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문제는 짝다리가 아니다 얼마 전 모 방송사 TV 뉴스에 짧은 인터뷰를 했다. 평소 개방되지 않는 종묘 영녕전의 신실에 김건희씨가 함부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곳이 어떤 곳인지, 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해달라고 요청받은 것이었다. 나름 길게 설명했으나 뉴스에는 10초 정도만 반영됐다. “조선시대 때에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던 장소였을 뿐 아니라 굉장히 신성하게 관리가 되던 곳입니다. 이런 곳을 공식적인 절차도 없이 사적으로 마구 이용을 했다는 건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밀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
역사와 현실 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농장다리 아래 그늘이 진 데가 있었어. 한여름이면 노인네들이 거기 모여서 시조창을 하면서 노닥노닥했지. 거기에 제방이 있는데, 내가 그걸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아버지가 문득 풀어놓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하루는 내가 거길 기어 올라가다 떨어진 거야. 그랬더니 한 노인네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환약 같은 걸 꺼내서 먹여줬다. 아마도 청심환 아니었나 싶어.” 아버지의 이야기 마무리는 약간 씁쓸했다. “요즘 같으면 어디 그렇게 돌봐줬겠냐? 그 시절엔 그래도 그런 정이 있었다.”
-
역사와 현실 외환위기와 한국학의 전산화 1997년 말 대한민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위기의 시대, 정부가 주도한 정보통신 분야 지원은 2000년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었다. 특히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균질하고 빠른 인터넷망은 현재 한국의 인상을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느린 인터넷이나 와이파이망에 분노하는 밈, 외국인이 한국의 빠르고 편리한 정보통신망에 감탄하는 장면 같은 것은 이제 진부할 정도다.
-
역사와 현실 강무장과 생태계 강원도 철원은 조선 초에 강무장으로 쓰인 적이 있다. ‘강무(講武)’란 ‘무예를 강습한다’는 뜻으로 군사훈련 전반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사냥 의례를 강무, 진법훈련 의례는 대열(大閱)이라고 했다. 사냥 문화는 몽골의 영향으로 고려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건국 후에도 이어져 태조나 태종도 꽤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국왕의 유희나 측근 정치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태종은 이를 반박하고 ‘강무’라는 정규 군사 의례로 정비했다. 짐승을 잡아 종묘에 천신해 보본(報本·근본에 보답한다)을 실천하고,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는 해로운 짐승을 제거한다는 공익을 명분으로 제시했다.
-
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1조 2009년부터 4년 동안 방영된 <화이트 채플>이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다. 런던의 동네 지명인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드라마의 첫 시즌은 ‘잭 더 리퍼’ 사건의 모방범 이야기로 시작한다. 담당 경찰서의 수사반장 조셉 챈들러와 그의 조언자 에드가 중심인물이다. 에드는 경찰이 아니라 재야의 잭 더 리퍼 사건 마니아로서, 그가 평생 축적한 잭 더 리퍼 사건 관련 세부 지식은 조셉이 범인을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잭 더 리퍼 사건 외에도 다양한 과거 범죄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두 번째 시즌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유용함을 고려한 조셉은, 세 번째 시즌에서 에드를 정식으로 경찰서의 기록관리원으로 채용하며, 과거의 범죄 기록을 정리하고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마침 이 시즌에서 과거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 애매한 연쇄 살인 사건이 터진다.
-
역사와 현실 없어져야 할 변명 조선시대사 강의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토론이 있다. 대선에 빗대어 ‘왕선(王選)’이라 가정하고, 광해군과 인조로 편을 나누어 왕선 토론회를 벌이는 것이다. 각 조별로 자기 왕의 치적을 자랑하고 상대편의 실정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정치·외교, 사회·경제, 후보 검증 등 세 분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한다. 청중석의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누구 편을 들 것인지 미리 작성해오게 하기도 하고, 토론 후 생각이 바뀌었는지 등을 묻는 설문을 하기도 한다.
-
역사와 현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질 선비 1973년, 경상북도 어느 지역의 새마을지도자가 새마을연수원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자기 지역의 모 지도자가 거짓 실적으로 포상을 받았다고 고발하는 편지였다. 사실관계보다도 나는 그 편지의 한 문장이 흥미로웠다. 원장에게 이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해 달라며 “선생님의 애국은 바로 각하에게 직언하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신하의 충(忠)을 임금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바른길로 이끄는 간쟁이라고 보던 그 인식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500여년 전 정창손과 세종의 대화를 떠올렸다.
-
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10조 193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국세조사보고’라는 통계자료를 낸다. 조선의 형편을 조사한 보고서란 뜻이다. 이는 전국의 문맹률 조사치가 담긴 제대로 된 첫 조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시기 문맹률은 얼마나 됐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어든 한글이든 아무것도 읽고 쓸 수 없는 문맹자가 78%(남자 64%, 여자 92%)에 달했다고 한다. 즉 인구의 80%가 문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역별·계층별 편차를 고려하면 더욱 심각해진다. 지주층의 취학률이 70%일 때 자작·소작농의 취학률은 1.5%밖에 안 되던 시대니 시골일수록, 못살수록 문맹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편차를 참작해본다면, 도시의 특정 계층을 제외한 여성의 문맹률은 95% 이상이었을 것이다.
-
역사와 현실 ‘똥개천’이 남긴 것 1984년 9월 한밤중, 아버지가 곤히 잠든 나와 형제들을 흔들어 깨웠다. 홍수가 났다며 얼른 옷 입고 대비하라고 하셨다. 며칠 동안 퍼부은 비에 동네 개천이 넘치면서 난리가 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때 서울에는 298.4㎜의 비가 퍼부었다. 하루 최대 강우량으로는 1904년 기상대 창설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 한강 본류는 물론 지류까지 넘치면서 서울의 피해가 극심했다.
-
역사와 현실 고려 왕실의 마지막 숨통 1389년 겨울. 이성계, 정몽주 등 아홉 명의 대신이 공양왕을 세우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좀 미덥진 않아도 크게 거슬리는 짓은 안 할 것이라고. 그는 우유부단하고 재물 불리는 데나 관심이 있다는 것이 중평이라 임금감이 아니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적임자였을 수도 있다. 왕실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라는 명분에, 이성계의 사돈 집안이라는 숨은 배경까지 더했으니 이 정도면 안심할 만했다. 자신들의 개혁안을 지지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아니더라도 허수아비 노릇만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정침 이야기 1371년(공민왕 20) 봄, 나주호장 정침은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던 향리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제주로 가던 그 바닷길, 하필 왜구를 만나고 말았다. 중과부적이라며 다들 항복할 궁리만 하던 때, 정침은 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져 버리자, 정침은 관복을 갖춰 입고 정좌했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
역사와 현실 척결의 불가능성 1361년(공민왕 10)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수도 개경까지 함락될 처지가 되자, 공민왕과 관료들은 다급히 피란했다. 임금이 성의 동문을 나설 때, 개경 사람들도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챙기지 않았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바닥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깔리고 짓밟혔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 속에서 국왕은 물론이고 비빈들까지 말을 타고 허덕대며 소백산맥을 넘어 안동까지 피란했다. 이듬해 정월 수복될 때까지, 개경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홍건적은 사람을 잡아먹고 임산부의 젖을 잘라 구워 먹었다. 정월의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지. 눈비가 몰아치는 속에 동틀 녘부터 해 질 녘까지 전투를 하고서야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