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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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김산의 ‘아리랑’과 12·3 친위쿠데타 근래 논문과 강연을 준비할 일이 있어 김산의 자서전인 <아리랑>을 다시 보았다. 1984년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읽다가 주인공의 삶의 스케일에 읽는 내내 놀랐다. 40년이 흘러 세 번째 읽은 지금은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초점을 두었다. 여러 버전의 영어판, 일역본과도 비교해 보니 새로운 사실과 서지(書誌) 정보까지 얻을 수 있어 좋았다. 관련한 언급은 후일을 기약하겠다. 아무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역시 <백범일지>처럼 독립운동사 연구의 보물창고였다. 그래서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칼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자투리 시간에 집필 방향을 짬짬이 구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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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과잉 이념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 겉으로는 철 지난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현재진행형이니 윤석열 정부의 독립운동사 이해에 대해 기회가 왔을 때 또다시 언급하려 한다. 워낙 엄중하고 어처구니없는 독립운동사 이해를 거리낌 없이 빈번히 드러내니 말하기도 지치지만, 역사인식의 영역만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도 말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잉 이념의 제거 대상 김좌진 지난 8월 새로 개정한 한국군의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서 우리가 알 만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빠졌음이 새삼 확인되었다. 원래 이 기본교재는 작년에 새로 제작되었다가, 독도에 관한 서술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 다시 만든 교재였다. 그런데 이번에 김구, 김좌진, 홍범도 등의 이름이 없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고 상상해 보았다. 이승만을 올리려면 김구가 드러나면 안 되었을 것이고, 홍범도는 작년 흉상 철거 시도 때도 말했던 공산당 가입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김좌진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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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뉴라이트’, 생존 논리들 지난 8월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뉴라이트’ 논란이 또 일어났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답변했다. 이때의 논란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 들어 이미 임명된 몇몇 인사도 새삼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자신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비판자나 질문자나 자신의 뉴라이트관을 말한 적은 없다. 그래서 ‘뉴라이트가 뭐지’라고 묻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지만 누구도 딱히 이렇다고 명쾌하게 정의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4년부터 오늘날까지 뉴라이트의 형성, 소멸, 변질 양상을 몇 줄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논란 과정에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좌파’에게 빨갱이란 딱지가 붙는 순간 작동하는 낙인효과처럼, ‘우파’에게는 뉴라이트란 말이 그럴 만한 상징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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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테러? 의열투쟁이었다 일본어 구글 위키피디아에서 안중근을 검색하면, 그는 “대한제국(한국)의 독립운동가, 테러리스트이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암살자이다”라고 나온다. 반면에 한국어 구글 위키피디아는 그를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 사상가’로 소개하고 있다. 테러리스트, 암살자라는 규정이 없다. 안중근에 대한 이같은 상반된 평가는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의 행위를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문제와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이토 암살, 한국병합의 실마리이자 계기? 한국은 안중근 의거를 의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설명해 왔다. 이는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후 일본 검찰과 재판정에서 진술한 일관된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가 한·일 간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어서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죽였지 결코 ‘자객’으로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의병 자격으로 죽인 행위이니 자신을 ‘국제 공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하라고 일본 측에 요구했다. 안중근은 선명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처벌 대상을 분명히 하고 제재(制裁)를 가했다고 떳떳하게 밝힌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를 암살자 또는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안중근은 한국에서 의열투쟁이라는 독립운동 방식을 개척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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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새로운 기념 하기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특정 날을 지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흔히 특정한 그날을 무슨 기념일이라고 말한다. 개인 차원의 생일과 국가 차원의 국경일이 단적인 보기일 것이다. 기념하기란? 기념일에는 대부분 기념행사를 한다. 그래야 의미를 되새기고 기억력을 유지하거나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일의 기념행사는 1년에 한 차례씩 돌아온다. 그래서 364일의 긴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메워주는 존재의 하나가 기념관이다. 특히 사회나 국가 단위에서 기억의 끈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념관이 필요하다. 기념관은 기념하려는 대상에 대해 다양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기억을 더 촘촘하고 끈끈하게 강화하는 최전선이다. 또 약해지는 기억력을 저지하고 망각에 맞서는 최후의 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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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분단시대’, 강만길이 바꾸어 놓기 시작한 시선 살다 보면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가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나도 그랬다. 박사학위논문 최종 심사 때, 학위논문을 책으로 낸 이후에도 한눈팔지 말고 두 번째 연구서를 꼭 내라고 당부한 분이 계셨다(<한국 역사학의 기원>(2016)). 작년에 작고하신 강만길 선생님이다. 안타깝게도 해외 출장 중이어서 조문하지 못했다. 그러다 1주기가 다가오는 최근 북한의 ‘두 국가론’을 분석한 글들을 읽다가 문득 선생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이란 책이 생각났다. 