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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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삐뚤이 할매 작년 가을, 여행기 청탁 때문에 고흥에 갔다. 늦가을인데도 들풀은 새파랬고, 햇볕이 따가웠다. 녹동이란 표지판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삐뚤이 할매. 입이 홱 돌아갔다고 삐뚤이 할매였다. 젊어서는 구례서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할매는 이미 삐뚤이인 데다 늙어 미(美)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입 돌아간 할매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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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할매가 된 엄마 내가 아는 최고령의 할매는 엄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내 엄마도 할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할매가 아니고 그냥 엄마였으니까. 내 엄마는 1926년생, 올해 98세다. 구례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세대 중 고생으로는 상위 0.1%에 들 거라 확신했다. 1948년 겨울부터 1954년 봄까지 지리산에서, 체포된 이후 7년간 감옥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경험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마흔이 다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가난과 산에서 얻은 위장병이 천형처럼 찰싹 들러붙은 엄마의 삶은 내내 고달팠다. 노년에는 고된 노동으로 척추협착증까지 얻었다. 구례 내려와 알았다. 시골 할매치고 엄마보다 고달프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 시대의 누구나 엄마만 한, 때로는 엄마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엄마가 아픈 추억을 들먹일 때마다 나는 야무지게 엄마 말을 뚝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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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운조루 종부 할매 구례에는 영조 52년에 지어진 고택 운조루가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뒤주로 유명한 집이다. 운조루의 주인 유씨 가문은 1년 소출의 20퍼센트인 쌀 서른여섯 가마니를 이 뒤주에 넣어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가져가도록 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유씨 가문의 종부, 이길순 할매다. 나는 이 할매를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처음 만났다. 전국의 명문가를 찾아다니며 그 집만의 특별한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였다. 멋진 고택에 어울리는 멋진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품격 있는 집안에서는 저렇게 손 많이 가고 귀한 음식을 해먹었구나, 어쩐지 배알이 꼴리는 것도 같았다. 구례 운조루라는 자막이 뜨더니 허리 질끈 묶은 일복 차림의 할매가 촬영팀을 끌고 밭으로 향했다. 할매는 볏짚을 걷어내고 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더니 무릎 꿇은 채 땅속 깊이 손을 넣었다. 할매는 그날, 유씨 가문의 별식이라며 겨울 무에 돋아난 연둣빛 싹을 잘라 데치고 무쳤다. 다른 종갓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찮은, 그러나 나 같은 서민도 익히 아는 진짜 겨울 별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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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죽도 않고 늙어가는 유난히 비가 많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매화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매화만 보면 나는 한동떡이 생각난다. 한동떡은 한센떡, 그러니까 훗날 장센떡이 된 이의 시어머니였다. 왜 한동떡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시집오기 전 살던 동네가 한동이었을 테지. 같은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만 나는 한동떡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동떡은 주로 논밭, 아니면 산에 있었고,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집 밖 걸음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보름날 밤이면 동네 논에서 달집을 태우곤 했다. 동네 사람 다 모인 흥겨운 자리에 종 출신인 한센 내외와 음전하기로 소문난 한동떡, 몸 약한 우리 엄마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무동 태운 채 아버지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집 주변을 뛰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빚어낸 리듬은 흥겨웠고, 높이 솟은 보름달은 어쩐지 처연했다. 음전해서, 몸이 아파서, 종의 자손이라서 이 흥겨운 잔치에 끼지 못하는 한동떡과 엄마, 한센네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진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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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한센떡, 장센떡 어린 나는 늘 한센네가 궁금했다. 동네 사람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집, 동네서 유일하게 장을 담그지 않는 집, 장판 대신 가마니를 깔고 사는 집, 커다란 똥개와 함께 먹고 자는 집. 한센은 대대로 우리 집안 종이었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장 너머 신작로까지 굵은 가지를 뻗친 채 주렁주렁 익어가는 그 집의 양자두 맛이 제일 궁금했다. 우리 동네에 양자두라곤 한센집의 딱 두 그루뿐이었다. 조선 자두보다 두 배는 크고 새빨간 양자두는 어쩐지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물건 같기도 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양자두가 탐나서 홀린 듯 바라본 적도 있었다. 우연히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한센과 눈이 마주쳤다. 한센은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한센떡도 그랬다. 내 부모 연배쯤 되었을 그들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살금살금 걸었다. 계급이 사라진 지 오래건만 그들은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듯했다. 한센은 말없이 가장 크고 잘 익은 자두 세 개를 따서 담장 너머로 내밀었다. 나는, 도망쳤다. 댓 살쯤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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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산목숨인디 워쩔 것이냐, 살아야제 나는 어린 시절 학교만 파하면 작은고모 집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저녁을 먹는 일도 흔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고, 우리집 식구라곤 엄마와 나뿐이었다. 작은고모네는 식구가 많았다. 위암 걸린 작은고숙,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건장한 아들 넷이 둘러앉으면 밥상이 꽉 찼다. 고모는 자기 식구들만 해도 비좁은 밥상에 염치도 좋게 끼어든 나를 한 번도 타박하지 않았다. 고모네 저녁은 매 끼니 칼국수였다. 멸치 육수에 감자를 잔뜩 넣고 끓인 고모네 칼국수는 단맛이 진했다. 단맛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당원이 들어간 고모의 칼국수를 나는 오빠들과 똑같이 큰 대접에 가득 받아서는 국물 한 모금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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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나의 첫 할매 내 할머니는 1900년생이다. 유관순 언니보다 두 살이 많다. 유관순 언니는 1919년에, 내 할머니는 1991년에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환갑을 맞았고, 서울의 봄은 물론 88올림픽까지 목도했던 것이다. 이미 늙어 있어서 그랬나 내 눈에 할머니는 늙은 채로 더 이상은 늙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열세 살에 내 고향 반내골로 시집을 왔다. 순천에서 시집왔다고 순천떡(순천댁)이라 불렸다. 얼굴은 곱지 않았고, 지혜롭지도 않았고, 성정이 유달리 착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낙이었다. 딱 하나, 할머니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맛깔나는 말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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