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완선
SF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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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빨갱이’ ‘짱깨’ ‘페미’ 연상 퀴즈 연상 퀴즈에서 정답을 빨리 맞히려면 당연히 출제자와 생각이 비슷해야 유리하다. 사과는 빨갛지. 바나나는 노랗고, 이를 다룬 노래 가사에서 다음에 오는 것은 기차다. ‘길다’라는 단어에 대해 연상해야 하는 정답은 ‘기차’로 좁혀진다. 연상 작용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나 합리적 근거로 움직이지 않는다. 머릿속의 단어 지도를 문제와 얼마나 유사하게 형성하고 있는지 혹은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용례를 얼마나 공유하는지가 중요하다. ‘중국’이라는 단어에 바로 ‘짱깨’라는 말을 떠올린다든가, ‘여성’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페미’라고 반응한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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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굳이 깃발을 기록하는 이유 ‘깃발들’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12·3 비상계엄 이후 집회에 등장했던 가지각색의 깃발을 구경할 수 있다. 현재 약 600개의 깃발이 모였다. 실물의 깃발이 군집했을 때와 같은 위용은 없더라도, 바람에 펄럭거리도록 연출된 이미지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깃발의 내용은 전부 잡다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비공식적이다. ‘전국’ ‘연합’ ‘위원회’라는 이름에 맞는 실체를 갖춘 곳은 하나도 없다. 누가 일부러 기록하고 보존하지 않는 한 금방 사라지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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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10만년 후를 본 백남준과 SF 김연아 선수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을 배웠듯 백남준이라는 이름 덕분에 비디오 아트를 알았다. 텔레비전 1003개를 탑처럼 쌓은 ‘다다익선’의 작가, 공연 중에 관객석의 존 케이지에게 가서 넥타이를 잘라버린 괴짜,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교과서에 나오는 예술가. 그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나는 오히려 백남준의 작업이 얼마나 비범하고 흥미로운지 실감하지 못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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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고요? 최근 본 기묘한 표기는 “펑 퍼짐함”이었다. ‘펑’과 ‘퍼짐’ 사이에 띄어쓰기가 있으므로 둘은 별개의 단어다. 대강 조합하면 ‘펑 소리가 나며 퍼지는 일’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맥락상 그럴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펑퍼짐한 정도’라는 의미로 쓰인 표현이었다. 현대사회, 특히 온라인 공간에 파도처럼 몰아치는 무수한 텍스트 대부분은 한글 맞춤법 규정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읽는 쪽에서도 맞춤법보다 맥락과 의도를 중시한다. 그러니 표기된 대로 읽으려 하면 오히려 말뜻을 놓친다. 다시 말해, 정확하게 읽으면 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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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비상계엄이 선포된 12월3일 밤에 나는 웹소설에 관해 쓰고 있었다. 급히 끝내야 하는 일이라 잠을 포기했는데, 덕분에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면서 ‘깨어 있는’ 시민이 되었다.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소식이 많아서 뉴스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될수록 의구심이 치솟았다. ‘아니… 이런 시국에 내가 지금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래도 되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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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저게 날 속였어 나는 간혹 스스로 서프라이즈를 준비한다. 덕분에 영화 <그래비티>(2013)를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보았다. 나는 오로지 두 가지만 알고 있었다. 등장인물이 우주에서 조난당한다. 배우 조지 클루니가 주연을 맡았다. 작중 인물들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왕복선에 탑승한다. 신참인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블럭)는 망원경 수리를 위해 우주 유영을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인공위성 파편 더미가 그녀를 습격한다. 팀의 지휘를 맡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그녀를 구조해 귀환한다. 