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동석
출판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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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아보하’를 빼앗긴 삶 출근 전,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든 그는, 차에 올라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을 들으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그의 얼굴에선 어떤 깊이마저 느껴진다. 일을 마친 그는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자전거를 타고 간 단골식당에서 간소하게 저녁을 해결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헌책방에서 산 윌리엄 포크너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등의 소설을 읽다가 잠이 든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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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광장에 나선 ‘토끼들’의 함성 TV 프로그램 <최강야구>를 종종 본다. 프로에서 은퇴한 선수들과 프로 진출을 꿈꾸는 젊은 선수들이 ‘최강 몬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모여 아마추어 팀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이 프로그램을 아끼는 이유는, 모든 출연자들에게서 야구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부터 그렇다. KBO 리그 여러 팀의 감독을 지낸 그는 선수들에게 “여러분은 프로 출신이고, (…) 돈 받는다는 건 프로라는 것”이라며, 예능이 아닌 승리를 요구한다. 매사에 엄격하지만 자상함도 넘친다. 땡볕을 피하라고 파라솔을 챙겨놔도 그는 “선수들이 연습하는데 나만 쓸 수 없다”며 고사한다. 연습이 끝나면 함께 공을 줍고, 상대팀 선수에게도 적절한 가르침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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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수능이 뭐길래 수능날이 밝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줄여 흔히 수능이라 부르는 이날, 수험생과 그 가족들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긴장 아닌 긴장을 한다. 얼마나 중요한 날이면, 여타 학생들의 등교시간과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이 한 시간 늦춰지고, 비행기는 ‘영어 듣기 평가 시간’에 뜨고 내리지도 못한다. 이외에도 수능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생략한다. 전 세계에 또 이런 나라가 있을까 싶지만, 그 비슷한 또래의 아비이다 보니,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수험생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이다. <관촌수필>로 유명한 이문구의 단편 ‘장평리 찔레나무’의 주인공 김학자는 장평리 부녀회장이자 기본바로세우기운동 장평분회장이다. 이금돈에게 시집와서 엽렵한 솜씨로 살림살이했고,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을 건사하며 남부럽지 않게 장가도 보냈다. 시내에서 당구장을 해보겠다고 들들 볶아대기에 적잖은 돈도 대주었다. 시동생 이은돈은 그걸 반년 만에 남의 손에 넘기고 서울 가서 점방을 차려 앞가림 정도는 하고 산다. 상황이 이럴진대, 형수를 ‘금이야 옥이야’까지는 못해도 나름 대우했어야 하는데, 아들 셋을 낳고는 딸만 둘인 형네 알기를 ‘개 항문에 붙은 보리쌀 정도’로 생각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김 회장의 큰딸 월미가 변변치 못한 수능 점수를 받아왔을 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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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한강의 ‘다음’을 기다리는 이유 그날 저녁,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만을 고집하는 한 배우의 삶을 그린 연극을 보고 있었다. 섬세한 연기, 묵직한 울림, 모든 게 좋았다. 오후 9시30분, 객석을 빠져나오며 스마트폰 전원을 켜자 적잖은 수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수신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문자에는 ‘한강’ ‘노벨 문학상’이란 단어가 선명했다. <더 드레서>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새로운 전율은, 돌고 돌아가는 귀갓길마저 흥겹게 했다. 혼자서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축배를 들이켠 나는, 일의 특성상 대부분 ‘초판 1쇄’일 수밖에 없는 한강의 작품들을 찾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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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있고도 없는 ‘희망’ 긴 (듯 보였던) 추석 연휴가 속절없이 끝났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함께 살아온 어제와 오늘, 함께 살아갈 내일을 이야기하며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달뜬 기분으로 어제는 추억했으되, 마음 놓고 오늘과 내일은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누군가’가 특정 세대는 아니다. 노년, 장년, 중년, 청년, 유소년 세대 모두, 즉 우리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며 오늘을 살고, 하여 내일을 기대하지 못한다. 팍팍한 경제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인생은 저마다의 고민이 있고, 그 고민 속에서 희망이 영글어야 하는데,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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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나이 스포츠 중계에, 종종 전성기가 지난 선수가 그에 버금가는 실력을 선보일 때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말이 등장한다. 스포츠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노장의 활약 뒤에는 이 말이 붙곤 한다. 요즘 이 말은 처세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동안이 강조되는 시대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아냐”라는 말을 인사치레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내남없이 건강한 삶을 꿈꾸는 세상에서 이 말은 그만큼 값어치가 높은 축에 든다. 나이를 거꾸로 먹진 않지만, 나이가 멈춰버린 여성이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의 일은 아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의 주인공 아델라인 보먼(블레이크 라이블리)은 100년째 29세를 살고 있다. 폭설이 내리던 날 그가 운전하던 차가 호수에 빠지고, 목숨은 건졌지만 아델라인은 그날 이후 더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처음엔 좋았다.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점점 나이를 먹는데 자신만 그대로였으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다시 미국으로, 10년 주기로 이름과 신분을 바꾸며 살아야만 했다. 사랑이 찾아와도 늘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고독, 외로움이 엄습했다. 아델라인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늙어갈 수 없는 운명이 아팠다. 다시 큰 교통사고를 당한 아델라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1년 후 거울을 보다가 새치 하나를 발견한다. 