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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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바보들의 행진, 바보의 역사 난득호도(難得糊塗)란 똑똑한 척하기보다는 바보처럼 보이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난세에 대처하는 중국식 처세술의 고급 표현이라고 한다. 청나라 중기의 문인이자 화가인 정판교(鄭板橋·1693~1765)의 말이다. 물론 바보들은 많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 한번 안 해본 자, 자기가 실은 바보인 줄을 모르는 바보야말로 진짜 바보인 줄을 바보들만 모를 뿐이다. 소년 급제하여 법대 위에 군림하다가 법에 취해 땅 디딜 줄 모르는 자들, 걸어다니는 헌법기관임을 자부하면서 거들먹거리기가 취미이거나 특기인 자들도 그 축에 포함될 것이다. 공당의 후보를 뽑아놓고 스스로 내팽개치며 그 당을 주물럭거리는 쌍바보들도 여기에 추가한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사월 마지막의 어떤 궁리 그대, 이 세계를 단박에 표현해보라 한다면? 심호흡하고 한 획부터 그어야 하지 않을까. 짐승의 얼굴을 다 그릴 수 없고, 나무의 뿌리를 다 들출 수 없다. 해와 달은 참으로 착한 거리만큼 저만치 떨어져 있다. 먼저 옆으로 한 일(一)자 하나 그윽하게 긋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 일 없는 듯 그냥 지나갈 리 없는 사월이다. 봄 향기 속의 따끔함. 훈훈한 봄바람 속에 꽃샘추위가 발톱을 숨기고 있다. 어느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4층이 없고 F층이다. 아라비아숫자 4의 발음이 ‘죽을 사’와 같아서 그걸 피하려는 방법이다. 죽음이 그리도 무서운가 보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우리 곁의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하루가 마무리되는 저녁 6시경, 붉은 노을에 물든 장엄한 일몰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善終) 소식이 속보로 떴다. 입적, 소천, 환원 등 종교에 따라 죽음을 담아내는 단어가 다 다르지만 천주교의 선종은 주체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말이다.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해도, 그 생을 살아내고 선생복종(善生福終)의 마무리는 본인의 의지대로라는 뜻이 역력하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을사 봄 풍경 몇 점 차창이 캔버스처럼 풍경을 시시각각 갈아 끼운다. 희끗희끗 잔설과 파릇한 새싹들. 멀리 뭉클뭉클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 브레히트의 짧은 시 ‘연기’가 떠오른다. “호숫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연기는 세상에서 나가는 법을 감쪽같이 알려주고, 봄꽃은 세상으로 나오는 방법을 아름답게 가르쳐준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11시22분 2000년 6월13일 오전 11시. 공항 활주로에서 기자가 소식을 전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평양입니다.” 이윽고 비행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곧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 트랩에 선 채 한동안 북녘의 하늘 한구석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밀한 고독을 깬 뒤 천천히 내려와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고 포옹했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악의 평범성 황무지보다 잔인한 달, 4월에 접어들었다. 어떤 일마다 그 어떤 놈이 끼어드는 날들의 연속이다. 발목에 겨우 찰랑대는 내 철학의 수준. 그걸 좀 높이려 하이데거 강의 듣다가 오래전의 영화 한 편으로 연결되었다. <한나 아렌트>,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 아렌트(1906~1975)의 삶을 다룬 영화다. 뉴요커지의 요청으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고 리포트를 작성한 아렌트는 유대 지도자들의 책임도 정확하게 지적한 탓에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중단하라는 압력 속에 진행된 아렌트의 꿋꿋한 강의. 어라, 오늘 우리 시대가 새겨들을 말이 아닌가. 조금 길게 중계해본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독도에 관한 명상 땅에 대한 오해가 있다. 우리는 북반구를 지구의 지붕처럼 여기고 땅도 북녘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이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도 이런 상상에 기댄 게 아닐까.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유치환이 울릉도를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우두머리에 대하여 말석에 앉아 노자를 읽는다. 노자만큼 도(道)를 강조한 이도 드물다. 흔히 수양이나 처세술로 읽기도 하지만, 내가 듣는 강의에서는 통치술로서의 해석에 방점을 찍는다. 어쨌든 노자 하면 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논어의 첫 글자가 학(學)이라면 노자의 그것은 도다. 둥그렇게 휘어진 세상의 골목과 길. 갈비뼈 같은 저 길이 없다면 서로 통할 수 없고, 통하지 못하면 섬이다. 가슴 안의 꿈도 부풀어 오르지 못하고 세상의 이상도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골방 문화인 게임과 유튜브가 설친다 해도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일은 이루어진다. 이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자명한 이치이다. 이 우주가 질서 있게 요약된 사회, 그것이 집합적으로 구현된 몸도 마찬가지다. 목숨의 바탕인 몸을 다루는 신비의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라고 한다. 통(通)하면 살고, 불통(不通)하면 죽는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튀긴 면 하나에 수프 한 봉지. 에걔, 고작 이거냐 싶어도 끓는 물만 부으면 한 끼로 훌륭하다. 텔레비전이 먹통이 되고, 드디어 기사가 오셨다. 대뜸 건장한 기기를 자빠뜨리고, 나사 풀자, 드디어 속이 홀랑 드러났다. 이게 다야? 싸늘한 기판 위에 레고 같은 반도체, 얼기설기 전선들. 거실을 점령한 기기의 실상이다. 같잖게 볼 일은 아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걸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려는 게 현대의 문화다. 슥슥삭삭 점검한 뒤 놀랄 틈도 없이 전기를 넣자, 요술처럼 불이 들어오고 미국 대통령이 툭 튀어나왔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국어사전은 풍경을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으로 풀이한다. 이 문장에는 ‘눈앞’이 빠져 있다. 풍경은 내가 보는 눈앞의 광경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눈앞은 문제적이다. 늘 빤한 것 같아도 결코 뻔하지 않은 깊숙하고 은밀한 공간. 사물과 사실이 항상 활활 타고 있는 장소. 저기 저 눈앞의 자연은 탄복할 만한 재주를 지녔다. 천하 만물에게 자신을 동시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도 손톱만큼의 충돌도 없이, 현 사태를 유지 관리하는 자연의 경영술이 아닌가. 자연은 시시각각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이들을 안심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해 안 변하는 척, 정말 고수의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예측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인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 이은 <기생충>이 가족의 갈등을 다뤘다는 몇 줄의 예고가 흘러나왔을 때,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한다는 <변신>을 쉽게 떠올렸다. 그러나 제 역할을 못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 밥버러지에 관한 게 아니었다. 나의 안일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었다. 식충이로 변신한 식구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족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 계층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어느 국회의원(A)이 회의 석상에서 어느 국회의원(B)에게 고함을 질렀다. 저거 순 쓰레기네!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이크를 타고 경향 각지의 안방까지 들렸지만 정작 건너편 B의 귀에서는 그냥 스치고 말았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또 말을 주고받는다. 말만 A의 발등을 찧었나. 이후 B가 아니라 A만 보이면 쓰레기가 먼저 A의 얼굴을 덮어버린다. 말의 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