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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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일본군 ‘위안부’ 활동가 김동희씨 22세 때 우연히 참가한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다. 29세에 활동가가 돼, 매일 활동가로 살다 45세에 스톱. 그즈음 동고동락했던 활동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공황장애가 왔다. 할머니들 곁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았던 시간이 부정당하고 의심받고 있었다. 활동가가 아닌 나는 상상조차 한 적 없던 내 청춘을 통째로 상실한 듯한 슬픔을 느꼈다. 불면증약과 수면제, 항우울제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던 날들을 살아내고 49세에 다시 활동가로 돌아온 내게 누군가 물었다. “(활동가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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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밥하는 수녀 그녀를 매일 묵상하게 하는 것은 ‘밥’. 그녀를 매일 실손하게(버리고 잃어버리게) 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두 발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최고의 장소는 ‘부엌’. 월화수목금토일, 아침점심저녁. 그녀는 부엌데기가 돼 종일 부엌에 깃들여 살며 밥을 한다. 밥을 하는 내내 소란스럽게 돌아가던 환풍기가 꺼지고, 고요하고 차분해진 가운데 삼백 사람이 먹을 한 끼를 내보내며 그녀는 새삼스레 감탄한다. “오늘도 기적이 탄생했네!” 밥, 국, 반찬. 한 끼가 완성돼서 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그녀는 정말 기적이 탄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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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빗자루와 남기호씨 새벽에 빗자루질을 하려 6수를 했다. 5번 떨어지고 6번 만에 붙었다. 32세 때 첫 도전을 했다. 6명 뽑는데 105명 남짓이 지원했다. 시험 과목은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배근력, 멀리뛰기.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는 둘 다 1분 62개 이상. 배근력은 180㎏을 당겨야 한다. 만점이 2.75m인 멀리뛰기는 점수제로. 8개월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헬스장에서 살며 홀로 혹독한 훈련을 했다. 체력 시험 통과.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재수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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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선택’ 그리고 정승희씨 “나 어디서 왔어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아무도, 아무도. 그녀는 세 살 이전의 ‘나를 모른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태어난 해(1993년) 말고는 내가 어느 달 어느 요일에 태어났는지. 성이 왜 정씨인지. 승희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줬는지. 산골 간이역처럼 쓸쓸하고 적막한 기억의 첫 페이지, 그녀는 춘천의 보육원에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자신에게 엄마아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그리움이라는 돌림노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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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거대한 ‘오늘’과 최성일씨 10년 전, 그는 거대한 빙벽 앞에 서 있다. 진짜 같은 가짜 빙벽의 높이는 13m 남짓. 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영화 특수미술’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20, 30대를 영화 특수미술의 매력에 빠져 살며 <광개토대왕> <실미도> <청련> <남극일기> 등등 내로라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특수미술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제작사에서 ‘빙벽’ 의뢰가 들어왔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재료와 제작 과정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보름 만에 완성한, 다들 감탄하던 빙벽의 수명은 단 이틀. 촬영을 마치자마자 그는 스스로 빙벽을 부쉈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자신이 만든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완성한 작품들이 주는 만족감이 큰 만큼 공허감도 컸다. 십수 년 수입이 불안정했던 데다 어떤 배신으로 파산을 선언해야 할 지경이 된 그는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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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이발사 박씨 아파트 5층 높이의 미루나무가 머쓱히 서 있던 신작로에 이발사 박씨가 마을에 등장한 건 1970년대 말. 다섯 살쯤 먹은 한쪽 다리를 절룩이는 사내아이와 함께였다. 버젓한 버스표지판도 없던 그곳에 그들을 내려준 버스는 알감자 같은 흙먼지를 매달고 거칠게 내달리다 소실점 속으로 사라졌다. 대전과 충북 옥천 사이에 지빠귀 둥지처럼 들어앉은 마을을 두 쪽으로 가르며 관통하던 신작로. 박씨는 신작로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집을 얻어 이발관을 냈다. 