아델라인의 한마디는 이랬다.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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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장벽 세상 도처에 장벽이 있다. 침략자를 막기 위한 장벽이 있는가 하면,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위한 장벽도 있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우주에서도 보인다는(하지만 보이지 않는) 만리장성이다. 후자는 한때 냉전의 상징물이었으나 지금은 ‘기억’을 위해 일부 보존되고 있는 베를린 장벽이 대표적이다. 베를린 장벽이 상징성만 남았다면, 휴전선은 피아를 구분하는, 분단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 의지가 담긴 장벽도 있다. 네덜란드엔 암스테르담, 로테르담처럼 명칭 끝에 담(dam)이 붙는 곳이 많은데, 바다나 강의 범람을 막으려 댐을 설치한 도시들이다. 댐은 ‘막다’ ‘차단하다’ 뜻을 담은 중세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장벽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이다. 적을 막는 일도, 피아를 구분하는 일도, 바다의 범람을 막는 일도 결국 삶을 위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장벽은 되레 삶을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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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MBTI 얼마 전부터 몇몇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너 T야?” 그들은 하나같이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스스로 답한다. “T 맞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T(Thinking)형 인간이 되었다. 세상에나, 내가 진실과 사실에 관심이 많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심지어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걸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풍문으로 들은 T의 반대 성향은 F(Feeling)라는데, 사람과 관계에 관심이 많고, 공감 잘하고, 주관적 판단에 강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혈액형이나 별자리 등등으로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구분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당연히 MBTI 검사 역시 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T형 인간인지, 아니면 F형 인간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내게 ‘대문자 T’라는 명찰을 달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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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눈물 지난 4월 말 종영한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최고 시청률 24.85%를 기록하며 세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제목과 달리 여주인공보다 남주인공이 눈물을 더 많이 흘리긴 했지만, 오히려 그 절절한 눈물에 팬들은 더 열광했다고 한다. 사전 정의에 따르면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액체 형태의 분비물로 눈을 보호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만, 살다 보면 눈물엔 여러 가지 정황이 있다. 때로 슬퍼서, 종종 기뻐서 눈물짓는다. 반가워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 눈물의 정황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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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하지도 않은 말과 ‘와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종종 언급되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사회비평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묘비명 원문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정도의 번역이 과하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지 버나드 쇼는 묘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후 화장된 그의 유해는 오랫동안 은둔하며 작품을 썼던 런던 교외의 ‘쇼스 코너’ 정원 곳곳에 뿌려졌다. 묘비는 아예 세워지지도 않았다.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2000년대 중반 한 이동통신사가 만들어낸 묘비 사진과 과장된 말은 이제 정설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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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과거의 벽 깨는 ‘문학의 힘’ 1692년 1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보스턴 인근 한 마을에서 두 소녀가 발작 증세를 보였다. 의사는 한 달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자 소녀들이 “악마의 손에 떨어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추궁이 계속되자 소녀들은 노예 출신 하녀와 부랑자들이 자신들을 저주했다고 지목했다.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녔다는 허황된 주장이 난무하는 와중에,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기소되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1명이 고문 끝에 죽었으며, 옥사한 사람도 여럿이다. 총독이 나서서 마녀재판 법정을 해체하고서야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집단 광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언급되는, 그 유명한 ‘세일럼 마녀재판’의 간략한 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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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퍼져라, 동네책방 ‘삶의 향’ 최은영의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영인문고’라는 중고책방이 등장한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이 책방의 삼면에 자리했고, 가운데에는 기다란 평대”가 있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런 중고책방(사실 ‘헌책방’이라는 표현이 더 정겹기는 하다) 모습이다. 화자(話者) 희원과 대학교 영어강사인 그녀가 거기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곳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일종의 정서적 연대감 같은 것을 경험한다. 서점, 책방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에 가는 일을 즐거워하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희원이 “계산대에 가만히 앉아서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신경쓰지 않던” 책방 주인 덕분에 “책방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그 어떤 책도 권하지 않는 그곳에서 희원과 그녀는 오히려 책이라는 세계에 더 빠져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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