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아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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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평론하는 마음 어느 젊은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고 있다. 시집이나 소설집 말미에 실려 해당 책의 방향성을 소개해주고 책에 묶인 각각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주는 짤막한 글을 본 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종류의 글을 해설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문학평론가들이 쓴다. 작품론이나 리뷰, 주제가 있는 평론을 쓰는 일보다 해설을 쓰는 일이 언제나 더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저자의 글이 한 권의 책에 함께 묶이는 여타의 글과 달리, 해설은 한 권의 책에 딱 한 편만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해설을 잘 쓰지 못하면, 한 작가의 책을 망치게 되리라는 부담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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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검토 중이라던 시기에 육사 측에서 이미 이전을 위한 용역 계약까지 맺은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박정희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한 번도 문제된 적 없었던 홍범도 장군의 과거 행적에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홍범도 장군이 스스로를 ‘의병’이라 지칭한 것을 번역한 ‘partisan(비정규군)’은 6·25 전쟁 전후에 활동한 ‘공산 게릴라’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맥락을 생략한 채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며, 현재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부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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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최근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와 이를 나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올렸다. 이런 일도 있으니 동참해달라는 의도였지만, 거기엔 내가 봉사 활동도 하는 나름 좋은 사람임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런 불순한 마음을 마주하고 나니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게시물을 지우려던 찰나에 그 활동을 내게 알려주었던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내가 함께해 줘서 큰 힘이 되었다며 너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저 좋은 사람 아니에요, 언니.” 고해성사라도 하듯 언니에게 나의 ‘나쁨’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런 활동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심지어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 딱 3시간밖에 못했고요. 이런 활동을 했다고 자랑할 SNS 공간 없이도 과연 제가 봉사 활동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고백 속에는 나의 오랜 고민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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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포스트잇 대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최근 문화연대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에 자원하여 애도의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수거·분류하는 작업을 도왔다. 외국어로 쓰인 메시지와 유족이 남긴 메시지는 따로 분류해야 하기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어보아야 했다. 오래 벽에 붙어 있어 색이 바라고 구겨진 메모지를 조심스레 펼치고, 장마 기간 비에 씻겨 희미해진 글자들을 어렵사리 읽어내며, 나는 멀리서 부친 말들에 이제야 답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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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나를 만나, 그리고 나를 써 “이 과제도, 이 수업도 여러분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일, 그것만큼은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치열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진짜 나를 가감 없이 써라. 나를 쏟아내 보는 일은 액체 상태로 토해진 형편없는 몰골의 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기 서사 쓰기 과제를 내주며,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영화 <더 웨일>에서 만났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찰리는 수업 시간마다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한다. 제발 솔직하게 쓰라고.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이상한 점은 나와 같은 위치에서 내가 하던 말을 되풀이하는 누군가를 보고 역시 나만 진솔한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 게 아니라, 그것이 정말 학생들에게 중요한 일일까 하는 불안이 움텄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진정성 있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솔하게 쓰라는 그 간곡한 요청이 학생들이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인 듯 보였고, 슬피 우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자기 연민이 그의 말을 전부 긍정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했던 당부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비평가로서 단순히 좋은 글을 읽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의 성장을 목도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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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지켜본다는 것은 부리를 흔드는 저어새를 본다. 