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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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분되지 않을 자유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설령 그를 잘 모른다 해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향수’의 구절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년 전, 정지용의 문학을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던 때에는 시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다작하였고,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도 글을 썼기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수의 작품과 방대한 양의 선행 연구를 읽어내며 문학사적 의미를 유추하는 데 급급했다. 오랜 시간 그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에는 관점이 달라졌다. 글 뒤에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용은 문학이 예술성과 자율성, 정치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염결한 시인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소위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광복을 맞이하여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뻐하던 그가 해방 이후에도 사상 검열에 시달리며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과 멀어져야만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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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존재와 부재의 증명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로기완>(2024)은 살기 위해 벨기에로 밀입국한 탈북인 ‘기완’의 삶을 들여다보는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각색한 영화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으로의 성급한 귀결은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잘 봉합되지 않는 듯해 아쉬웠지만, 기완이 낯선 땅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생의 굵직한 사건들을 진술한다. 이때 어머니의 시신을 병원에 넘기고 돈을 마련했던 비극적인 사연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해당 병원이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 없다고 발뺌하자 기완은 궁지에 몰린다. 설상가상 증인으로 나서주겠다던 공장 동료 선주는 그를 배신하고 로기완이 정치적 망명이 인정되는 북한 사람 행세를 하여 난민 지위를 획득하려는 조선족이라고 거짓 진술한다. 기완은 난민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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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솔직히 말해서 동료 작가의 첫 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그에게 책이 참 좋았다고 거듭 말했다. 고마워하던 그는 “진짜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게 더 도움이 돼요. 책 어땠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약간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얻고자 하나보다 싶어, 비판할 요소들을 궁리하다가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말해주었다. ‘서문의 첫 구절은 구조가 복잡해 쉬이 읽히진 않았다’, ‘결말부에 반복되는 단어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웃어넘기고, 자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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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2023년에는 일이 몰려 바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을 참는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꼭 잡아 가두어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참았던 마음들을 열거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 계절의 지나감을 살피는 마음,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며 미소를 데우는 마음, 세상의 모서리에 애정 어린 눈길을 퐁당 던지는 마음, 그 파동으로 나 또한 물결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모두 잘 참고 아껴야 했다. 내야 하는 논문을 제시간에 냈고, 써야 하는 원고를 제시간에 마감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미루지 않았고, 성적 마감 시간을 준수했다. 나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 후련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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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력(武力)에 맞설 무력(無力) 정전 70주년을 맞아 경기문화재단이 개최한 2023년 DMZ 평화문학축전에 참석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의 대화’ 사회를 봤다. 그 일을 의뢰받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참전했던 200여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눌 수 있다니 꿈같은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건넬 질문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말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책 <아연 소년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이야기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 또다시 ‘삶의 철학’ 대신 ‘사라짐의 철학’ 안에서 사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전쟁의 참상과 이를 증언하는 비통한 목소리 속에 머무르며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작가에게, 다시금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며 전쟁에 관해 물어야 했다. 그가 전쟁에 관해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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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 요즘엔 ‘무해하다’라는 말이 찬사로 쓰인다. 갈등과 대립이 넘쳐나는 사회에 피로감을 느낀 탓일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진다. 서사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무해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잔잔하고 평온한 이야기들이 유행한다. 하지만 무해한 서사가 각광받는 이 흐름이 달갑지만은 않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작품에 그대로 담아내던 ‘비윤리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반향으로 이러한 경향성이 생겨났음을 이해하고 긍정한다. 그러나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은 문제다.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반대로 해를 입을 일 또한 없는,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선인(善人)’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해 서사로 상찬받을 때면, 탄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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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평론하는 마음 어느 젊은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고 있다. 시집이나 소설집 말미에 실려 해당 책의 방향성을 소개해주고 책에 묶인 각각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주는 짤막한 글을 본 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종류의 글을 해설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문학평론가들이 쓴다. 작품론이나 리뷰, 주제가 있는 평론을 쓰는 일보다 해설을 쓰는 일이 언제나 더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저자의 글이 한 권의 책에 함께 묶이는 여타의 글과 달리, 해설은 한 권의 책에 딱 한 편만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해설을 잘 쓰지 못하면, 한 작가의 책을 망치게 되리라는 부담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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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검토 중이라던 시기에 육사 측에서 이미 이전을 위한 용역 계약까지 맺은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박정희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한 번도 문제된 적 없었던 홍범도 장군의 과거 행적에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홍범도 장군이 스스로를 ‘의병’이라 지칭한 것을 번역한 ‘partisan(비정규군)’은 6·25 전쟁 전후에 활동한 ‘공산 게릴라’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맥락을 생략한 채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며, 현재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부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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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최근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와 이를 나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올렸다. 이런 일도 있으니 동참해달라는 의도였지만, 거기엔 내가 봉사 활동도 하는 나름 좋은 사람임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런 불순한 마음을 마주하고 나니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게시물을 지우려던 찰나에 그 활동을 내게 알려주었던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내가 함께해 줘서 큰 힘이 되었다며 너는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저 좋은 사람 아니에요, 언니.” 고해성사라도 하듯 언니에게 나의 ‘나쁨’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언니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런 활동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심지어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 딱 3시간밖에 못했고요. 이런 활동을 했다고 자랑할 SNS 공간 없이도 과연 제가 봉사 활동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고백 속에는 나의 오랜 고민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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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포스트잇 대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최근 문화연대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에 자원하여 애도의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수거·분류하는 작업을 도왔다. 외국어로 쓰인 메시지와 유족이 남긴 메시지는 따로 분류해야 하기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어보아야 했다. 오래 벽에 붙어 있어 색이 바라고 구겨진 메모지를 조심스레 펼치고, 장마 기간 비에 씻겨 희미해진 글자들을 어렵사리 읽어내며, 나는 멀리서 부친 말들에 이제야 답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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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나를 만나, 그리고 나를 써 “이 과제도, 이 수업도 여러분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일, 그것만큼은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치열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진짜 나를 가감 없이 써라. 나를 쏟아내 보는 일은 액체 상태로 토해진 형편없는 몰골의 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기 서사 쓰기 과제를 내주며,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영화 <더 웨일>에서 만났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찰리는 수업 시간마다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한다. 제발 솔직하게 쓰라고.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이상한 점은 나와 같은 위치에서 내가 하던 말을 되풀이하는 누군가를 보고 역시 나만 진솔한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 게 아니라, 그것이 정말 학생들에게 중요한 일일까 하는 불안이 움텄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진정성 있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솔하게 쓰라는 그 간곡한 요청이 학생들이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인 듯 보였고, 슬피 우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자기 연민이 그의 말을 전부 긍정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했던 당부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비평가로서 단순히 좋은 글을 읽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의 성장을 목도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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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지켜본다는 것은 부리를 흔드는 저어새를 본다. 고라니가 껑충 뛰어오르는 순간을 목격한다. 쇠제비갈매기가 새끼를 돌보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20년 동안이나 이들을 관찰해 온 사람에 이끌려, 간척사업으로 다 끝나버린 줄만 알았던 갯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이는 카메라를 든다. 영화 <수라>의 감독 황윤이 담아낸 작은 몸짓들은 영화관으로 날아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에 퍼덕인다.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인 ‘수라’를 살펴 기록하는 이들과 그런 이들의 뒷모습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들, 그 따스한 시선의 연쇄를 관객들이 함께 본다. 지켜봄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