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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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무명이 신분인 사회 근래 개인적으로 무명 가수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3>를 즐겨 본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음반을 낸 경험 있는 무명 가수들이 참여하는 경연이다 보니 참가자들의 실력은 담보되어 있다. 거기에 참가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 노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끔 그들의 음악보다 나의 귀를 더 사로잡은 것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수 임재범이 내뱉는 “에휴…” 하는 낮은 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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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진상의 역설 비교적 오래된 이야기지만, 청어는 한때 우리네 겨울 밥상을 풍성하게 만든 대표 생선이었다. 오죽 흔했으면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 정도였을까 싶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제는 꽁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살에 기름기가 올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보니, 겨울이 되면 조선시대 왕의 밥상에도 생청어가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 시기 동해와 남해 일부를 관할했던 경상감사 진상품 가운데 하나가 청어였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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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잡고 싶은 정치인 되기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이후, 정국은 총선을 향한 빠른 레이스가 시작된 모양새다.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와 난무하는 정치공학적 담론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보면, 총선을 향한 여당과 야당의 고민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오가는 담론들 속에 정작 정치의 본래 목적과 그것이 지향해야 할 원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논의할 필요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새겨볼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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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장시경 모반사건 1800년 음력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영남을 좌절에 빠뜨렸다. 1792년 윤4월 영남은 만명 이상이 연명한 사도세자 신원 상소를 올렸고, 그 이후 6년여 만에 영남은 중앙 정계에서 일정 정도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고 있었다. 근 100여년 만에 영남을 향한 왕의 따뜻한 시선을 체감하고 있었지만, 다시 노론 벽파가 자기 정권을 강화하는 과정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시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슬픔을 빌미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던 음력 8월24일, 영남을 절망에 빠뜨린 소문이 퍼졌다. 인동부(지금의 경북 선산군 인동면 일대)에서 모반이 일어났다는 소문이었다. 주모자는 장시경으로, 17세기 영남 유림을 대표했던 장현광의 후손이었다. 소식에 따르면 장시경 형제는 국상을 빌미로 50여명의 병력을 일으켜 수령을 결박한 후, 병마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인동부 수령이 응하지 않자, 그를 관문 밖에 묶어 두고 상주 진영으로 진군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젊은 선비 류의목은 안 그래도 영남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데, 이 사태로 인해 영남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강한 절망의 표현이었다.(류의목, <하와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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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의 횡포 대하는 그들의 방법 종3품 도호부사인 갑산(현 함경남도 갑산군 일대)부사도 상급기관 횡포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1789년 음력 7월23일 갑산부에서 가까운 진동진 만호 노상추가 갑산부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면, 얼마나 심경을 털어놓을 데가 없으면 노상추에게까지 이러한 편지를 보냈을까 싶다. 갑산부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함경도 병영 영장(營將)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갑산부에서 올리는 공물도 병영에서 관할했는데, 이번 갑산부 공물 진상에 문제가 있었던 듯했다. 일과를 마친 후 노상추가 서둘러 갑산부사를 찾은 이유였다.(출전 <노상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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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40년 만의 광복 1945년 8월15일 광복은 형식적으로 35년 전인 1910년 8월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무효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일병합조약이 가능했던 이유는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은 문장만 보면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대한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갖는다는 조약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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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605년 안동 대홍수 1605년 음력 7월, 예안 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은 열흘 가까이 내린 비로 마을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안동부 관아를 비롯하여 안동 상징인 영호루와 여강서원마저 떠내려갔으니, 약 20킬로미터 정도 상류에 위치한 예안 지역이야 말해 무엇할까 싶다. 당시 이 홍수는 낙동강을 따라 안동과 선산, 경주까지 물바다를 만들었고, <실록> 기록에 따르면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부지기수”였다. 안동 풍천면 구담 지역 강가에 ‘밀려 나온’ 시신만 40구가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출전: 김령, <계암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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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안 하느니만 못한 일 1778년 음력 4월29일, 선산에 사는 노상추는 화가 많이 났다. 문동마을 큰집 종 점발이 헐레벌떡 달려와 “도둑이 들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큰집 옷들을 모두 훔쳐 갔다고 하니, 적지 않은 피해였다. 근 한 달 동안 조카며느리 초상으로 정신없었던 노상추는 도둑의 행태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상복을 입기 위해 벗어 두었던 옷까지 모두 도둑맞았으니 말이다.(출전: 노상추, <노상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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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경주인의 역습 주위를 둘러보면, 돈 버는 데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은 꼭 있다. 안정된 직업에 주식 대박, 그리고 부동산 투자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한 성공 신화 중 하나다. 1804년 한양에 살았던 홍응경도 그랬다. 그는 국가 제사를 관장했던 봉상시 소속 숙수(조리사)였다. 요즘과 같은 ‘셰프’의 인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평민들과 비교할 때 매우 안정된 자리였다. 게다가 그는 지역에서 올라온 관원들에게 집을 세주어 꽤 짭짤한 수입도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근래에 충청도 수영(수군 군영)의 경주인(京主人) 자리까지 꿰찼다. 수군절도사 윤이동이 800냥 주고 산 경주인 자리를 그가 매년 쌀 20섬을 내는 조건으로 받아온 것이다. 정말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출전: 노상추, <노상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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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소송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 1739년 음력 3월2일 오후, 젊은 최흥원은 문중의 소송 문제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관아로 옮겼다. 소송 자체를 꺼리는 문화 탓에 다툼의 이유와 내용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없지만, 칠곡 수령과 대화한 내용을 보면 문중 내 재산 분할 문제가 조상의 무함(誣陷)으로까지 비화된 듯했다. 쉽게 풀기 힘든 소송이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칠곡 수령은 판결보다 문중 내 합의를 주문했고, 이를 통해 소송은 비교적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관아에서는 이를 증명하는 관문을 작성했고, 최흥원은 선조 이름이 담긴 문서가 관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 급한 걸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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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896년, 예천회맹(會盟) 127년 전인 1896년 음력 2월9일. 경상도의 작은 고을 예천(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이 의병들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7일부터 호좌의진(湖左義陣) 대표 서상렬과 소속 의병 150여명이 선두에서 행진했고, 그 뒤를 안동의(병)진·순흥의진·봉화의진이 함께했다. 8일과 9일에는 예안의진과 영주의진, 풍기의진이 속속 도착하면서, 500명이 넘는 지역 의병들이 예천에 모였다. 예천회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김정섭, <일록>/박한광 외, <저상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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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소와 소고기, 그 다름에 대해 1745년 음력 2월8일 저녁 즈음, 계집종 초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최흥원을 찾았다. (출전: 최흥원, <역중일기 曆中日記>) 최흥원을 보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듯했다. 이날 아침 초점은 최흥원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녀 남편의 집 짓는 현장에서 무거운 목재를 옮기기 위해 사람과 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평소 초점의 성실함과 그녀 남편의 착한 성정을 알고 있던 최흥원은 흔쾌히 남자 종 몇 명과 소를 내주었다. 그런데 일을 마친 소를 돌려주려 가던 길에, 소가 발을 헛디뎠다. 금방 회복될 같았던 소는 결국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허리를 다친 듯했다. 소 한 마리의 가격도 큰 문제였지만, 소 한 마리가 아쉬운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초점은 송구스러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