농사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마을사람들의 아들들이 도시로, 중동으로 돈을 벌러 떠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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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선희씨 오전 10시50분. 선희씨는 교실 문을 연다. 연필 냄새, 지우개 냄새, 나무책상 냄새, 책 냄새… 그녀는 어떤 고요한 의식을 치르듯 교실 안에 고여있는 냄새를 맡는다. ‘좋다!’ 그녀는 창가의 화분들에 눈길을 준다. ‘설렘’이라는 꽃말을 가진 겹카랑코에와 여러 다육이들. 그녀는 스무 개의 빈 나무책상들과도 눈맞춤 같은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마침내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낮고 작은 나무책상마다 전날 아이들이 쓰고 지우던 연필과 지우개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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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가장 큰 기적 ‘1% 바뀜’과 양지연씨 “계속 제자리요…제자리…괜찮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내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 해요, 기다려줘야 해요.” 그래서 그녀는 기다린다. 애정을 갖고 ‘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라는 믿음을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A에게 심어주며 기다린다. 기타를 치며 기다린다. 어느 순간 A가 기타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스스로 기타를 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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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아기 똥 기저귀와 황호희씨 “내 소명은 아기 똥 기저귀 갈아주기.” 아기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신의 손이 그녀는 만족스럽다. 그런데 그 손은 관절염으로 아침에 잠에서 깨면 손가락이 못처럼 뻣뻣하다. 죔죔을 20~30분 정도 하고 나야 손을 조금씩 쓸 수 있다. 죔죔, 죔죔…. 6년 전, 활동지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녀는 기도했다. ‘장애를 가진 아기를 만나게 해주세요. 장애를 가진 아기가 자라는 데 제가 도움이 되고 싶어요.” 기도대로 그녀는 장애를 가진 아기는 만났다. 그런데 다 큰 아기였다. 혼자 힘으로는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다 큰 아기를 돌보는 일이 그녀의 몸을 쓰러뜨릴 만큼 힘들어 그녀는 다시 기도했다. “제 기도를 도대체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저도 몸이 아픈 사람이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그녀는 섬유근통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어서 독한 약을 매일 다섯 차례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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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밀양의 풀 뽑는 미스 차 “‘너는 오늘 누구를 만나라’ 그렇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너는 오늘 네가 만나는 사람을 네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어라’ 그것 역시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 내가 팽나무 아래서 왜 풀을 뽑았을까? 오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풀을 뽑았던 게 아닐까? 내 집에 초대할 손님, 하룻밤 재워 보낼 생면부지의 손님을 만나려고 풀을 뽑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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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녀, 전주연씨 “내게는 무표정만 있어요.” 그녀는 무표정한 자신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녀는 자신이 무표정한 것이,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표정은 뭘까? 눈빛은 뭘까? 눈빛을 마주치며 말을 나눈다는 건 뭘까?’ 그녀는 선천성 전맹으로 빛조차 지각하지 못한다. 토요일 오후, 식탁에 혼자 고요히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나직이 중얼거린다. “나는 귀한 존재야.” 파기름에 계란과 밥알을 볶을 때 풍긴 냄새가 공기 중에 퍼져 있다. 그녀는 점심으로 계란볶음밥을 요리해 아이들과 먹었다. 고1인 딸과 중1인 아들은 각자 방에 들어가 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머물다 불쑥 방문을 열고 나와 그녀에게 재잘재잘 말을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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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오늘도 함께 기도하는’ 강영희·강진규 부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야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영희씨(청산 스님, 1946년생)는 아침 5시면, 그리고 저녁 5시면 어김없이 부처님 앞에 앉아 기도한다. 아침에는 일본말로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고, 저녁에는 한국말로 천수경과 화엄경을 외우며 기도한다. 나이 탓에 부쩍 자주 깜박하는 그가 결코 잊지 않는 건 기도. 기도란 “거기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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