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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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기다리는 시민들의 존재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진다. 생과 직을 걸고 선언에 이름을 올리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까. 비장한 결기에 비해 숭고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모였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무너지고 찢어지는 우리 사회를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줄줄이 선언하는 모습은 다소 어색하다.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지식인 역할을 재론할 사정은 내게 없다. 다만 ‘어른 없는 사회’란 지적처럼 주변에 지성의 준거로서의 지식인보다 정파적 이해의 대변자가 더 많아진 건 불행한 사실이다. 단기 처방으론 엄두도 낼 수 없이 켜켜이 쌓여 우리 삶을 짓누르고, 오로지 견디라 할 뿐인 지금의 체제를 마주 본다면 시국선언은 대통령을 향해 있을 수만은 없다. 과녁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을 넘어 수십년째 번갈아 집권하며 이 질서를 만들어온 체제의 공모자들이어야 한다. 시국선언이 어색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교수·지식인이란 지위만큼 이들도 이 가혹한 체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위선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조차 그들이 타개하고자 하는 그 시국의 일부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는 데서, 우리도 현 시국의 일부라는 비참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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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지금, 광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탄핵제도는 고위공직자가 직무수행에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할 때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따져 그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헌법의 규범력을 확보하는 제도다. 그중 대통령 탄핵은 다른 고위공직자 탄핵에 비해 다소 특수하다. 우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되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다른 공직과 달리 막중한 지위, 지위의 안정성을 헌법이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탄핵심판은 그 자체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제도임에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원리를 감안할 때,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 의회가 탄핵하는 건 당연히 간단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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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2016년 광장’의 교훈 대통령이 몹시 수상하니 2016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친박의 농단, 옥새 파동으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참패한다. 조선일보는 “여당이 연정·합당 등을 통해 정치판을 통째로 흔들거나 모든 것을 내주겠다는 각오라도 하지 않으면 현재 국면을 풀어내기 어렵다는 점은 자명하다”(4월21일자 사설)며 위기의 신호를 울린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고 친박계와 비박계 간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은 친박을 도려내어 진영 재편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표적은 청와대(우병우 민정수석)로 확장된다. 이후 흐름은 우리가 잘 알듯, 국정농단과 측근 비리가 연이어 폭로되었고 분노한 수많은 시민은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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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포퓰리즘 정치’를 넘어서 귀를 의심했다. 반국가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니.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었다. 작년 6월 자유총연맹 창립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한 바 있다. 반국가세력은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지니고 유엔사 해체와 종전선언을 주장하는 사람이라 했다. 작년 광복절에도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등으로 위장하여 공작을 일삼는다고 했다. 대통령의 말은 너무도 쉽게 어떤 이들을 국민이 아닌 자, 우리 사회의 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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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내전 중인 사회 이 지면에 글을 시작할 즈음 만났던 친구들이 있다. 그중 2016년 가을로 돌아간다면 광장에 서지 않을 것이라 말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갈가리 찢긴 채 내전 중인 사회’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전환의 시작점으로 보였던 촛불광장, 그러나 한국사회는 급속도로 청산과 복수, 응징이 반복되는 수렁에 빠졌다. 그 얘기를 나눴던 때로부터 1년6개월이 지난 오늘날, 정치는 행정부(대통령)와 입법부(야당)의 정면충돌로 격화되고 있다. 사회도 화해할 수 없는 적대의 악순환으로 치닫고 있다. 출구는 있는 걸까. 대통령제는 지금처럼 작정하고 싸우려 드는 정국에서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낸다. 특히나 분점정부(여소야대) 상황은 갈등을 증폭시킨다. 국민의 대표기관이 대통령과 의회로 양분되어 ‘이중 정당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평중 교수는 “이중권력 상태”라 말하기도 한다. 한 국가 안에 두 정치세력이 통치권을 두고 다투는 내란상태라는 것인데, 문제는 탄핵과 거부권을 비롯해 각종 법이 보장하는 권한이 최대치로 동원되고 있어 정치규범이나 제도 신뢰가 처참히 붕괴한다는 데 있다. 유시민은 대통령을 보고 ‘도자기 박물관 속 코끼리’ 같다고 했는데, 그보다 우리는 도자기 박물관 속 코끼리 두 마리가 거침없이 다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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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시민운동, ‘양당 구도’ 그 바깥을 바라봐야 별다른 화제가 되지 못한 기사가 있었다. 총선 경쟁이 한창이던 지난 3월24일 경향신문이 단독 보도했는데, 제목은 ‘민주당 ‘정책협약 하려면 지지선언 하라’…“시민사회 동원” 비판에 철회’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가 시민사회단체들의 정책협약 요청에 대해 “공식적인 민주당 지지를 전제로 진행하겠다”고 했다는 것.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했고 민주당은 해당 지침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한 표가 아쉬울 만큼 치열한 선거운동이 벌어지던 중 생긴 촌극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진보적 시민운동에 대한 정치(민주당)의 하위파트너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일련의 평가와 겹쳐본다면 절대 가볍지 않은 보도다. 최근 민주당 내 당원민주주의 열풍과 함께 정당이 시민운동을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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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국회의장은 국민의 대표다 국회의원은 당원의 대표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다. 