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최신기사
-
지금, 여기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 작년 말,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 사회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기본소득당 노동안전특별위원회와 직장갑질119에서 활동하는 노무사들이 2022년에 산재 청구된 자살사례들에 대한 업무상 질병판정서를 분석한 결과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나는 일본의 <과로 자살>을 국내에 번역 소개한 인연으로 초대받았다.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출판된 1998년은 일본에서 자살자 수가 사상 처음 3만명을 돌파한 해였다. 한국도 외환위기를 겪으며 자살률이 치솟았던 해였다.
-
지금, 여기 필수의료 떠받치는 일차의료 심장판막증 수술과 심부전, 대장암. 아버지는 오랫동안 대학병원 단골손님이었다. 외래진료 날이면 아침 일찍 들러 검사를 하고, 오전 오후 여러 진료과를 순례했다. 그나마 같은 날짜로 맞출 수 있다는 것이 다행. 자식들은 출근을 해야 하니 아버지와 어머니, 두 노인이 서로를 의지하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병원을 왕래했다. 하지만 보조기 없이 걷기 힘들어지면서, 어머니 혼자 외래를 방문하여 대신 상담과 처방약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럴 바에야 진료기록을 옮겨와서 가까운 동네의원에 다니시라고 몇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중병이고 약이 많아 복잡하기 때문에 동네의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지금, 여기 그저 숏컷일 뿐인데 황송한 ‘페미’ 대접 어릴 적에 엄마는 항상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주셨다. 변화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일어났다. 자기 이야기가 지면에 실린 것을 알면 펄쩍 뛰겠지만, 두 살 터울인 오빠는 어릴 적 심한 밥투정꾼이었다. 엄마가 옆에서 일일이 “숟가락 들어, 입에 넣어, 씹어, 삼켜” 잔소리를 해야 겨우 밥을 먹었다. 결국 엄마가 먹여주다시피 해서 학교에 보내고는 했는데, 이제 아이 둘을 한꺼번에 등교시키려니 양 갈래 머리를 땋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나 큰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첫 방학과 함께 나의 ‘숏컷’ 인생이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초등학교 1학년 페미’의 탄생 설화다.
-
지금, 여기 ‘시기상조’ 뒤에 사람 있어요 빠른 시일 내에 법률이 제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으로 논문을 끝맺었다. 2003년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기업살인법 운동’의 진화를 분석한 논문이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거치면서 기업에 책임을 묻는 사회적 요구가 거셌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제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진보적 정당 정치가 허약하다는 것이 당시 우리 연구팀의 진단이었다. 영국과 캐나다에서 노동 친화적 정당이 희생자 단체, 노동조합과 함께 입법에 나섰던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려워보였다.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지만, 논의도 못해보고 폐기된 것이 현실이었다.
-
지금, 여기 생로병사 해탈한 존재, 그의 이름은 올해 합계출산율이 0.7명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항상 핵심을 벗어나는 정책만 내놓던 정부가 이번에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자녀 돌봄의 부담을 낮춰서 출산을 유도하려 해도 가사도우미를 구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니, 이주노동자를 데려와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하고 월 급여를 100만원 이내로 한다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법안은 철회되었지만 사업 자체는 시행된다.
-
지금, 여기 유급 병가,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3년 반 전. 지금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코로나19 유행 초기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회사나 학교, 심지어 방문했던 식당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 머물렀다. 회사에서도 눈치는 줄지언정 출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확진이 되면 입원·격리 기간 동안 정부가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제공한 사업주에게도 일부 비용을 지원했다. 이내 ‘아프면 3~4일 집에 머물기’는 정부의 5대 생활 방역수칙 중 하나가 되었다. 의심 증상이 있지만 노동자들이 쉽사리 일을 중단할 수 없거나 작업장 내 방역 조치가 미흡했던 콜센터, 물류센터 등에서 유행이 시작되어 지역사회로 급속히 확산되자, 병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
지금, 여기 환상 속의 그대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노래인데도 적재적소의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정신적으로 강인할 뿐 아니라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적 역량을 갖춘 한국의 청년 여성들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가 그런 순간이다.
