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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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균근과 선물 올봄 꽃시장에서 라일락 모종을 샀다. 봉오리가 많이 달려서 얼마 뒤 연보랏빛 꽃이 활짝 피면 작업실 마당이 향기로 가득할 것 같았다. 딸기의 기는줄기와 잡초를 싹 뽑아 말끔한 맨땅을 만든 다음 라일락 뿌리를 감싼 흙 알갱이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심었다. 2~3일마다 물을 듬뿍 주고 김도 매주었다. 그런데 차츰 잎이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잎말이벌레가 든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원효대사의 지팡이처럼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바랐건만 이내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결국 체념하고 줄기를 잡아당겼는데 마치 흙에 박은 못처럼 쑥 딸려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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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복원 28일 전 출간된 윤고은의 소설 <불타는 작품>, 21일 전 개봉한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 1000년 전 간행된 갈레노스의 의서 <의학적 경험에 대하여>에는 공통점이 있다. <불타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 팜스프링스에 있는 허구의 로버트재단 미술관이다. 주인공인 미술가 안이지는 대부분의 대화를 영어로 주고받는다. 띠지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내 출간 전 영미권 수출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한편 <블루 자이언트>의 원작은 같은 제목의 단행본 만화다. 애니메이션은 재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가 음악감독을 맡아 ‘퍼스트 노트’ ‘위 윌’ 등의 삽입곡을 작곡했다. <의학적 경험에 대하여>는 2세기에 갈레노스가 집필한 그리스어 원본이 소실되어 아랍어로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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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슬픔의 총량 남쪽 하늘 천칭자리의 글리제 581 항성을 공전하는 글리제 581d 행성에서 피지배 종족인 글리제 581d-Ⅱ족이 봉기를 일으켜 글리제 581d-I족 아녀자를 인질로 잡고 대치 중이다. 한편 직녀성이 있는 거문고자리에서는 케플러 438 항성을 공전하는 케플러 438b 행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케플러 438b-IV족 수천 명이 사망하고 지금도 수만 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에서 수많은 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고 그 뉴스가 보이저 34호 탐사선을 통해 인류에게 실시간으로 보도된다. ‘공감의 원’은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자신만 아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던 우리는 개인의 일생과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가족, 부족,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공감의 원을 넓혀왔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아닌 동물의 고통까지도 외면하지 못하여 윤리적 채식, 공장식 축산 반대, 생태계 보전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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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번역가의 초능력 경향신문 9월2일자 ‘시선’ 코너에 ‘사실 우리는 초능력자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잎을 우수수 떨구며 죽어버린 식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보면서 내가 한때 가졌던 초능력이 떠올랐다. 이걸 독심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투시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대방이 아무리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글을 쓰더라도 그의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어휘 속에서 엉겁결에 불거져 나오는 프로이트적 말실수를 포착하거나 격조사 자리에 보조사를 쓰는 등의 사소한 차이를 통해 숨은 의도를 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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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마지막 매미 매미 소리가 부쩍 잦아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서 규정한 주거지역 야간 소음 기준 60데시벨을 가뿐히 뛰어넘는 굉음으로 수백 마리가 사방에서 울어대 잠을 설쳤는데, 오늘 밤은 마지막 한 마리가 잔울음을 맥없이 내뱉다가 그마저도 개구리와 귀뚜라미 소리에 묻혀 들릴락 말락 한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드디어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울음을 멈춘 나머지 수매미들이 대부분 암매미를 만나 짝짓기에 성공했을 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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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현수막 술래잡기 오후 7시40분 롯데백화점 앞에서 세 명이 만났다. 은정씨는 차와 사다리를 가져왔고, 준범씨는 큰 키와 머릿속 지도를 가져왔다. 나는 눈과 귀와 팔다리를 가져왔다. 보고 듣고 일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이날 저녁 우리가 할 일은 고양녹색당이 설치한 현수막을 수거하는 것이다. 구청에서 먼저 철거하기 전에. 사건의 발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황동에 있는 9홀짜리 골프장을 18홀로 증설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는데, 녹지를 훼손하고 인근 농경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불과 300m 옆에 있는 정수장을 맹독성 농약으로 오염시킬 우려가 있어 주민과 환경단체 등이 지금껏 반대 운동을 벌여왔다. 2018년 ‘조건부 동의’로 환경영향평가가 승인됐는데, 올해 7월이면 5년의 유효 기간이 끝나 골프장 측에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6월 한 달간 온 힘을 다해 골프장 사업 승인을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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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퇴사 인사 요즘 ‘받은편지함’을 열기가 두렵다. 