고라니가 껑충 뛰어오르는 순간을 목격한다. 쇠제비갈매기가 새끼를 돌보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20년 동안이나 이들을 관찰해 온 사람에 이끌려, 간척사업으로 다 끝나버린 줄만 알았던 갯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이는 카메라를 든다. 영화 <수라>의 감독 황윤이 담아낸 작은 몸짓들은 영화관으로 날아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에 퍼덕인다.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인 ‘수라’를 살펴 기록하는 이들과 그런 이들의 뒷모습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들, 그 따스한 시선의 연쇄를 관객들이 함께 본다. 지켜봄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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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틀린 감상은 없다 나는 교양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과 소설, 시, 비평문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읽는다. 한 편의 글을 같이 읽고서 “어떤 느낌이 드나요?”라고 질문하면, 학기 초에는 난감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시에 대한 감상을 물으면, 학생들은 “저는 시를 잘 몰라서요…”라며 답변하기를 주저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참 안타까웠다. 시의 주제가 무엇인지 혹은 이 시를 쓴 작가가 누구인지를 물은 게 아니라 시를 읽은 이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을 물어본 것이기에 정해진 답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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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서로에게 기울어 듣다 “대문 틈으로 봤어, 죽은 사람을 끌고 가는 걸. 너무 무서웠지.” 혼자 샤워하기를 꺼렸던 어린 손녀에게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말이다. 화장실 창문이 무섭다고, 어린 내가 호소했을 때, 할머니께서는 어차피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냐고, 어른의 시선에서 다그치지 않으셨다. 그저 “우리 현아 입장에서는 무섭겠다, 뭐가 튀어나올까 싶어서. 그렇지?” 하고 나의 공포에 기꺼이 함께해주셨다. 그러면서 딱 한 번, 당신이 유년 시절에 겪은 일을 얘기해주셨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누가요? 왜 죽었어요?” 하는 질문을 쏟았고, 할머니는 “막 죽였지, 그때는”이라는 아리송한 답을 남기고 입을 꾹 닫으셨다. 어린애에게 괜한 말을 했다며 잊어버리라고 당부하시던 할머니는 고통 속에 잠긴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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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사과 지난 6일, 정부는 국내 재단이 전범기업을 대신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2018년 대법원판결을 이행하기 위한 ‘해법’이라고 한다. 일본 측에서는 가해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으며, 일본 기업이 재단 기부에 참여할지도 미지수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지난 9일, ‘강제 노동’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측의 인정도 사과도 없이, 배상의 형식도 아닌 돈을 한국에서 대신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다. 굴욕적인 방안이 아닐 수 없다. 강제 징용 생존 피해자들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그런 돈은 받지 않겠다며, 제3자 변제를 단호히 거부했다. 가해 기업과 일본의 사죄가 먼저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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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계속해주세요 내가 쓰는 글에는 독자가 많지 않다. 문학도 위기라고 하는 마당에,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평론이 널리 읽힐 리 만무하다. 게다가 문학평론은 문학 이론이나 철학까지 망라하여 다루기에, 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잘 읽지 않는다. 그래도 웹진이나 신문에 발표한 글에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종종 들여다보고는 하는데, 그중에는 익명인데도 작성자가 누군지 훤히 보이는 댓글이 있다.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가며 이러이러한 점이 좋았다고, 이 부분은 이렇게도 읽힌다고,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적어준 글. 감동하며 읽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결국 피식 웃게 된다. “좋은 글을 쓰시는 작가님, 밥은 잘 챙겨 드시는지요?” 글을 쓰는 나의 안위까지 생각하는, 그런 오지랖 넓은 이의 댓글을 읽으면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만다. 그제야 아이디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역시나 익숙한, 영어와 숫자의 조합이다. 아빠가 쓰는 e메일 주소다. 종종 아이디까지 바꿔가면서 달지만, 결국 다 들키고 만다. 이건 아빠 동호회 아이디네, 이건 회사 아이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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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다정한 세계를 알아차리는 일 새해를 맞아, 친구는 단체 대화방에 해돋이 사진을 보내왔다. 1월1일에 무학산에 올라 직접 찍어온 2023년의 첫 해란다. 몇몇 친구들은 “과학 선생님이 그런 거 보러 가도 돼?”라며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새로운 해가 뜬다’는 비과학적인 믿음을 가져서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다들 웃어넘겼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우리 중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그 또한,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한 해가 가고 새로운 연도가 온다는 인식은 인간의 임의적인 구분에 근거한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관에 이미 폐기된 천동설까지 더해진 사고가 ‘새해 첫 일출’을 의미화하는 배경이겠다. 그렇다면 일출을 보러 가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은 비이성적이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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