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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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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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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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새로움’은 여전히 문학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몰라서 그렇지 문학에서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새롭지 않으면, 즉 기존의 것을 단순 되풀이하면 작품이 주는 감동은 현저히 떨어진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 인식과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현실 조건 또는 역사라는 불빛에 비춰봐야 한다. 지금은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위조지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작정하고 위조한 게 아닌데도 시간을 지나오면서 진품의 자격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럴 때 적잖은 사람들은 진품이었던 과거를 역설하거나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며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품이 아닌 것을 진품이라고 인장을 찍어줄 순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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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떴다방 정치’의 시대에 보일러의 에어(air)를 한바탕 뺐는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엊그제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보일러를 제대로 때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나서야 다행히 방바닥에 온기가 조금 돌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슬슬 재개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파트가 낡긴 했지만, 막상 재개발을 하면 어쩌나 하는 찬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분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울 언저리에서 사는 게 일종의 난민 같다는 느낌을 아직 벗어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재개발을 시작하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막막함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한자리에서 오래 살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게는 유목의 피가 부족해서인지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걱정도 ‘가진’ 자라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내 말문은 막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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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한국의 아이히만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일이 명료하게 언어화되지 않고 아프게 버석거리기만 한다. 최근에 이태원 참사를 수사한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기록을 분석한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다. 그러다가 왜 자꾸 말더듬이처럼 이태원 참사에 대한 언어가 답답하기만 한지 짚이는 데가 생겼다. 수사 기록마저 이제는 진부해질 정도로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참사 현장을 찾았을 때, 참사 당시의 인파를 상상해봤지만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그 당시 누구나 감지했던 국가안전시스템의 혼란은 수사 기록에 잘 담겨 있었다. 사건의 진실을 탐색하고, 의미화하고, 다른 길을 상상해야 할 언어가 막히는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기성 언어의 틀로 참사의 진실이 포착되고 마는데 굳이 다른 언어가 필요할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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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세계 히틀러와 나치 일당의 유대인 혐오는 그들의 영혼에서 작동하는 원자로였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학대와 학살로 이어진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우생학적 사고에 입각한 ‘비생산적 인간’에 대한 학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소독작업’이라는 규정 아래 가스나 독극물 또는 총으로 쏴 죽이거나 굶겨 죽인 것이다. 이른바 ‘최종 해결’이라는 유대인 학살을 유대인 혐오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틀러는 “강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약자를 파괴하는, 자연의 인간성”을 공공연하게 말해왔으며, 1929년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에서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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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깊은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 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로 주위 사람들이 깊은 수치심과 무기력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7월 후쿠시마현을 강타했던 바다에게 보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방사성 물질로 범벅 된 오염수를 지난 8월24일 전격 방류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심하게 움직이기 마련인지라 방류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던 때와는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우리를 수치심과 무기력에 빠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바다에 대한 원초적인 감수성이 직격을 당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는 단지 바다에 대한 낭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은 가시적으로는 육지에서 꾸려지는 것만 같지만 사실 바다에 의존하는 바 크다. 단순히 우리가 바다에서 나는 생물을 섭취하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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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시골 병실에서 어머니의 연세 따라 시골 병원에 가는 빈도수가 잦아진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 대신 어떤 마지막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도 사실 든다. 다행이라면 동생 내외가 함께 있고 읍내에 단골(?) 병원이 있다는 정도. 지난봄에는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과 어머니의 건강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머니의 건강 상태나 병력을 잘 아는 의사 양반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대부분의 시골 병원이 그렇겠지만 병실에는 죄다 나이 든 노인들뿐이다. 간혹 젊은 사람들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어떤 분들은 생을 포기하신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어머니가 점심을 힘들게 드시는 동안 밥을 안 먹겠다는 다른 노인의 간단한 부탁도 들어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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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더 적게 갖는 민주주의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출 문제로 여러 웃지 못할 상황을 보고 기가 다 막히는 궤변들을 듣는다. 수산시장에 가서 갑자기 수조의 물을 떠먹는 돌발 행동은 정부와 여당이 이 문제를 하찮게 여기고 있거나 혹은 사태의 본질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일 막무가내식 억지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백번 양보해서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해도 그 피해가 크지 않다고 치자. 그러면 이성적으로 차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런 게 없는 것도 문제지만 눈에 띄는 현상은 이 정권 들어서 정권의 실력자들이 너무 자주 화를 낸다는 점이다. 무슨 문화 같다. 아니면 되찾은(?) 권력을 짧게나마 맘껏 누려보고 싶은 집단 무의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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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녹색평론과 김종철 2020년 6월, 김종철 선생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발행이 중단되었던 ‘녹색평론’이 계간지로 변모해 돌아왔다. 1991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문을 연 ‘녹색평론’은 우리의 지성사에 그리고 실천적 담론의 장에 놀라운 분수령이 되었다. 돌아보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현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무너지던 시기와 ‘녹색평론’이 창간되던 시기가 겹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의 길로 들어서자 혁명의 포기가 발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우리를 덮쳤던 게 지난 시간의 솔직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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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어느 건설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노동절인 지난 5월1일에 분신을 한 건설노동자 양회동씨가 끝내 숨졌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동자들을 범죄자로 몬 것이 그 핵심 이유였다. 양회동씨는 자신에게 적용된 ‘공갈’이라는 혐의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는데, 당연히 그는 공갈범이 아니라 건강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였다. 사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자 혐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요구와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단체행동을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추락한 국민적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한 정치 술수인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이 쓴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었는가>에는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 고문을 가할 때, 자신들의 도덕적 하자를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도 회칠하려는 심리적 술책을 사용했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술책은 우리도 꽤 오래 겪은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동자들을 향해 ‘건폭’이니 ‘공갈’이니 ‘협박’이니 하는 혐오 언어를 쏟아붓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삶 자체가 온통 폭력과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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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불의 시대’를 넘어서 봄 내내 산불이 일어나더니 지난 11일에는 강릉에서 다시 타올랐다. 바람이 이상하게 강하게 분 날이었다. 바람은 종잡을 수가 없었고 내리는 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을 나섰다가 아미타브 고시가 쓴 <대혼란의 시대>의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저자가 델리대학에서 문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던 때 만난 사이클론에 대한 술회였는데, 버스가 뒤집히고 스쿠터들이 나무 위에 걸려 있는 폐허에 대해 아미타브 고시는 “시각적으로 접촉 가능한, 볼 수 있고 보여지는 하나의 종(species)처럼 여겨졌다”고 썼다. 이때의 충격적인 경험이 아마도 자신의 책에 “폭풍우·홍수 같은 기상 이변”이 자주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괜한 예민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11일 분 봄날의 돌풍에서 나는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았는데, 강릉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식당에 앉아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