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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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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나의 직업은 텔레마케터였다 지난 시절 나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수배받던 시절 어느 보수언론 기자가 나에 대한 심층 기사에서 시인의 탈을 쓰고 평택대추리 미군기지 이전확장 반대,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용산 철거민 진상규명 투쟁 등 현장만 쫓아다니는 전문시위꾼이라고 한 게 오히려 나의 정체성에 어울렸다. 시인을 가장한 전문시위꾼에 이은 나의 직업은 오히려 텔레마케터에 가까웠다. 무제한 요금제가 없던 시절에는 전화통화료만 20만원 넘게 나와 절망하던 때도 많았다. 하루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뇌다 보면 입이 돌아가려 하기도 했다. 세 번째 직업이라면 외판원이 맞다. 시도 때도 없이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티켓과 물품을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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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2200만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노란봉투법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자주적으로 만들어 사용주에게 단체교섭을 통해 ‘근로조건의 향상’을 요구하는 게, 고용노동부 통계로 2200만명에 이르는 국민들의 헌법적 권리라는 내용이다. 만약 이러한 요구를 사용주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 노동력 제공을 일시적으로 거부하고 일손을 놓고 쉬는 파업권을 가진다는 내용이다. 누가 ‘보장한다’가 아니라 ‘가진다’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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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두둑’ 선배 소집이라고 했다. 안 갈 수가 없었다. 2012년 5월 광주 5·18기념재단 2층 대강당 옆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얘기를 들었다. 항상 겸손하며 노련한 오두둑 선배는 늘 물음형이었다. 대강당 안에서는 ‘평화바람’의 명목상 단장인 문정현 신부께서 그해 5·18광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금 5000만원 모두 내놓자고 했으니 길 떠나는 종잣돈은 되지 않겠어요?” 식이 끝나고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나오신 신부님은 오두둑과 평화바람 사람들이 결정했으면 된 거지 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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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우린 당신들이 필요하지 않다 800여명이 그 산골까지 왔다고요? 예. 저도 기적 같은 일에 놀랐습니다. 개인 차량만 300여대가 와서 산골마을 2차선 도로에 4㎞가량 늘어서 있었습니다. 대구지역에서 사회운동하는 벗들이 승합차 네 대를 가지고 와서 종일 셔틀 운행해주었습니다. 지난 9월2일.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 후원 연대의 날이었습니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은 전북 남원의 귀정사 계곡가에 터를 잡고 그간 국가폭력과 자본폭력, 사회폭력의 피해자들과 그에 맞서 연대하고 저항하다 지치고 아픈 이들을 위한 무료연대쉼터로 조용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매해 잠시 쉬는 것조차 죄스러워하는 100여분의 피해자, 활동가들이 내 집처럼 편히 쉬었다 갔습니다. 비판하기는 쉬운데 지키기는 힘든 게 동지라는 걸 뒤늦게 배운 이들이 함께 만들고 지켜온 곳. 누군가 힘들거나 아파 보일 때 쉼을 통해 자신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나와 우리를 진정으로 지키는 일이라는 오랜 반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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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감옥만 여덟 번째인 최인기를 기억하며 잊을 수 없는 삶의 날들이 있다. 2007년 10월11일 밤도 그렇다. 그 밤 고양시에서 한 노점상이 도심 나무에 목을 걸었다는 짧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아내와 함께 주엽역 근처 문화초교 앞에서 12년 동안 붕어빵과 순대와 떡볶이와 달고나 등을 팔던 이근재님이었다. 오후 10시쯤 좌판 리어카를 끌고 집에 돌아갈 때면 호주머니에 6만~7만원이 남았다고 했다. 전날인 2007년 10월10일 오후 2시. 고양시내 500여 노점상을 거리에서조차 내몰기 위해 31억원의 거리정화 예산을 배정한 고양시청이 300여명의 용역깡패를 트럭에 싣고 나타났다. 나와 있던 경찰은 저항하면 공무수행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했다. 노점 좌판이 부서지고 아내가 차디찬 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울부짖는 것을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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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 그건 안 되는 ‘법’ 2023년 8월17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남았던 한 건의 재판 선고가 있는 날. 15년여 동안 경찰서와 검찰, 법원에 끌려가거나 불려가는 게 일상이었나 보다. 어떤 날은 재판 있는 날을 까먹기도 했다. 으악, 하며 뛰쳐나가 택시, 택시를 부르던 때가 많았다. 정신적으로 피로하니 자꾸 외면하고 싶었던 날들. 그러나 계속해서 참여해야 할 현장은 끊이지 않았고, 적당히 참여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내겐 매번 추가 소환장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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