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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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의 말의 힘 인구절벽을 보는 또 다른 시선에 대하여 역대 한국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인구정책일 것이다. 그 목표치는 이미 초과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구가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요컨대, 인구문제는 로마 역사의 초기부터 정치의 핵심적인 고민이었다. 리비우스의 말이다. “인구수를 늘릴 목적으로 로물루스는 국가를 건국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전통적인 수법을 썼다. (…) 지금은 성벽으로 둘러싸였지만, 구원을 찾아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해 성스러운 숲 사이에 피난소를 열었다. 이곳으로 인근의 지역에서 자유인과 노예, 온갖 무리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찾아 도망쳐왔다. 이는 로물루스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우선적으로 행한 일이었다.”(<로마건국사> 제1권 8~9장) -
안재원의 말의 힘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을 하나 소개하겠다. 아풀레이우스(서기 2세기)가 쓴 <황금 당나귀>라는 소설이다. 루키우스라는 젊은이가 마법을 좋아하다가 실수로 당나귀로 변신하여 고생하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느 술집에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음담패설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다. 서양 고대의 로마식 ‘야동물의 끝판왕’이다. 온갖 애정 행각이 나열되어 있음에도 작품의 밑바탕에는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숨은 생각이 깔려 있다. -
안재원의 말의 힘 낭만이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낭만이 떠난 지도 오래되었다. 격정도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비가 와도,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을 찾지 않는다. 낭만은 어디로 떠났을까? 여러 해명이 가능하다. ‘먹고사니즘’ 탓일 수도 있고 ‘귀차니즘’ 탓일 수도 있다. 혹자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견디며 하루를 버티고 삶을 이어가고, 혹자는 ‘소확행’의 즐거움으로 하루를 꾸미며 인생을 장식한다. 소위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이게 낭만이 사라진 시대의 풍경일 것이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허전한 시대 풍조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말이다. -
안재원의 말의 힘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작은 전시회(20일~8월16일 서울대 중앙도서관)를 하나 소개한다. 전시회의 제목은 “ut poema pictura, ut pictura poema”이다. “그림은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그림처럼”으로 번역된다. “그림 그리는 것처럼 이야기를(ut poiesis pictura, <시학> 362행)” 지으라는 호라티우스(기원전 65~8년)의 말을 약간 바꾼 것이다. 전시회를 준비한 학생들은 “그림에서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에서는 그림을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poiesis’를 ‘poema’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 바꿈이 더 재미있다. 이 말의 원래 주인은 호라티우스가 아니고 시모니데스(기원전 556~468년)이다. 그의 말이다. -
안재원의 말의 힘 푸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다. 자연이 고마운 나날이다. 이렇게 고마움을 제공하는 신록의 뒷면에는 이런 슬픈 이야기도 숨어 있다고 한다. 로마의 이야기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아폴로는 다프네를 마주치게 된다. 황금 화살을 맞은 아폴로는 사랑의 화염으로 불타오른다. 납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피해 달아난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쪽에서는 좋은데, 저쪽에서 싫어하는 상황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수록, 덤벼드는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고 도망치는 사람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다. 아폴로는 손가락, 어깨, 하얀 팔에 감탄하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상상하면서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다프네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도망쳤다. 다프네를 쫓는 아폴로의 말이다. -
안재원의 말의 힘 적은 소탕 대상, 경쟁자는 소통 상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대해 말들이 들려온다. 안타까운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짚고 가자.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물론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전쟁에 가까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의 경쟁자가 전쟁의 적군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직장 ‘동료’이고, 고향의 ‘벗’이며, 학교 ‘동창’이고, 생각의 ‘동지’이자 이익의 ‘동반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의 경쟁자도 공동체의 재난과 위기에는 서로 손을 맞잡고 힘을 합해야 하는 공동체의 친구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선거는 전쟁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적은 소탕의 대상이지만, 경쟁자는 소통의 상대이다. -
