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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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전관예우와 사교육비 열두세 살 즈음이었나, 집안에 송사가 났는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다 크게 놀랐다.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한참 곱씹다가 혼자 결론 내렸다. 어른들이 잘못 알았을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만일 사실이라면 재판에서 이겨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존경받아 마땅한 듯 고고하고 대단해 보이는 법관들이 도저히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몇살 더 먹고 ‘전관예우’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나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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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주 4일제’ 말할 상황 아니다 예전에 다닌 직장은 근속기간 상관없이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동일하게 연차가 27일이었다. 어느 해 안식월 등 다른 제도를 조정하는 대신 연차제를 바꾼 결과다. 그해 직원 퇴사율이 뚝 떨어졌다. 이 경험을 말하면 “법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꽤 있다. 연차휴가에 대해 ‘처음엔 1년에 15일, 이후로 2년마다 하루씩 늘어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60조에 그렇게 정해져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이를 마치 ‘국룰’, 즉 국가가 정해준 휴가일수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의 최저선을 정한 법이다. 그 선 밑으로 내려가면 규제하지만 그 이상 높아지는 것은 규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법을 ‘국룰’로 아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근로조건을 거의 본 적 없고 심지어 법 규정도 안 지키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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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헌법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이제나저제나, 이 나라가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 다독인다. 더디더라도 반드시 옳은 길로 갈 테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우리 대다수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실감할 수 있어서다. 현실은 언젠가부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도록 복잡하게 꼬여 있는데, 왜 이번만큼은 이토록 답이 분명할까? 헌법이라는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국회의 해제 의결을 막으려던 일련의 조치들이 헌법 77조 위반이라는 것만큼은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이견이 없다. 이 사실 하나만 붙잡고 가더라도 혼란은 종내 정리되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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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직업인으로서의 국회의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최고로 긴장되는 순간은 광주를 빠져나가려던 택시가 군인 검문에 걸렸을 때다. 여기서 잡혔다면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취재한 독일 기자와 택시기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트렁크를 뒤지던 군인은 낌새를 채고서도 택시를 그냥 보내준다. 이 장면을 봤을 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 군인의 행동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전한 당시 상황 중 하나였다. 사정을 알면서도 검문소를 통과시켜 준 군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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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한국인처럼 일하는 소망의 결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지난 8일 산업재해로 사망한 강태완씨(32·몽골 이름 타이왕)에 대해 지난 몇년간 한겨레에 연재된 다섯 편의 기사를 순서대로 읽던 중 몇번이나 그랬다.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온 그가 합법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몽골로 자진출국했다가 귀국하는 여정을 담은 연재기사였다. 당사자들이 일일이 청원하고 읍소하고 국가인권위원회까지 거쳐야 조금씩 움직이는 법무부와, 매번 짧은 길을 멀리 돌아가게 만드는 일선 행정의 행태에 읽는 내내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태완씨가 얼마 전 사망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라서다. 어떻게든 빨리 자격을 얻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기사를 따라가다 그 점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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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삼무원과 노벨 경제학상 삼무원, 엘무원, 현무원, 슼무원…. 일자리를 연구하며 최근 1~2년 사이 부쩍 자주 들은 말이다. 재벌 대기업 이름과 ‘공무원’의 합성어로, 거기서 하는 일이 공무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10여년 전부터 유행한 ‘월급루팡’과 비슷해 보이지만 쓰임이 약간 다르다. 월급루팡은 주로 연봉은 많지만 하는 일은 없어 보이는 관리자들을 지칭한다. 그에 비해 ‘○무원’은 그 기업 직원들이 실망과 자조를 담아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대기업 정규직’이 꿈의 일자리인 것은 단지 연봉이 높고 워라밸이 좋아서, ‘네임밸류’가 있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하고 혁신적인 일을 하는 기업의 일원이 되어서 나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 그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내부에 혁신은 보이지 않고, 비효율적 의사결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하고, 그랬는데도 결국은 윗사람 말 한마디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경험을 하다 보면 ‘그냥 공무원처럼 일하고 워라밸이나 챙기자’고 자조하게 되는 것이다. 요 며칠 사이에는 ‘삼무원’ 단어가 언론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잠정 실적 발표 뒤 삼성전자 위기론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와중에서다. 