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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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내란의 시간에서 개벽의 시간으로 2024년 12월3일 밤, 부산에서 일 보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접한 비상계엄 선포 소식은 내게 실소와 공포를 동시에 안겨줬다. 도착하는 대로 여의도로 가야 하나, 달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이 많았지만 여러 사정상 일단 집으로 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 나처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힘든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간 이후에 드러났듯이 이것은 비상계엄이 아니라 대통령의 쿠데타였으며,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에게 위임받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국가의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내란이었다. 사실 그동안 윤석열과 검찰이 보여줬던 행태 자체가 사법 쿠데타였는데, 아예 ‘귀찮은’ 법적 절차를 내던지고 국가폭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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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첫눈을 기다리며 올가을 날씨가 많이 이상하다. 굳이 예년의 평균기온을 찾아볼 것도 없이 11월 중순의 한낮 기온이 20도 안팎인 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예년보다 10도 이상 기온이 높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금 당장은 포근하고 생활하기 편할 수는 있지만 불길하게 생각되는 건 지나친 걱정일까.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이런 이상기온을 가장 솔직하게 느끼는 것은 농작물이라고 한다. 먼저 벼멸구의 때아닌 습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가을이 되면 벼멸구가 사라져야 하는데 이상기온으로 그 개체 수가 늘어났다는 기사가 있었다. 아직까지 모기가 주위에서 우글대는 것을 보면 충분히 수긍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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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노벨 문학상의 너머 지난 10일 밤 이후, 한강 작가의 벼락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나 벼락같은 소식이었지, 스웨덴에서는 이미 한강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확실히 아시아 최초 여성 작가니, 대한민국 최초니 하는 수식어들은 대한민국의 공기를 마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전제 없이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드린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리 단순하지 않은 이 열기가 무엇인지도,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짚어볼 문제인 것 같다. 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우리에게 무얼 묻고 있으며 노벨 문학상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숙고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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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 고 김종철 선생의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는 지금 읽어도 진실을 가리키는 바늘이 살아 있는 글이다. 오래전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자동차가 없었지만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사회와 경제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가져온 생태적 문제들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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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시골 없는 도시라는 디스토피아 지난달부터 한 달에 1~2회씩 삼례에 있는 그림책미술관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 읽기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 시골 소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공소해질 위험도 있는 일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어느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삼례도 나 어릴 적에 비해 인구가 많이 줄어든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열렸던 때에 비하면 어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삼례는 내가 11세 때 이사 와서 자란 고향이며 아직도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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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사이버레커들의 서식지 사이버레커를 처음 실감한 것은, 2022년 12월30일이었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두 달하고 하루 지나서인데, 녹사평역에서 이태원 쪽으로 가는 길에서 추모 문화제를 하는 자리였다. 날씨가 많이 추웠지만 춥다고 말하는 것도 산 자의 투정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추모 문화제가 있기 한참 전부터 행사장 옆에는 딱 봐도 어떤 부류인지 알 만한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현장 중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집회 현장에서도 본 모습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누구든 현장을 중계하는 데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건 현장을 알리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날 만난 유튜버들은 뭔가 남달랐다. 얼굴을 뒤덮은 증오심이 느껴졌는데, 추모 문화제가 시작되자 우리 쪽으로 눈을 번득이고 있다가 정권을 비난하는 말이 나오면 소동을 부리고는 했다. 동시에 언어 충돌 상황을 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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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이따금씩’이 만드는 민주주의 ‘지옥’이란 말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 알려졌는데 그것은 비단 기독교의 영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간다는 말은 현세의 제도나 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나쁜 행동과 마음가짐을 향한 민중의 바람 내지 자기 단속이었을지 모른다. 다르게는, 고달픈 현생의 삶에 대한 보상 욕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 말을 나는 제법 듣고 자랐는데,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어서라도 이승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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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시인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 스스로를 아테네의 쇠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논리적인 변증술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이 시를 쓴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과 가족이 찾아오는데, 이때 있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케베스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쓴 적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꾼 꿈들이 시를 지으라고 명한 듯해서 “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시를 썼다고 대답해 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가장 위대한 시가”로 덧붙이지만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는 <파이돈>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아테네 시민들을 말(로고스)로써 성가시게 하던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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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박정희 동상 말고 전태일기념관을 박정희가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을 짓밟고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1961년에 전태일은 13세였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자기 몸에 불을 놓았으니 9년6개월 정도를 박정희와 전태일은 ‘공적’ 공기를 함께 마시며 산 셈이다. 실제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마저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대통령 박정희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전태일의 그런 ‘상소’는 다소 순진하게 보이겠지만, 당시 전태일에게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했고, 알다시피 그 마지막 선택이 자기 몸에 불을 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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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대파의 진실 올겨울엔 시금치를 자주 무쳐 먹었다. 겨울 시금치나 겨울 무가 맛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시금치를 자주 먹은 것은 아니다. 포항초 한 단에 4000원이 넘을 때도 있었고 남해 섬초는 꾸준히 3000원대를 유지했다. 싸다곤 할 수 없지만 시금치를 데쳐서 참기름, 담근 간장, 다진 마늘을 넣어 무친 뒤 참깨를 뿌려 먹는 맛의 즐거움 때문인지 가격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농산물 가격에 내가 좀 둔하기도 하지만, 좀 비싸면 어떠랴, 관대한 생각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농산물 가격은 지난 설 전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때는 이미 과일에 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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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그린벨트 해제는 민주주의의 해제다 배우 맷 데이먼이 주연으로 출연한 <엘리시움>(2013)은 너무도 빤한 할리우드 SF 액션물이다. 오래전에 봤던 기억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로봇을 생산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놔두고 부자들은 지구 바깥에 ‘엘리시움’이라는 인공 별로 이주해 산다. 생긴 모양은 지금 현존하는 국제우주정거장을 닮았다. 폐허가 된 지구를 버린 부자들은 거기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데 몇번의 스캔으로 모든 병을 고치는 기계가 집집마다 구비되어 있기도 하다. 버려진 지구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로봇 경찰의 강압적인 통제를 받지만 엘리시움에서는 로봇이 시민들을 보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엘리시움(Elysium)은 사람이 죽으면 가는 어두운 하데스와 달리 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나 선하게 산 사람들, 또는 영웅들이 죽으면 가는 이상적인 사후 세계라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돈이 신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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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