하지만 우주왕복선은 이미 파괴되었고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90분 안에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착해야 한다. 90분 후에는 파편 더미가 지구를 일주하여 주변을 뒤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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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탐조로 한 걸음 내딛는 일 지난여름엔 CCTV 영상을 잔뜩 구경했다. 국가교통정보센터에서 제공하는 보령해저터널 근방 CCTV 화면에 새호리기가 등장한 덕분이었다. 어쩌다 그쪽에 둥지를 틀었는지, 누구든 접속하기만 하면 새호리기가 파닥거리고 갸웃거리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새호리기는 이름대로 눈을 홀릴 정도로 현란하게 비행하고, 성체는 30㎝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 다소곳이 앉은 새는 그저 주먹만 하고 복실복실한 생물로 보였다. 매과에 속하는 조류답게 색상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몸이 날렵한 곡선을 그리는 것이 몹시 멋지고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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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엿듣는 알고리즘아, 들어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인스타그램의 추천 알고리즘이 화제에 올랐다. 그다지 관심도 없는 게시글이 자꾸 나오더라는 거였다. 한 명은 딱히 원한 바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불륜 문화를 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쩌다 불륜 사연을 읽었더니 슬금슬금 비슷한 게시글이 나타났다고 들었다. 한두 개 보고 나니 추천 피드가 온통 뒤덮였다고. 알고리즘은 사소한 행동마다 황급히 반응한다. 극성 보호자처럼 호들갑이 심하다. 심지어 앱을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 정보를 수집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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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사주팔자의 쓸모 간혹 “내가 점을 보러 갔는데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돈을 내서라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 뉴스에서 보는 무속 이야기는 불쾌하지만 개개인의 소소한 일화는 재미있다. 사주팔자 풀이가 현대화되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전에는 여자에게 관직에 진출할 사주가 있으면 결혼운으로 봤지만 지금은 남자와 똑같이 직업운으로 본다든가, 연애운을 볼 때 성적지향을 먼저 확인하더라는 경험담이라든가, 앱을 사용하면 간편하게 사주팔자를 확인할 수 있다든가. 다들 한때 혈액형에서 성격을 읽었듯이, 지금 MBTI 체계를 유형별로 파악하듯이, 사주풀이도 의외로 흔한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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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성큼걸이와 스트라이더 논쟁 오랜만에 ‘성큼걸이’ 이야기를 했다. 성큼걸이는 J R 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 ‘아라곤’(혹은 ‘아라고른’)의 별명이다. 작중에서 아라곤은 본래 곤도르 왕가의 후손이지만 혈통을 숨긴 채 오랫동안 떠돌이로 생활한다. 순찰자로 지내는 시기에는 큰 키로 성큼성큼 걷는다며 ‘스트라이더(strider)’라고 불린다. 그리고 스트라이더가 성큼걸이라는 한국적인 명칭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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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북토크의 견물생심 북토크와 출판기념회는 어감이 다르다. 전자가 아기자기한 만남의 자리라면 후자는 정치인이나 나이 지긋한 사람의 부대행사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둘 사이의 간격이 훨씬 가까웠던 모양이다. 본래 북토크는 출간을 축하할 겸 작가를 예우하는 행사였다고 들었다. 지금의 북토크는 출판사의 마케팅과 독자의 팬심이 조응하는 자리다. 작가는 ‘신간이 나왔습니다. 우리 애를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맡는다. 아이돌이 신곡을 발매하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유사하다. 양쪽 다 얼굴을 내밀고 존재를 알리고 호감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피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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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버섯과 원고료 막막(makmak)을 뒤집으면 캄캄(kamkam)이라는 말장난을 보았다. 관점을 바꿔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니, 어쩜 그리도 막막하고 캄캄한지…. 작가로 지내면서 나도 종종 그런 감정에 빠졌다. 마감일이 코앞인데 한 글자도 쓰지 못했을 때. 당장 닥쳐오는 일정에 허덕이느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프리랜서로 몇년 혹은 몇십년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질 때. 통계청의 예술인 실태조사를 참고하면 작가 중에서 예술활동으로 최저임금 이상의 소득을 얻는 사람은 전체의 10% 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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