특히 전영현 부회장이 실적 저조에 대해 사과하면서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법을 들여다보고 고칠 것은 고치겠다”고 한 말은 조직 내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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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사라진 여성들의 경제적 가치 장면 하나. 요즘 식당에 가보면 바닥에 앉던 자리가 없어지고 식탁과 의자로 바뀐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유를 물으면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서라 한다. 무릎을 자주 꿇고, 허리를 구부려가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한때는 있었는데,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장면 둘. 가사 청소 노동자 매칭 플랫폼 기업에서 들은 얘기다. 이 시장은 서비스 이용 희망자는 넘치는데 일할 사람은 늘 모자라는 공급자 위주 시장이다. 이 때문에 비즈니스의 핵심은 50대 이하 여성 노동자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서비스 이용 조건에 ‘무릎 꿇는 손걸레질, 손빨래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명시하고, 분쟁이 생기면 회사가 적극 개입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달리 말하면, 이 시장을 이미 떠난 고령 노동자들은 오랜 세월 어떤 보호도 없이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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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일하는 이의 ‘마음’이 죽을 때 “저는 그냥 월급 받기 위해 취직하려는 겁니다.” 채용 면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조직의 설립 목적과 사업 목표를 아십니까”라 물었을 때 “제가 그것까지 알 필요 있습니까?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면? 또는 “조직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직 발전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냥 제가 편한 쪽으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면 어떨까?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채용 면접만 벗어나면 저런 사고방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인들에게 “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일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돈 받으려고 하는 거지”라는 답이 너무 쉽게 나온다. 일하면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겁니까”라며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직장인이라면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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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멋쟁해병’식 인맥 활용 문제 “대학도 안 가면 저 같은 사람한테 다른 자원이 뭐가 있어요?” 몇해 전 청소년 대상 진로 캠프에서 만난 고등학생이 내게 한 질문이다. 강의 중 내가 “학벌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라”고 한 말을 짚으면서 “부모님도 평범하고 특출난 재능도 없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학벌 말곤 다른 기댈 게 없지 않으냐?”고 물었다. 지금도 교복 차림과 그 당당한 태도가 떠오를 만큼 인상 깊은 기억이다. 그 질문은 이후 여러 맥락에서 종종 떠오르곤 했다. 최근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과 관련된 ‘멋쟁해병’이라는 인맥 그룹 이슈를 접했을 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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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전원일기와 국가비상사태 1991년 방송된 <전원일기>(535화) 한 장면이다. 양촌리 대표 노총각인 명석을 어떻게든 장가보내려는 그 어머니에게 중매쟁이가 조언한다. “부엌을 신식으로 고쳐야지, 이래가지곤 색시가 안 와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명석과 동네 남자들은 “개 발에 편자”라며 못마땅해하고, 여자들이 모인 자리에선 “구식 부엌에서 밥하면 설익는다니? 우리는 수십년간 밥만 잘해먹고 살았다”는 핀잔이 나온다. 그러나 아궁이 부엌을 싱크대로 바꿨는데도 명석의 맞선은 파토난다. “시골로는 절대 시집보낼 수 없다”는 가족 반대로 상대 여성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명석은 집에 돌아가 싱크대에서 국을 끓이는 어머니를 보며 괜한 돈만 들였다고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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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좋은 사장님은 거저 되겠나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내 친구 김민아 노무사는 “단 한 번도 사측을 대리한 적 없는”, 즉 평생 노동자 편에서 일하고 싸운 사람으로 부고 기사에 기록되었다. 한 줄로 묘사하라면 나도 이 표현을 떠올렸겠으나, 실상 그가 세상을 본 시각은 더 넓고 깊었다고 부연하고 싶다. 일례로 그는 신생 스타트업 대표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한 후 무척 흐뭇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교육이 많아져야 해. ‘좋은 사장님’이 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니까!” 그는 노동자를 위해서 숱하게 싸웠지만, 모든 자본가와 사장들이 악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궁극적으로 노동자와 사장 모두 자기 일을 사랑하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 일터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일터는 그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생 씩씩했던 민아는 병세가 심해지던 즈음 상담이 힘들다고 했다.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현실이 그를 더 지치게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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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의사라는 직업과 ‘더티 워크’ 민희진 어도어 대표 기자회견으로 전국이 문화충격에 빠져 있을 때, 내게 그 못지않은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민 대표를 지칭해 “저런 사람이 돈 버는 것은 괜찮고 의사가 돈 버는 것엔 알러지(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느냐”는 맥락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그 며칠 전에는 서울대병원의 담당 교수 전원이 사직해서 국내에 하나뿐인 소아 투석실이 문을 닫게 됐다는 충격적 소식이 들렸다. 이 중 한 명의 인터뷰를 봤는데 아무리 마음을 열고 읽어보려 해도 의료현장을 떠나려는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결정이 일방적이었고 이후 조정 노력도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다른 개선 조치는 일체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타협안 제시도 없이 의료현장을 이렇게까지 붕괴시키는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