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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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나는 효율에 반대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은 기질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불일치와 피로와 고통을 바라보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해, 마음에 대해, 사회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지난 2주간,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같은 기전으로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효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 지금까지 달려왔다. 가난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와 생산성, 효율은 꼭 필요했을 것이며, 우리가 윗세대들의 고생과 노력으로 풍요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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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뇌는 고립을 원하지 않는다 고립무원하다. “3일 동안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말하려니 좀 어색하네요.” 최근 진료실에서 만난 20대 후반 지호씨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재택근무 2년차, 지호씨의 삶은 어느새 고립이라는 상태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현대 도시의 청년들에게 혼자라는 상태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되어가고 있다. 재택근무, 1인 가구, 파트타임, 수험준비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들의 일상은 점점 더 좁은 방 안으로 수렴된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도 부족하고, 환기할 공간도 여유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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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평화로 향하는 길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북한군의 참전 개시를 확인하는 국정원의 발표와 각 부처의 대응이 보도되었다. 외신들도 이를 인용해 보도를 이어갔다. 북한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지혜롭고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유튜브 등의 SNS에는 이미 전쟁이 임박한 듯한, 전쟁을 해야 할 듯한 극단적 발언과 가짜뉴스들도 우후죽순처럼 퍼졌다. 그럼에도 한국의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갔다.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장을 보며 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과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뉴스를 검색하고, 초조해했다. 답답함과 두근거림, 불면을 호소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반려동물용 피란가방을 사야 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 친구는 “외신에는 심각하게 보도되니 여차하면 오거라!”라는 통화 내용을 농담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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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추석 저녁,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마당에 서 있다. 아들이 입을 연다. “아버지, 형과 다투면 늘 저에게 참으라고 하셨죠. 보통 형이 저를 괴롭혔는데도 형에게 대들면 안 된다며 저를 더 나무라셨어요. 방금도 형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반박하려는 저를 아버지가 끌고 나오셨지요. 다루기 힘든 형은 놔두고 저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이러시네요. 아버지가 제 마음을 무시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는 답한다. “그럼 형제끼리 싸우는 걸 보고만 있느냐! 너희가 다투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 그리고 내가 널 무시할 리가 있냐. 네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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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젊은 대민 공무원들의 죽음, 이제는 막아야 한다 공무원들이 아프다. 특히 저년차 공무원들은 낮은 임금, 과도한 업무,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로와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대민 업무를 맡고 있는 지자체 공무원, 교사, 경찰 등의 소진이다. 작년 말 개최된 ‘산재 자살 현황 국회 토론회’에서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용혜인 의원실은 공무원과 군인의 자살 순직 신청건수가 지난해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직장갑질 119는 늘어나는 교사 자살 또한 추이를 주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리고 지난 7월에는 두 주 사이에 여러 명의 경찰관이 과다한 업무가 원인으로 보이는 질병 또는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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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불안과 격변 “일하면서 늘 불안하다 보니, 불안한 것이 오히려 덜 불안한, 아이러니한 상태예요. 불안하지 않은 것이 어색해요.” 얼마 전 ‘일터에서의 불안’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한 출판사 편집자의 고백이 내내 떠올랐다. 젊은 세대의 만성적인 수행 불안의 괴로움이 생생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진료실과 직장 건강강의에서 만나는 많은 청년들이 학업과 업무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한다. 끊임없이 줄 세우고 비교하는 환경에서 경쟁하며 자라온 그들의 마음에는 성취에 대한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이 자리 잡고 있다. 주어진 과제는 높은 완성도로 제 시간에 해내야 하고, 그 와중에 상사에게 잘 보이고 팀원들과 원만히 지내며 평판도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의 과제를 어찌어찌 해내도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작은 허점도 트집 잡을 것이고,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를 버릴 것이며, 경쟁은 영원히 끝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압박감이 지속되다 보니 불안한 상태가 익숙하고 불안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해서 편히 쉬지 못하고 일을 자청하기도 한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기 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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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서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올해 들어 사회 전반에서 심리적 위기와 정신과적 응급 상황이 증가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 심리적 위기상황이란 자해 및 자살 충동을 강하게 경험하는 상황, 자신 및 타인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 등을 아우르며, 위기 개입이 꼭 필요하다. 