대학생 때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불황을 이기는 책’ 중 하나였으니 나만의 추억이진 않을 것이다. ‘분단된 시대’도 ‘해방 후 시대’도 아닌 ‘분단시대’라는 새로운 시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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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 시대정신 찾아보기 1876년의 개항, 1910년의 망국과 1945년의 해방은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 전환 국면을 만든 역사인 데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개항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과 국가가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되는 신호탄이었고, 망국은 그 편입의 귀결이었다. 해방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동시에 주어진 시작점이었고, 현재 진행형인 분단은 그 길의 귀결 지점이다. 개항, 망국, 해방은 외부의 요소가 급속한 전환을 추동한 결과라는 점에서 공통된 경험이다. 반대로 내부의 잠재된 힘이 결정적 전환을 이끈 경험도 있었다. 3·1운동과 이후의 여진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 3·1운동 직후 세계와 조선의 변화를 목도한 사람들은 ‘신시대(新時代)’라는 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만큼 인생의 행로에서 이 대사건과 연관된 조선인, 특히 청소년기 조선인이었다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해방 후 남한과 북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각자의 길을 갔던 사람들 다수는 청소년기에 이때를 겪었음을 고려하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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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히틀러의 ‘나의 투쟁’ 독후사, 그럼 지금은? 청소년 시절에 친구나 선배 집에 놀러 가면 문학, 사상, 인물에 관한 글을 모은 전집(全集)이 거실 장식장에 빼곡히 진열된 경우를 자주 본 기억이 있다. 비싼 전집류 구입은 경제성장으로 폭넓게 형성된 도시 중산층의 교육열, 과시 욕망과 연관이 깊으며, 지적 허기짐을 일거에 메워 주는 방법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경까지 좀 잘나간다는 출판사들은 이때를 기회 삼아 회사의 운명을 걸고 전집류를 기획하여 외판 영업에 뛰어들었다. 출판사들은 대체로 한국과 세계로 전집류를 구분했다. 물론 이때의 세계는 동북아시아 이외의 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를 제외한 ‘서구’를 의미했다. ‘세계○○전집’은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압축한 기획물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누가, 어떤 글이 시리즈물에 포함되었는지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요즈음 표현을 빌리면 뜨악했다고 할 만큼 낯선 시리즈물이 하나 있었다.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뚜렷한 비판의식을 갖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이 살인마, 독재자의 글이 왜 포함되어 있지?’라는 막연한 반문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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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이름 없는 독립군을 기억하자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박사논문 준비차 1993년 연변대학에 반년 정도 유학을 다녀온 지. 정식 절차를 밟아 그곳에 가기 위해 서울 수유리 교육장에서 4시간 동안 반공 정신교육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다. 중국을 포함해 8개 국가를 방문하려는 한국인이라면 그래야 나갈 수 있었다. 몇달 전인 1992년 8월에 한국이 중국과 수교했는데도 말이다. ■ 민생단사건, 가해자도 희생자도 조선인 약간 부담스러운 미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데 따른 불안감을 가진 채 연변대학에 가서 가장 먼저 집중한 주제가 1932년 2월 결성된 민생단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논점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문제를 분명히 정리해야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전체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을 제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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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민주공화, 대동세상의 현재이자 미래 대동세상, 대동사회는 한국 사회에서 미래의 이상향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다. 한자사전에서 대동(大同)을 찾아보면, 약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다는 뜻과 다른 세력끼리 하나 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和平)하게 된 이상향이라는 뜻도 있다. 결국 약간의 차이를 넘어 서로 협동하며 번영함으로써 평정한 상태를 대동사회, 대동세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 대동의 사회화 대동이란 말은 17세기 대동법의 실시 과정에서 확산했다. 대동법은 공물(貢物), 곧 특산물을 쌀로 납부하게 한 납세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물을 부과하는 단위를 호(戶)에서 토지로 바꾸었으므로 토지 소유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반층의 이익을 건드린 혁신성이 강한 조세제도였다. 일부 지배층의 강한 반발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새 제도가 “넓고 큰 은혜를 입어 병들고 지친 자가 모두 일어나 춤추며 소생하기를 기대”하는 납세제도라며 지지했고, ‘백성이 좋아하는 법’이 곧 대동이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4월27일, 태백산본 26책). 그래서 백성들은 선혜(宣惠)라 부르는 중앙정부와 달리 제도의 실시 자체를 대동으로 간주하고 대동법이라 불렀다. 그러자 몇몇 지방 관아도 바꾸어 불렀고, 마침내 중앙정부도 대동법을 공식 법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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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시선의 변화와 1960년대 시대전환 사람이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로부터 시작해 ‘인생이 바뀐다’로 끝나는 긴 명언도 있듯이, 한 사회의 전환도 인식 대상에 대한 해석 틀로서 새로운 담론에 따라 시작될 수 있다. 담론의 변화는 그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하며 새로운 목표와 정체성을 규정하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대적 전환이란 꼭 격동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만 나타난다고 볼 수 없다. 발전 담론의 하나인 1960년대 근대화론과 한국 사회의 변화가 그러한 보기의 하나이다. ■ 시선의 변화를 이끈 근대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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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史淵 한반도 문제 해결 주체의 아쉬운 상상력 세계가 신냉전적 다극 질서로 변해가고 있다. 냉전 질서가 확고했던 시절처럼 이념으로 편을 가르지 않고, 다른 편과의 군사 대결도 전제하지 않지만, 진영 간 안보 대립이 존재하는 시대 말이다. 그러면서 진영을 넘나드는 협력과 경쟁도 병행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적대관계가 항존하지 않고 선택과 배제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 복합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일 수도 있다. 특히 주변 4강의 협력을 바탕으로 분단 문제를 풀어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복합 시대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 참여하는 주체로 나설 공간을 확보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가 관리의 대상에 머무르면 여백을 만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1945년 8월 전후의 경험도 그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