인이 평소 좋아하시던 과일을 올리기도 한다. 바나나는 기본이고 열대과일인 파인애플, 심지어 망고도 등장하였다. 차례상도 세계화 추세에 발맞춘 듯하다. 조선시대 임금은 조상께 무엇을 올렸을까. 종묘 천신(薦新) 품목을 잠시 살펴본다. 1월에 청어, 2월에 송어, 3월에 고사리, 4월에 죽순, 5월에 보리, 밀, 앵두, 오이, 살구, 6월에 벼, 기장, 피, 조, 가지, 동아, 능금, 7월에 연어, 배, 8월에 감, 대추, 밤, 곡주, 9월에 기러기, 10월에 귤, 밀감, 꿩, 11월에 고니, 12월에 물고기, 토끼 등을 올렸다. 천신 품목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다. 이외에도 각 지방에서 특산물을 수시로 진상하면 임금은 우선 종묘에 천신하였다. 정조는 지방 특산물이 혹여 늦게 도착할 때를 대비하여 종묘의 문을 잠그지 말 것은 명하였다. 천신 품목의 의미는 ‘제철’에 있다. 그리하여 제철음식을 시물(時物)이라 했다. 때로는 종묘에 올릴 물품이 제때 나질 않아 절기에 맞추어 천신하기 어려웠다. 정조 때에는 ‘2월에 나던 것이 6월에나 되어서야’ 산출되어 급기야 ‘손가락만 한’ 참외를 올리며 몸 둘 곳을 몰라 하였다. 정조는 매년 정월에 권농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수시로 그 진척에 관심을 두었다. 가뭄이 들면 애를 태우며, 밤을 꼬박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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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오이정(吳以井)과 배롱나무 ‘오이정(吳以井)’ 하면 아마 금방 떠오르지 않는 인물일 테지만, 명옥헌 하면 ‘아하, 그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는 정자!’ 하고 바로 알아채는 분들이 많으리라. 명옥헌 하면 배롱나무, 배롱나무 하면 명옥헌이다. 그만큼 명옥헌은 배롱나무와 짝을 이룬 대표적인 여름 원림이라 할 만하다. 이쯤 되면 배롱나무가 명옥헌의 주인인 듯하여 정작 진짜 주인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명옥헌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오이정이다. 광해군 때 낙향하여 담양 고서면 목맥산 기슭에 조촐한 서재를 짓고 살던 아버지 오희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오이정이 그 자리에 명옥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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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보리스 토킨과 편백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은 실내보다 야외가 안전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 한복판의 인왕산도 주말이면 붐빈다. 사람 많은 해수욕은 아직 위험하고, 일광욕은 자외선이 무섭다. 이럴 땐 삼림욕이 제격이다. ‘숲속의 공기 샤워’라 할 수 있는 삼림욕은 숲에서 발생하는 피톤치드도 한몫을 한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과 죽이다라는 뜻의 치드(cide)의 합성어로 식물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곰팡이 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내뿜는 물질이다. 이 용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생화학자 보리스 토킨 박사가 1930년경에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시장에서 사람이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고도 탈이 나지 않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는 식자재에 포함된 채소와 향신료의 항균 물질 때문인 것을 밝혀내고 그 물질을 피톤치드라 명명하였다. 양파와 마늘 용액이 항균 효과가 뛰어나다는 그의 연구에 따라 의약품이 부족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 용액이 상처 치료에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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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로빈 후드와 주목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 양궁팀이 세계를 제패했다. 40년 넘게 세계 최강이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세계 양궁계에서 독보적 존재지만, 중세에는 유럽에 명궁들이 많았다. 올림픽 종목인 양궁은 영국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홍길동이 있다면 영국엔 로빈 후드가 있다. 시대적 배경과 탐관오리 엄벌, 민초들의 영웅 등 닮은꼴이 많다. 로빈 후드의 주요 무기는 활이다. 주 활동무대였던 영국 노팅엄성 인근의 로빈 후드 동상도 활을 든 모습이다. 영국의 장궁은 중세시대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 중 하나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장궁의 크기는 대략 1.8m에 달해 약 1.2m인 우리나라 각궁에 비해 크다. 바로 이런 크기 때문에 장궁이라 한다. 유명한 궁수 로빈 후드의 무기도 장궁이었다. 장궁의 최대 사거리는 300여m이고 분당 10여발의 사격이 가능하니 막강한 무기였다. 관통력 또한 뛰어났다. 셔우드 숲속에 은거지를 마련했던 로빈 후드에게는 최적의 무기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녔다. 백년전쟁을 일으켰던 에드워드 3세는 심지어 시민들에게 여가 시간과 휴일에 장궁 사격술을 연마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원거리에 유용한 장궁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궁수로 유명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한 무기도 영국산 장궁이었다. 우리나라 각궁은 대나무, 산뽕나무, 소뿔과 힘줄, 벚나무 껍질 등 여러 재료를 합쳐 만든 반면, 로빈 후드의 장궁은 단단하고 탄력 좋은 주목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특히 최상의 장력을 가진 질 좋은 장궁은 주목의 변재와 심재의 비가 1 대 3이 되는 줄기 바깥 부분만을 사용하였다. 변재는 장력이 좋고 심재는 압축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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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훔볼트와 자귀나무 “토이푸들이 천연기념물인가요? 내공 45 갑니다.” 지식검색 포털에 올라온 ‘사랑스러운’ 질문이다. 이 질문을 올린 사람은 반려견이 천연기념물처럼 소중하고 귀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포털 사이트에 천연기념물을 검색하면 용어의 출처나 유래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그 대상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천연기념물이라는 용어는 약 200년 전 독일의 자연과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처음으로 제창한 용어다. 훔볼트 해류, 훔볼트 펭귄, 훔볼트 오징어 등과 관련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딴 동식물이 30여종에 달한다. 남미의 해발 6255m 침보라소산을 오르면서 몸소 겪었던 고산병이 산소가 부족해 생기는 병이라는 것을 처음 밝혀낸 사람도 훔볼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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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손기정과 올림픽 월계수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떨군 채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었다. 독일 언론의 표현대로 ‘가장 슬픈 올림픽 우승자’였다.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고 광기에 휩싸였던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과거도 점점 잊혀 가는 듯하다. 일장기를 가렸던 월계수(정식 명칭은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이다)는 어느덧 90살 가까이 되어 손기정체육공원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수종명이 대왕참나무로 되어 있다. 대왕참나무는 미국이 원산지이다. 월계수도 아니고 참나무, 그것도 미국산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독일 국민의 씸볼 상수리’라는 제목으로 당시 손기정 우승 기록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만 봐도 그렇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잘못 알았다’라거나, ‘월계수를 구할 수 없어 대왕참나무로 대신했다’ 등으로 그 내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독일을 대표하는 나무가 참나무인데 하필 미국산 대왕참나무를 부상으로 수여할 만큼 히틀러가 생각 없는 인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