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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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시민운동, ‘양당 구도’ 그 바깥을 바라봐야 별다른 화제가 되지 못한 기사가 있었다. 총선 경쟁이 한창이던 지난 3월24일 경향신문이 단독 보도했는데, 제목은 ‘민주당 ‘정책협약 하려면 지지선언 하라’…“시민사회 동원” 비판에 철회’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가 시민사회단체들의 정책협약 요청에 대해 “공식적인 민주당 지지를 전제로 진행하겠다”고 했다는 것.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했고 민주당은 해당 지침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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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국회의장은 국민의 대표다 국회의원은 당원의 대표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다. 당파적 이해를 넘어 “국가 이익을 우선해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헌법기관의 대표로서 국회의장을 선출한다. 그렇게 선출된 국회의장은 특정 이해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당적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당연한 얘길 늘어놓는 이유는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민주당은 최근 ‘당원 주권시대’를 선언하며 당원권 강화의 일환으로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 투표를 반영하도록 당헌·당규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되면 의회 대표로서 국회의장을 특정 정당의 다수가 뽑게 되며 당심에 복무하는 당파적인 국회의장이 제도로서 용인된다. 헌정주의에 대한 위협임과 동시에 민주주의 규범의 파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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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운동의 재구성을 위하여 진보정당이 사라진 시대다. 정의당이 원외로 퇴장했음에도 진보정당이 원내에 있다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했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실제로 정의당에 투표하던 유권자 다수가 조국혁신당으로 옮겨 갔다는 분석도 적잖다. 당명으로만 본다면 새진보연합이나 진보당도 원내 진보정당이다. 어쩌면 ‘진보’의 의미가 그만큼 희미하거나 무의미한 시대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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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선거 때마다 돌고 도는 ‘심판’…독자적인 미래를 그리며 총선을 바라보는 구도는 대체로 심판론에 입각해 있다. 이에 따라 선거 결과 또한, 현 정부 탄생의 시점에서 출발해 여야의 경쟁 릴레이 간 득점과 실점의 비교 우위로 해석하는 듯하다. 승자독식의 선거가 이런 식의 차악선택의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는 주장은 흔히 볼 수 있다. 주지하듯 두 정치세력이 서로를 심판하며 번갈아 집권해온 것이 우리 정치의 불행이자 현실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심판’이 실현되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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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운동만의 독자적 전망은 어디로 갔을까 비례 의석수는 2004년 56석에서 출발해 2008년 54석, 2016년 47석으로 줄었다. 2024년엔 46석이 되었다. 진보운동의 정치개혁 전략의 중심엔 비례대표제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의 강성희 의원은 비례 의석수를 줄이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일부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의 하위파트너로 민주당 위성정당에 제 발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은 위성정당을 비호하고, 시민사회 일부는 위성정당 창당과 운영에 가담하고 있다. 민주당 이중대를 넘어 선봉대를 자임하는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신장식은 노회찬을 인용하며 조국과 손잡았다. 이합집산만 치열하고 진보운동만의 독자적 전망은 온데간데없다. 녹색정의당은 지지율 2%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보운동의 한 순환이 종료되는 듯하다. 진보정당과 진보의 외피를 둘러썼던 노동, 시민사회 모두 근근이 유지해오던 역사와 유산을 불사르고 퇴화를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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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진보는 못하더라도 후퇴는 하지 말자 1년 전, 지면에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화두는 오늘날 사회운동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익숙한 것 중 하나는 안일한 진영주의의 대명사인 ‘민주(진보)대연합’이었다. 그것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현 사태를 해석하며 반민주의 자리에 끊임없이 민주당 아닌 정당을 채워넣고 그들을 청산하면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는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적이라 지명된 이들의 이름만 바뀔 뿐, 달라진 세력구도와 비판적 성찰은 없고 오직 적과 우리의 대립이 모든 갈등을 삼킨다. 정세는 납작하고 대안은 텅 비어 있다. 진보운동은 적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는 장구한 여정에 따라 시시포스적인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총선을 두어 달 남긴 현재, 시민사회와 야권으로부터 민주대연합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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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이번 총선은 다를 수 있을까 고백컨대 대학시절 최장집 교수를 싫어했다. 민주화에 대한 ‘제한적’ 의미가 불만이었다. 그에게 민주화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기존 질서를 유지·온존하며 그 틀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체의 전화라는 상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의 운동의 존속을 정당제도의 미성숙이나 실패에 따른 결과 정도로 치부하거나 운동의 주체를 ‘엘리트 중산층’에 한정하는 그의 입장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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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트릴레마’의 사회운동,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처한 문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과 같은 양자택일이나 딜레마를 넘어설 때가 있다. 트릴레마란 그러한 난해한 문제의 한 양상인데,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며 이 셋 중 둘을 만족시키면 다른 하나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을 나타낸다. 잘 알려진 트릴레마 사례로 국제경제에서는 안정된 환율, 자유로운 자본이동, 독자적 통화정책 간 관계가 있고, 재정에서는 낮은 조세 부담, 낮은 국가채무, 높은 복지 수준 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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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게으른 구호엔 어떠한 감동도 희망도 없다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서 한 발언자는 지식인을 향해 집회와 행진에 함께할 것을 촉구했다.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 했다. 죽음의 행렬을 끝내기 위해 지식인이 나서서 행동해야 한다는 취지다. 의문이 들었다.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을 기능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점 지식인은 혼탁한 현 사태를 냉정히 파악하려 애쓰고 기존의 답에 균열을 내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오래된 비극의 해결이 요원할뿐더러 더 심각히 엉키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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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정치의 문턱 앞에 쌓여가는 죽음, 당장 끝내야 가끔 한국안전보건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최상단에는 산업현장에서의 사망사고 속보가 ‘중계’된다. 사망사고의 날짜와 장소, 경위가 전광판에 무심히도 스쳐간다. 죽고 또 죽는 가운데 기억되는 죽음은 드물다. 여럿에게 애도되던 죽음조차 뒤따르는 다른 죽음에 잊혀지기 일쑤다. 지난 15일은 SPC계열사 공장에서 끼임 사고로 숨진 노동자 박선빈씨의 1주기였다. 다가오는 12월10일은 김용균씨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그들의 죽음 사이에도 수많은 죽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에도 죽음과 사고는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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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사회운동은 다른 길, 다른 희망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사회운동이 이명박 정부 아래서 주어질 단기적 역할에 만족하여 과거의 관성적 정부 비판형 운동패턴을 반복한다면 희망은 없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손쉬운 비판에 만족하지 말고 자신에 대한 성찰을 더욱 배가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 사회운동, 시민운동이 보수정부의 실정을 즐기는 안이한 반대파로 머물러서는 정권을 교체할 수 있을지언정, 민주국가, 평화국가의 길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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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발언대 무너지는 사회…‘사회’운동의 책임이 없을 리 없다 같이 사는 이가 초등학교 교사다. 최근 불거진 교사·아동학대 문제에 심란함을 감추지 못한다. ‘사건’이 시작되면 교사는 법적 개인이 된다. 변호인과 법적으로 유효한 증거만이 의미를 가진다. 사태에 대해 ‘교권’ 강화나 초·중등교육법, 아동학대법 개정 등이 해법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심란함의 요체는 우리가 논하는 대안이 오로지 법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복잡하게 꼬인 사회적 갈등이 몇몇 법으로 구제되리라는 믿음은 매끄러워 의심스럽다. 법 중심의 세계에서는 학교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더욱이 법을 통한 정의의 회복 앞에서 ‘학교공동체’라는 말은 낭만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