당파적 이해를 넘어 “국가 이익을 우선해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헌법기관의 대표로서 국회의장을 선출한다. 그렇게 선출된 국회의장은 특정 이해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당적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당연한 얘길 늘어놓는 이유는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민주당은 최근 ‘당원 주권시대’를 선언하며 당원권 강화의 일환으로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 투표를 반영하도록 당헌·당규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되면 의회 대표로서 국회의장을 특정 정당의 다수가 뽑게 되며 당심에 복무하는 당파적인 국회의장이 제도로서 용인된다. 헌정주의에 대한 위협임과 동시에 민주주의 규범의 파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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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운동의 재구성을 위하여 진보정당이 사라진 시대다. 정의당이 원외로 퇴장했음에도 진보정당이 원내에 있다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했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실제로 정의당에 투표하던 유권자 다수가 조국혁신당으로 옮겨 갔다는 분석도 적잖다. 당명으로만 본다면 새진보연합이나 진보당도 원내 진보정당이다. 어쩌면 ‘진보’의 의미가 그만큼 희미하거나 무의미한 시대라는 생각도 든다. 2019년 ‘조국 사태’ 이래로 이번 총선까지 ‘장기 조국 사태’라 부를 만한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서초동 집회에서 시작해 진보운동 분열이 가속화됐는데 이번 총선에서 연합정치를위한시민회의와 진보당의 더불어민주당 위성정당 참여 등을 겪으며 정점을 찍었다. 2020년 위성정당 사태 당시에 비해 진보운동 진영의 비판은 침묵에 가까웠다. 심지어 여러 이유를 들며 정당화하기도 한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원한과 응징에 기댄 ‘진보’라는 묶음은 이토록 아슬아슬하다. 또다시 적당히 봉합하며 불편한 동거를 계속할지 구체적 분열로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열의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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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선거 때마다 돌고 도는 ‘심판’…독자적인 미래를 그리며 총선을 바라보는 구도는 대체로 심판론에 입각해 있다. 이에 따라 선거 결과 또한, 현 정부 탄생의 시점에서 출발해 여야의 경쟁 릴레이 간 득점과 실점의 비교 우위로 해석하는 듯하다. 승자독식의 선거가 이런 식의 차악선택의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는 주장은 흔히 볼 수 있다. 주지하듯 두 정치세력이 서로를 심판하며 번갈아 집권해온 것이 우리 정치의 불행이자 현실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심판’이 실현되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2020년 총선을 떠올려본다. 감염병의 유행으로 비닐장갑까지 껴가며 투표했던 2020년 4월, 더불어민주당과 민주당 위성정당은 180석을 차지했다. 단독 180석이 갖는 함의는 중단 없는 개혁이었다. 국회의장, 상임위원장 다수를 확보하여 원구성의 주도권을 가졌고 신속처리안건 단독추진이나 필리버스터 중단도 가능한 만큼 강력한 입법권이 부여되었다. 사실상 야당의 견제수단이 사라진 데에 많은 이들은 일하는 국회를 주문하면서도 ‘권력의 분점’을 요구했다. 절대적 우위의 힘이 야당의 무력화가 아닌 여러 위협에 맞서 새로운 사회협약을 창출하기 위한 설득의 힘으로 활용되길 주문했다. 특히 ‘촛불연합’에 기대를 걸던 이들은 미국의 뉴딜연합을 거론하며 팬데믹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위협을 해결하기 위한 다수연합 구축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권력의 독점은 더 강화되었다. 적대정치와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막강한 권한은 설득과 타협 없이 자유롭게 행사되었다. 여러 개혁입법은 21대 국회와 정부에 의해 거부되거나 미뤄졌다. 2020년으로부터 2년 뒤, 민주당은 ‘심판’되었고 현 정부가 출범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심판의 시간이 찾아왔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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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운동만의 독자적 전망은 어디로 갔을까 비례 의석수는 2004년 56석에서 출발해 2008년 54석, 2016년 47석으로 줄었다. 2024년엔 46석이 되었다. 진보운동의 정치개혁 전략의 중심엔 비례대표제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의 강성희 의원은 비례 의석수를 줄이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일부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의 하위파트너로 민주당 위성정당에 제 발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은 위성정당을 비호하고, 시민사회 일부는 위성정당 창당과 운영에 가담하고 있다. 민주당 이중대를 넘어 선봉대를 자임하는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신장식은 노회찬을 인용하며 조국과 손잡았다. 이합집산만 치열하고 진보운동만의 독자적 전망은 온데간데없다. 녹색정의당은 지지율 2%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보운동의 한 순환이 종료되는 듯하다. 진보정당과 진보의 외피를 둘러썼던 노동, 시민사회 모두 근근이 유지해오던 역사와 유산을 불사르고 퇴화를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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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는 못하더라도 후퇴는 하지 말자 1년 전, 지면에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화두는 오늘날 사회운동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익숙한 것 중 하나는 안일한 진영주의의 대명사인 ‘민주(진보)대연합’이었다. 그것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현 사태를 해석하며 반민주의 자리에 끊임없이 민주당 아닌 정당을 채워넣고 그들을 청산하면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는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적이라 지명된 이들의 이름만 바뀔 뿐, 달라진 세력구도와 비판적 성찰은 없고 오직 적과 우리의 대립이 모든 갈등을 삼킨다. 정세는 납작하고 대안은 텅 비어 있다. 진보운동은 적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는 장구한 여정에 따라 시시포스적인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총선을 두어 달 남긴 현재, 시민사회와 야권으로부터 민주대연합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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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이번 총선은 다를 수 있을까 고백컨대 대학시절 최장집 교수를 싫어했다. 민주화에 대한 ‘제한적’ 의미가 불만이었다. 그에게 민주화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기존 질서를 유지·온존하며 그 틀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체의 전화라는 상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의 운동의 존속을 정당제도의 미성숙이나 실패에 따른 결과 정도로 치부하거나 운동의 주체를 ‘엘리트 중산층’에 한정하는 그의 입장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정치와 운동을 보며, 특히 정치적 극단화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운데 그를 너무도 쉽게 외면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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