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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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 조선 명종 2년(1547)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최연은 열셋 어린 나이의 임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도참설(예언)은 모두 근거가 없는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도 건국 초기엔 이런 도참설로 노래를 짓기도 했으나 태종께서 ‘어디 이런 요사스러운 도참설을 숭상하겠느냐’며 없애게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송악산 등지에서 무당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께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신이 흠향하지 않는다며 혁파했습니다. 또 세종께서는 연말에 산천에서 지내는 치성도 혁파했으며, 성종은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중종은 불교식으로 지내는 기신재를 혁파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왕조의 가법이며 옛일이니 오늘날 모두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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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7년 전 이맘때 얼마 전 경기도 안성의 봉업사지에 갔다. 한데 그날 그곳이 사적으로 지정된다는 뉴스가 나와서, 사적 지정 기념 답사가 됐다고 일행과 키득대며 절터를 둘러보았다. 봉업사지에는 10세기 고려 광종대 만들어진 태조 진전, 즉 태조의 초상화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던 곳이 있었다. 1362~1363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후 언젠가부터 버려져 잊혔으나 우연히 발견된 유적을 계기로 발굴조사가 행해지며 사적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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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프레드릭과 샤미센 프레드릭은 게으른, 아니 게을러 보이는 들쥐다. 다른 들쥐 가족들이 겨울을 대비해서 식량을 모으느라 바쁘게 일할 때 프레드릭은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햇볕을 쬐거나 초록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꾸벅꾸벅 졸기나 한다. 왜 일을 하지 않냐는 식구들의 타박에 겨울을 위해서 햇볕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고 답하는 프레드릭.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텐데 싶다. 그러나 한겨울 동굴에서 갇혀 지내며 저축한 식량을 다 축내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지치고 우울해졌을 때, 프레드릭의 진가가 드디어 발휘된다. 프레드릭은 봄에서 가을까지 모은 햇볕을 나눠주고 색깔을 보여주며 이야기와 시를 들려주어 다른 들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준다.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바로 시인을 자임하는 이 들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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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인터넷에서 ‘서울 사람이 생각하는 시골’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지도가 있다. 한반도는 절반 남짓 그렸는데, 서울은 빨간색으로 크게 그렸다. 휴전선 이북 조금은 북한이고, 남쪽에서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시골이라고 퉁쳐버리며 모두 파랗게 색칠을 했다. 그래도 제주도는 귤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표시했는데, 이 엉성한 와중에도 독도 옆에는 울릉도도 표현되어 있는, 제 딴에는 섬세한(?) 지도다. 보통 지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정확성 따위는 무시한 이런 지도도 분석의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을 심상지도(Mental map)라고 하는데, 그린 이의 심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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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왕건의 유언과 ‘공심’ 태조 왕건은 고려의 다른 국왕과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조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400여년 동안 반신반인 정도로 숭배를 받던 존재라 그렇다. 예를 들어 고려의 양대 축제라는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 왕건에게 고하는 것으로 의례를 시작한다. 수도인 개경만이 아니라 지방 곳곳에 그 초상을 모신 진전이 있었고, 전쟁이나 지방의 반란 진압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러한 진전에서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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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6조 대학원 시절에 금석문 강독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고대사 전공은 아니지만 대학원에서는 학부 때와는 달리 무엇을 새로 배우게 될지 궁금했다. 과연 학부 때와는 수준이 달랐다. 판독문을 준비해서 강독하는 것까지는 그렇게 다르진 않았지만, 교수님이 소장하고 계신 탁본을 직접 보면서 재판독을 해보거나 새로운 추정을 해보는 점이 색달랐다. 논란 많던 광개토왕릉비 역시 여러 탁본을 비교하고, 한 소장 기관에 가서 그 거대한 탁본을 펼쳐놓고 문제 구절을 판독해보기도 했다. 탁본 같은 예스러운 자료를 직접 만지고 보면서 공부를 하면, 잊어버린 감각이 자극을 받는다. 역사를 전공하면서는 도리어 무뎌진 소싯적의 호고적 취향과 덕후적 기질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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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매화 피는 철이면 생각나는 글이 있다. 