집필 계약을 맺고 번역서 작업도 함께한 편집자가 올 2월 e메일로 퇴사를 알려왔고, 최근작을 담당한 편집자도 며칠 전 퇴사 e메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퇴사 인사는 늘 갑작스러워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질긴 줄 알았던 끈이 툭 끊어져버린 느낌이랄까. 편집자와 번역자는 기본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다. 편집자와 번역자 사이에 정이 싹틀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운 정’일 것이다. 편집자는 나를 지금 고생시키는 장본인이요, 나의 잘못을 캐내려고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보낸 교정지에는 나의 모든 치부를 까발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잔뜩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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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꿰지 못한 구슬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내 작업실에 있는 야마하 전자 오르간에 빗댄 속담이 틀림없다. 중고 장터에 헐값에 올라온 물건을 잽싸게 낚아챈 것은 박수받을 만한 묘기였다. 문제는 오르간을 연주하려면 양손 양발을 따로따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처럼 왼손과 오른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것 외에도 왼발로는 베이스 건반을, 오른발로는 볼륨 페달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지를 따로따로 놀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면 우리의 뇌는 좌우 양반구가 아니라 상하좌우 사분구로 나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사연으로 나의 전자 오르간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해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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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버킷 리스트 지우기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케니언 대학교 졸업식 축사는 우화로 시작된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이것은 물이다>, 나무생각, 2012) 누군가 내게 “실패해서 속상하지 않아?”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대체 실패란 게 뭐야?” 내가 실패를 모르는 것은 실패한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내 삶의 디폴트이기 때문이다. 내가 야심차게 시작한 모든 일은 실패로 끝났다. 한때는 내게도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2년마다 한 권씩(출판사에서 의뢰받은 게 아니라) 번역하고 싶은 책을 번역해 직접 출간하기’ ‘번역하는 데 필요한 외국어 학습하기’ ‘번역가들끼리 모여 번역 학술대회 개최하기’ ‘호수공원에서 내 번역서 낭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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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시간을 팔고 싶은 사람들 코로나 대유행이 잦아들어서 그런지 올들어 강연이니 북토크니 행사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담쌓고 지내는 사람을 바깥으로 불러내주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수화기를 내려놓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1시간 강연에 최저시급의 열 배면 감지덕지할 일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 준비 없이 책 한 권 달랑 들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일주일 전부터 내용을 분석하고 관련 자료를 검색하고 글이 입에 착 달라붙도록 읽고 또 읽으면서 시간을 재야 한다. 번역가 설움은 강사가 안다더니 문지혁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하루였지만 수업 준비는 일주일이 걸렸다.”(<중급 한국어>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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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귀벌레 치료 가끔 노래의 한 대목이 귓전에 쟁쟁거리며 떠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대목을 귀벌레(earworm)라고 하고 귀벌레를 넣어둔 노래를 (한국식 영어로) 후크송이라고 하더군요. 번역하다 보면 노래 아닌 귀벌레가 맴돌기도 하는데, 지금 저의 귀벌레는 ‘대(對)’라는 낱말입니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귀를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아니면 귀벌레를 세상에 퍼뜨리든지요. 그러면 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해줄지도 모르니까요. 방법이 없을까요, 선생님? 그나저나 3시즌 연속 10연패의 대기록을 작성한 한화, 올해는 기대해도 괜찮은 걸까? “한화는 22일 스프링캠프지인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솔트리버필드 앳 토킹스틱에서 열린 네덜란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과의 연습경기를 15-4로 이겼다.”(경향신문 2월23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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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아묵과 자포자기 제가 아묵이 된 것은 1856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름판에서 전 재산을 탕진하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저뿐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릴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길거리로 뛰쳐나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열일곱 명을 해치고 저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어 숙어에 ‘run amok’이라는 말이 있다. ‘길길이 날뛰다’라는 뜻이다. ‘amok’은 말레이어 ‘아묵’에서 왔다. 아묵은 정신착란과 비슷한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마구잡이로 인명을 살상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막막하거나 자신의 노름빚 때문에 아내나 자식이 노예가 되게 생겼거나 빼앗긴 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 사람은 아묵이 된다. 말레이 제도의 전통 단검 크리스를 움켜쥐고 길거리로 나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베고 찌르면 겁에 질린 군중은 “아묵! 아묵!” 하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