지난 14일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8차 자살예방정책위원회에서 작년에 자살로 숨진 사람이 1만3770명으로 전년 대비 6.7%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복지부는 올 1분기 들어서도 자살 사망자 증가 추세가 심각하며, 자살 재시도도 늘어 두 차례 이상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응급실 내원자의 비율이 증가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0~30대 청년층의 자살시도율이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 높다는 결과도 발표되었다.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자살 증가 원인을 분석한 바로는 코로나19 장기화 이후의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등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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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럴 수 있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4월과 5월은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시기이다. 내담자분들과 우울감, 감정기복과 충동성, 불안감, 관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다루었다.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는 요즘 자주 만나는 복합적이면서 강력한 정서가 있다. - 연인과 싸웠는데 제가 성격에 문제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제 탓 같아요. - 점심시간에 부서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때 뭔가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서 긴장되고 밥도 잘 못 먹어요. - 친구가 저와의 약속을 자꾸 미루어서 섭섭하고 화가 나는데,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 두려워서 거리만 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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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헤아릴 순 없을까 나는 10여년간 우울, 불안으로 내원한 20~30대 청년들을 주로 진료해왔다. 비교적 잘 지내다가 어떠한 사건이나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게 된 내담자들은 1년 전후의 내원으로 회복되어 치료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유년기에 애착 트라우마를 경험하였거나, 집단 따돌림, 부적응 등으로 오래 힘들어하다가 병원을 찾은 내담자들과는 해야 할 작업이 적지 않아 긴 치료기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마무리해가는 청년 내담자들과 한 번씩 나누게 되는 대화가 있다. “선생님, 5년 전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저 정말로 많이 좋아졌어요. 죽고 싶은 마음도 거의 사라졌고, 문제가 생겨 우울감이 올 때도 전만큼 깊게 침체되지 않아요. 그 우울에서 회복되기 위해 대처하는 요령도 여러 개 생겼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도 잘해요. 이제는 저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지도 않아요. 그런데요, 나아지고 보니 이 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저의 위치가 보여요. 그동안 어려움을 겪고 회복하느라 학교와 직장에서 좋은 성적과 경력을 쌓지 못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의 반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해놓은 것도 없고 지지기반도 약한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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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 제주 4·3평화공원에 다녀왔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깊은 내막을 사진과 전시로 접한 충격은 컸다. 일방적 매도와 학살로 제주도민들의 삶과 가족과 마을이 부서졌고, 존엄은 훼손되었다. 그 7년이 일단락된 후에도 국가권력은 이 사건을 시인하고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가해를 이어갔다.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서로 다독이며 숨죽여 앓았다. 나는 이런 문제 방치 방식을 알고 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대하는,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외면과 억압의 중요한 뿌리가 4·3 사건에 있을 수 있겠구나 내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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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는 아직 애도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을까? 이 안락함이 나에게 주어지는 대가로 무엇이 지불되었을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일제와 한국전쟁 때 학습한 방식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한 독재 정권. 나는 그중 어느 것도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역경에서 회복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 성찰할 시간도 없고 성찰을 허락받지도 못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캐시 박 홍의 책 <마이너 필링스>를 읽다가 만난 ‘성찰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표현이 한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느껴온 우리 사회의 병리와 고통의 얼개를 또렷이 짚어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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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도파민 중독이라니요 정신건강 분야에서 2023년도의 단어는 도파민이 아닐까요? 올해에도 도파민의 지명도는 여전해서, 여기저기 생각지도 못한 대목에서 도파민이란 말을 마주치게 됩니다. 드라마의 자극적인 복수 장면에 “도파민 터진다”라고 감탄하는 댓글이 달리고, 매운맛 마라탕과 달콤한 탕후루를 ‘도파민 맛’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요즈음에는 SNS에 심하게 집착하거나 쇼츠와 같은 짧은 영상을 과하게 오래 보는 것을 “도파민 중독”이라 부르며 걱정하는 추세도 보입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개인의 성취가 중요해진 만큼 스트레스와 긴장감도 높아지고, 또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무언가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경향성이 극대화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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