-
지금, 여기 밀실 거래가 아닌 사회적 논의로 어린이 환자, 중증 응급환자들이 진료받을 곳을 찾지 못해 거리를 떠돌다 사망하는 사례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대책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도 커졌다. 특히 서울에서마저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정부의 위기의식도 더 커진 듯하다. 진단과 처방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결국 문제는 한 가지 이슈로 수렴 중이다. 바로 의사 인력이다. 어떻게 하면 의사들이 필수의료 분야에서, 지방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 것인지가 고민이다. 그동안 채택해왔던 주된 방법은 ‘보상’이었다. 이를테면 필수의료 분야의 건강보험수가를 인상하거나, 지방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급여를 높게 책정하는 조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연봉 4억원에도 의사를 구할 수 없다는 뉴스가 화제에 오른 것이 몇년 전이었는데, 그 숫자는 5억, 6억원으로 가파르게 올라 최근에는 연봉 10억원의 채용공고가 등장했다.
-
지금, 여기 코로나19, 이제 성찰의 시간으로 유행이 시작되고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웠다. 관을 차곡차곡 쌓아두거나 구덩이를 크게 파서 시신을 한꺼번에 매장하는 모습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병상이 모자라고 의료인이 부족했다. 특히 간호사 부족이 심각해서, 퇴직한 이들에게까지 동원령이 떨어졌다. 치료법이 확실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절박한 심정에서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이나 과산화수소 같은 의약품을 시도해보기도 했고, 저명한 의학잡지들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논문들을 쏟아냈다. 젊은 환자들이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급작스레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고, 어떤 환자들은 냄새를 못 맡는 증상이 몇 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손을 씻어야 한다, 좁은 공간에 밀집하지 말아야 한다고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권고했다.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위험이 과장되었다며 반대 집회가 열리기도 하고, 유행의 파도마다 ‘이제 피크는 지나갔다’며 근거 없는 안심을 만들어내는 정치인도 있었다. ‘독일인이 바이러스를 몰고 왔다’는 거짓 선동을 확산시키는 신문도 빠지지 않았다.
-
지금, 여기 일 잘해내기 위한 노력이 존중받길 몇 년 전 지인들과 식당에 앉아 있는데, 군 장성이 관사의 공관병을 사노비처럼 부려먹었다는 TV 뉴스가 흘러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자신도 공관병으로 근무했다며, 뉴스에서처럼 별별 허드렛일을 다 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분명히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일을 하고 있더란다. “직접 시장에 가서 하나라도 더 좋은 거 사려고 흥정하고,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고민하고. 그러다 갑자기 저녁에 외부 일정이 생겼다니까, 섭섭한 맘이 드는 거예요. 맛있는 거 차려놨는데…. 아니, 장교가 저녁 먹고 들어온다는데 내가 왜 섭섭한 거야? 진짜 황당하지 않아요?” 일행은 박장대소했다.
-
지금, 여기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최근 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고생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정해준 필독서 중 하나였는데, 별로 재미는 없었던 것 같다. 줄거리도 모두 까먹고, 책을 안 읽은 사람도 다 아는 빅브러더 정도만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독서는 좀 달랐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 같은, 소설 속 디스토피아의 첨단 감시 기술이 모두 현실화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은 아니었다. 이 정도에 놀랄 만큼 심약한 사람은 아니다.
-
지금, 여기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정부 지난주 통계청이 2022년 인구동향 통계를 발표한 후 출산율 문제가 또다시 뉴스를 뒤덮고 있다. K출산율은 몇 년째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이쯤 되니 과연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 손에 땀을 쥐고 신기록 레이스를 지켜보게 된다. 이렇게 경쟁자 없는 레이스를 펼치는 동안 정부가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책을 수도 없이 내놓았고, 16년 동안 지출한 예산도 280조원이 넘는다. 이 정도면 세금 낭비나 배임 혐의로 전방위 ‘압수수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다들 바쁘시니 그건 어려울 것 같다. 통계청 발표 이후 대통령실은 ‘백화점식’ 정책을 지양하고 효과가 있는 정책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