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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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노란봉투법’ 거부권 행사 말아야 지난 6월 말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노조법 제2조 및 제3조 개정법률안이 9월 국회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이 법률안의 필요성에 대해 야당들이 적극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을 동원한 시대착오적인 국민 분열 정책의 주요 대상으로 노동계를 지목해온 윤석열 정부는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어 또 다른 정치적 대치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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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탄핵 기각이 면죄부일까? 헌법재판소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 기각 결정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탄핵소추 과정만큼 치열하게 대치되고 있다. 집권여당은 탄핵소추권을 남용했다며 야당들을 몰아세운다. 지난번 검찰개혁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의 결과를 놓고 헌재를 폄훼하던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야당들은 헌재 결정에 유감을 토로하면서 책임정치가 상실된 상황에 대한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다. 시민사회 일각에선 헌재 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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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법을 욕보이는 대통령 인사권 윤석열 대통령이 또 하나의 어록을 만든 듯하다. 보좌하던 비서관들을 대거 주요 부처의 차관으로 보내면서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의 정신과 시스템에 충성하라고 당부하였단다. 헌법국가를 추구하는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왜 화제가 될까? 말과 행동이 딴판인 ‘유체이탈 화법’이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일찍이 ‘차관 통치’를 선보였던 MB 정부를 모방한 것부터 헌법정신이나 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오랜 수험생활 동안 유신헌법과 독재 대통령제를 채택한 5공헌법을 너무 열심히 공부한 탓에 6월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현행 헌법을 오독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에게 국가원수 지위를 부여한 현행 헌법 제66조는 유신헌법이나 5공헌법의 해당 조항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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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6월항쟁, 87년헌법, 대법관 인사권 현행 ‘87년헌법’을 탄생시킨 6월항쟁이 36주년을 맞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 등 권력기관의 음모를 국민이 막아내고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킨 게 6월항쟁이다. 그 와중에 경찰의 최루탄에 청년 이한열이 희생됐다. 청년들의 귀한 목숨이 국가폭력에 스러지고서야 민주주의가 꽃핀 것이다. 그 소중한 결실이 87년헌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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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이념통치의 주술, 그 초라한 성적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넘겼다.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에 턱걸이하고 있고, 부정평가는 60% 수준을 넘나들고 있다. 1주년 평가에 대한 불편함은 일방적 선동이 노골적인 행태들에서 역설적으로 확인된다. 여당이나 관변단체들의 길거리 현수막은 물론 주요 경제단체들까지 나서서 방미 성공을 찬양하는 언론 광고를 도배하는 모양새가 꼭 1970~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서 유행하던 여론 동원의 기시감을 준다. 보여주기식 여론동원만으로 부족했던지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이전 정권 혹은 야당의 잘못이나 시간부족을 1주년 평가의 주된 배경으로 삼거나 인사권으로 엄포 놓는 행태가 안쓰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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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선거제 개혁, 이제 국민이 나설 때다 내년 4월10일의 제22대 총선을 위한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이 지났다. 공직선거법은 선거일 1년 전까지 국회의원 지역구를 확정할 의무를 국회에 부과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선거제가 민주공화 헌정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을 위임할 대표를 뽑는 핵심적 헌법제도라는 점에서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넘어 정치혐오가 팽배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명백한 국회의 직무유기다. 이처럼 중요한 법정기한을 어긴 첫날에 공교롭게도 선거제 개혁을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의 첫 토론이 열리고 나흘간의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그나마 선거제 개혁을 위해 19년 만에 전원위가 소집된 것은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다. 당론보다 개별 의원의 집단지성이 발휘될 여지가 많은 형식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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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요즘 들어 집권당과 내각에서 뜬금없이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하는 일이 잦다. 노동자의 휴식권과 안전권을 무력화하는 장시간 노동의 물꼬를 여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이는 절차로 노사정 협의가 아닌 전문가 중심의 자문기구를 중심으로 삼으면서 뜬금없이 노무현 정부의 방식이라고 정당화했다. 국민들 다수가 반대하는 일본 전범기업의 강제동원 배상문제에 대한 ‘정신승리식’ 해법에도 노무현 어록을 소환하기도 했다. 전당대회가 대통령의 대표 지명대회로 전락했다는 비판에도 노무현도 그랬다면서 시대착오적인 당정일체론을 강변하기도 했다. 전체적 맥락이나 배경은 거두절미한 채 평소에는 제대로 존중하지도 않던 이전 정부와 대통령을 여론을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것은 속절없이 순진한 국민들의 시선을 흩트려서 당장의 위기만 모면해 보려는 얄팍한 정략적 술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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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법이 밥 먹여 주나? 밥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 ‘법학’이 ‘밥학’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법이 그 이념인 정의는커녕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기득권의 지배도구로 전락한 것을 비아냥된 것이다. 목숨이나 부지하고 알량한 생계를 위해 정작 법의 존재이유를 외면한 법률가의 현실을 풍자한 것이었다. 권위주의는 충분히 청산했다고 믿었던 대한국민들이 무도하게 법을 권력의 도구로 남용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길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가가 ‘밥벌레’로 불리는 일이 되풀이되지는 말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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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사람에 충성하는 정치, 희극 혹은 비극 ‘일개’ 검사 윤석열이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 드라마의 시작은 아마도 2013년 국정감사장에서의 명언으로 기억된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2012년 대선에 국정원이 댓글부대를 동원한 사건의 수사팀장으로서 당시 직속상관인 서울중앙지검장과 법무부 장관의 외압을 고발하면서 내던진 일갈이었다. 서슬 퍼렇던 박근혜 정부 초기에 정권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받던 검찰에도 법과 원칙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 것으로 국민의 뇌리에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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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요즘은 <재벌집 막내아들> 보는 재미로 산다. 이런 드라마가 왜 16부작으로 끝나야 하는지 아쉽다. 이 추운 겨울을 그럭저럭 지날 수 있도록 2편, 3편을 이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여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에 더위를 잠시나마 식힐 수 있었던 것처럼. 교육과 연구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벅차야 할 교수의 직분을 망각하고 통속적인 판타지 드라마에 놀아나는 게 꼴불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파독간호사 출신 노은님 화가의 통찰처럼 “살아남는다고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일에만 쏟아내는 건 바로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에 반하는 게 아닌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배치되어 주어진 일만을 수행해야 한다면 그게 기계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미 20세기 초에 불세출의 대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을 통렬하게 풍자한 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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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누가 헌법을 수호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지는 정평이 나 있다. 정치중립이 생명인 검찰총장직을 박차고 나와 전격적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한 명분이 헌법수호였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내려는 당시 정권으로부터 헌법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결단임을 역설하였다. 자유삭제라는 인위적 설정이나 검찰을 정치화하여 헌법질서를 훼손한 본인의 행적을 연상하면 뜨악하기는 했지만 여하튼 헌법수호의 구호만은 분명히 각인되었다. 가까스로 당선된 후 취임사에서 애써 강조한 핵심요지도 그러했다.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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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죽음 권하는 사회와 헌법상 생존권 또 안타까운 부고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대표적 제빵회사의 공장에서 근로자가 작업 중에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빵 만드는 곳에서 일하다가 참변을 당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운용하지 않고 영리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 기업경영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모범적 탈북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던 여성이 오래전에 고독사한 채 발견되었다. 아직 정확한 사인규명이 필요하지만 목숨을 걸었던 탈북이 이런 죽음을 예견하고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만일 송파나 수원의 세 모녀 사례와 같이 생활고에 따른 죽음이라면 그동안 생사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동료시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들이 얼마나 허망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