소싯적 아르바이트로 읽은 이빈국(1586~1653)이라는 사람이 쓴 ‘매화설’이라는 글이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을 전부 겪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격변기를 살아간, 좀 불우한 시대의 사람이다. 개인적 삶으로 봐도 그렇게 잘 풀린 인물은 아니었다. 음서로 능참봉(종9품의 미관말직)을 제수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긴 했으나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과거 급제를 못했기 때문인데, 초반 시험까지는 그럭저럭 붙었으나 꼭 막판 한고비를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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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5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문해력을 ‘역사 리터러시’라고 지칭하고 틈나는 대로 그 규칙을 다듬어보는 중이다. 오늘은 그 규칙 제5조,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규칙 하나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바로 “역사에서 변화하지 않는 원칙은 딱 한 가지, 역사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명당 한양에 대해 짚어보겠다. 지금 서울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한양은 명당일까? 고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이 개경을 보완해줄 명당이라며 남쪽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남경으로 개창했다. 고려 말 사람들은 남경에 국왕이 머물러서 개경의 지덕(地德)을 왕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왕대·공양왕대에는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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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김장과 낙천성 김치를 좋아한다. 김치찌개에 김치볶음밥을 놓고서도 깍두기를 곁들여 먹는 사람이다. 김장을 할 때면 6가지 이상을 담그고, 밥상에는 늘 3종 이상의 김치가 올라오던 집 출신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형제들은 나 정도는 아닌 걸 보면 그냥 타고나길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애정의 정도에 비해 담그는 데는 재주가 없다. 할 줄 모르니 친정에서 김장을 할 때도 채칼로 무채 썰기라든가 대야 옮기기, 양념 붓기 같은 단순 작업밖에 못했다. 그러나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딱 한 가지 재주를 갖고 있으니, 바로 간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것이다. 익었을 때 맛있을 정도를 가늠할 줄 아는 미각 말이다. 맛을 보고 싱겁다 짜다 운운하며 이러저러 지휘를 하면, 어른들이 투덜대곤 하셨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다고. 그러나 어찌하리. 어른들 입맛은 둔해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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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영웅은 없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가끔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의 K-ASMR 국가무형문화재 시리즈를 찾아서 본다. 그렇게 찾은 동영상 중 하나가 명주짜기였다. 베틀에서 달가닥달가닥 명주 짜는 소리를 기대하며 튼 동영상은 바로 내 예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베틀에 앉아 천을 짜는 첫 화면은 맛보기였을 뿐이고, 본격적인 내용은 누에를 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뽕잎을 먹으며 누에가 성장해 고치를 짓는 장면부터 시작하더니, 인간의 온갖 작업이 이어졌다. 여럿이 모여 고치를 다듬고는 삶아서 실을 뽑아 물레에 걸어 실뭉치를 만든다. 그 후엔 서로 붙은 실을 분리하는 실째기 작업이 이어진다. 째기를 마친 실은 걸어서 말리고 가닥별로 실뭉치를 만든다. 아직도 끝이 아니다! 한 필의 길이로 실의 길이를 맞추는 베날기 작업, 그다음엔 그 실을 펼쳐 풀을 먹이고 말리는 베메기 작업이 이어진다. 베메기 작업을 하려면 한 필 길이의 실을 늘어놓을 넓은 공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여럿이 달라붙어 일일이 솔로 풀을 먹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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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분서갱유의 카르텔 2000년대 초반 일이다. 개성공단으로 남북 협력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 방송국에서 개성을 직접 방문해 그 역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마침 내가 속한 연구 모임이 고려 개경을 연구하고 있었기에, 방송국에 여러 자문과 함께 북한 측 연구자 ㅈ씨를 만나서 연구 이야기를 들으라고 조언했다. ㅈ씨는 해방 후 개경 성곽 전체를 직접 조사하여 논문을 발표한 유일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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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4조 얼마 전 우연히 육군사관학교 앞을 지나다 놀라운 조형물 하나를 보았다. 거대한 황금색의 신라 화랑 동상이었다. 신라 화랑을 계승한다는 걸 내세우기에 육사가 있는 곳을 화랑대라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문 앞에 이렇게 거대한 동상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육사는 정문 이름도 화랑문이요, 연병장도 화랑연병장이며, 기숙사는 화랑관, 복지시설도 화랑회관이었다. 동상만 해도 정문 앞만이 아니라, 도서관 앞에도, 연병장 앞에도 있다. 심지어 1년에 한 번 여는 문예전의 이름도 화랑문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