안재원의 말의 힘 막말보다는 웃음이 더 효과적이다 막말은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을 공격함에 나름 효과가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자기편의 결집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다급한 처지를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그리 권장할 만한 언행은 아니다. 또한 막말을 하는 사람을 보기 흉하게 만들기에 전술적으로도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은 아니다. 막말보다는 웃음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안재원의 말의 힘 때론 양방향으로 말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말 한마디로 정치생명이 좌우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기이다. 아무튼 말의 힘이 가진 양면성을 현실적으로 뼈저리게 체감한 사람이 키케로였다. 오죽하면 “말의 저울(pondus verbi)”을 혀에 달고, “양방향으로 말하는(in utramque partem dicere)” 연습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사실 이 능력을 연마하는 것이 연설가의 고유한 소임이라 하겠네. 하지만 이를 연마하는 일은 이미 철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네. (…)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지, 그들은 양방향으로 말을 아주 풍부하게 하곤 했다네.”(키케로 <연설가에 대하여> 제1권 263절) -
안재원의 말의 힘 잠시 생각을 멈추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말이 난무하는 시기이다. 한편으로 특정 경험, 특정 정보, 특정 이념, 특정 세력, 특정 정파, 특정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행태인 ‘반지성주의’가 사람들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놓고, 다른 한편으로 소위 진영론과 음모론이 결합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강요하는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는 헬레니즘 철학자들이 권했던 ‘판단 중지(epoche)’도 도움이 된다. 가끔은 판단을 멈추는 것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판단 중지’란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회의주의 철학의 핵심적인 수행 방식이었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요구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우 높은 수준의 계산과 통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 철학자 피론(기원전 360~270)의 말이다. -
안재원의 말의 힘 말이 권력을 결정한다 말과 권력의 관계를 꿰뚫어 본 정치가가 키케로다. 단적으로, ‘이상적 연설가(orator perfectus)’를 이상적인 정치가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법정에서 같은 소리만 맴맴 대는 어떤 자도 아니네. 목청만 돋우는 자도 아니네. 돈만 챙기는 삼류 변호사도 아니네. 내가 진실로 이런 사람을 찾고 있네. (…)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아니라 연설가라는 이름을 ‘갑옷과 방패’로 삼아 자신을 지키면서 적들이 던지는 창과 화살 사이를 유유히 누빌 수 있는 사람이네. ‘말’이라는 창으로 사악한 자의 기만과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어 시민들이 증오하고 그들을 단죄하게 만드는 사람이네. 자신에게 주어진 ‘지성’을 방패로 삼아서 무구한 사람을 재판에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네. 삶의 무기력에 좌절하고 갈팡질팡 방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와 본래 가야 할 길로 가도록 만들 줄 아는 사람이네. 간악한 무리에게는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고, 선량한 사람에게 타오른 분노는 부드럽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네.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밀려오는 온갖 사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디로 이끌든지, 그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싶으면 고양시키고, 부드럽게 가라앉히고 싶으면 가라앉힐 줄 아는 사람이네.”(<연설가에 대하여> 1권 202장) -
안재원의 말의 힘 말이 아니라 사람을 뽑으니까 말의 힘은 이중적이다. 말은 사실과 진실을 전하지만, 가짜와 거짓을 퍼뜨리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래서 말은 종종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처칠의 말이다. “진실이 바지를 입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세상의 절반을 돌고 있다.” 즉각성, 전체성, 광속성을 추구하는 디지털 문명이 기술적으로 이를 거들기에 더욱 실감나는 말이다. 말의 전쟁인 선거가 시작되었다. 진실이 양말을 신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온 동네를 몇 바퀴는 돌고 있다. 속도의 경쟁력에서 진실은 거짓을 이길 수 없다. 통상적으로 말의 전쟁이 끝난 뒤에 진실은 거짓을 간혹 이기곤 한다. 하지만 대개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난 뒤이다. 가련한 진실! 과연 지켜줄 수 있을까? 어렵다. 허락 없이 들어온 말의 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또 다른 말이 들어오기에. 도대체, ‘거짓’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
안재원의 말의 힘 바람난 생각 사실상 마음의 주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이 안에 있지 않고 늘 밖으로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다. 시인 칼리마코스의 노래다. “나의 영혼이 반은 도망쳐버렸다. 나의 영혼이 소년들 가운데 누구에게 갔는지? 소년들이여, 그 도망자를 몰래 숨겨두지 말라고 몇번이고 명령했건만 (…) 변덕스러운 사랑에 눈멀어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헤매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지.”(칼리마코스, <경구> 4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