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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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어린이답다는 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 아직 초등학생이니 자신은 어린이가 맞다고 주장하는 조카를 학원에서 데려오던 길이었다. 용돈으로 어린이날을 축하받았다는 녀석에게 어버이날 준비는 했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다 같이 부모님께 드릴 감사 카드를 만들었단다. “고모, 그런데 애들이 편지를 못 쓰더라?” 어깨를 으쓱하는 아이에게 “너는, 잘 썼어?” 물으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뭐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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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행복한 밥상, 안녕을 확인하는 한 끼 최근 전에 없이 주민센터를 자주 드나들고 있다. 목적지가 주민센터는 아니다. 새로 지은 주민센터 2~3층에 도서관이 들어섰고, 그곳에 가려면 1층 민원실을 지나야 한다. 오전 시간엔 어르신들이 많다. 민원실 창구의 ‘쌀 신청’ 안내문 앞에서 정부 양곡을 주문하는 어르신들, 서류 한 통을 떼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웬만한 서류는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어 언젠가부터 주민센터는 내게 갈 일이 없는 공간이 됐다. 그런데 그곳에서 간편하다는 온라인이 조금도 간편할 수 없는, 여전히 얼굴을 마주해야 이어갈 수 있는 삶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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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강릉 임장기, 집값보다 궁금한 것 얼마 전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릉 임장’ 소식을 알렸다. “강릉? 갑자기?”를 시작으로 “결혼하니?” “거기 시세는 어때?” “갭투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어디에 사는가’가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사회적 위치로 읽히는 구조 속에서 오랫동안 서울에 발붙이고 살던 이가 서울 밖으로 집을 보러 간다는 소식은 곧장 ‘결혼’과 같은 인생의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시 모를 ‘경제적 이익’으로 해석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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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완행버스에서 만난 다르지만 닮은 삶 엄마의 시골집을 오갈 때면, 종종 이(里) 단위 마을 구석구석을 훑는 완행버스를 타게 된다. 하루는 옆자리 한 승객이 읍내에 도착할 즈음 내 손목을 톡톡 쳤다. “네?” 하고 응답했지만 그의 말은 선뜻 알아듣기 어려웠다. 엄마의 시골집이 있는 곳은 과수와 엽채류 농사로 바쁜 지역이다. 그의 차림은 그가 그 어딘가의 일손임을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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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곶감 건네는 마음 설 대목을 앞두고 감 말리기에 한창인 곶감 농가에 다녀왔다. 이후 기사를 쓰려 몇 차례 곶감 관련 자료를 검색했더니 SNS에 온갖 곶감 광고가 줄을 잇는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겼을 광고에 자꾸만 눈이 갔던 것은, 광고 속 곶감이 내가 알고 있던, 또 현장에서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달라서다.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설화가 남아 있을 만큼 곶감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본디 우리 토종 감은 ‘떫은’ 감이라 옛사람들은 생과로 먹을 수 없던 감을 하나하나 껍질 벗겨 볕을 쪼이고 바람 쐬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과로 즐기는 단감은 근대에 유입된 품종이다. 가을의 끝자락부터 겨우내 두어 달을 들여 완성하는 곶감은 단순히 입을 달래는 주전부리가 아니라, 먹거리가 넉넉지 않던 시절에 시간과 정성과 지혜로 맺었던 귀한 저장식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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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붉은 말의 해에 호랑이를 기다리게 된 연유 바깥공기가 차가워져 옷깃을 여미게 될 즈음, 당일치기로 경북 영양에 다녀왔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기획한 북토크 장소가 ‘육지 속의 섬’이라는 영양이었다. <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의 저자인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임정은 선임연구원의 강연과 함께 멸종위기 동식물의 보금자리를 견학하는 일정. 왕복 이동 시간만 10시간 이상이 예상됐지만, 책을 읽고 그 무모한 기획의 마음이 읽혀 내 마음도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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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우리가 ‘길’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 버스가 정차하고 누구보다 먼저 내린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뒷문 쪽 바닥에 설치된 발판 고리를 힘껏 당겼다. 저상버스에는 휠체어가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바닥에 접이식 발판이 설치되어 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버스도 있지만 수동으로 고리를 당겨야 하는 버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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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면 소재지 시골 마을에 살며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가 얼마 전 한 할머니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요양기관으로 모신 것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엄마는 도둑으로 몰렸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엄마에게 “왜, 뭘 훔쳤다고 하시던데?” 묻자, 돌아오는 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순대! 순대가 없어졌다 안 카나!” 나는 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순대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제야 좀 진정되는지 엄마는 “그래, 금붙이라도 없어졌다 캤으면 우얄뻔 했노”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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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갈매기, 곰, 공룡, 독수리, 마법사, 쓱, 영웅 군단, 줄무늬, 푸른 피, 그리고 호랑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이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다. 모르는 이들에겐 이상한 암호명 나열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이들에겐 곧장 도파민이 솟구치는 신호, 프로야구 이야기다. 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는 다른 맥락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기반의 확고한 ‘연고 문화’를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 부산은 롯데, 호남은 기아, 충청은 한화처럼 실로 오랫동안 출신지에 따라 응원 팀이 정해졌고, 그 소속감과 연대가 야구 팬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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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 서울 서초구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도 재난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그늘막 설치를 추진했고, 1년여 준비 끝에 2015년 6월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국 어디서나 익숙해진 이 시설물은 공공디자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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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박제한 교실 한 칸짜리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이름하여 ‘실패박물관’이다.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가 하면, 인공지능(AI) 기반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설계는 해냈지만 재료 수급과 조립 과정에서 막혀버린 프로젝트도 있었다. 친환경 캠페인으로 상품을 기획하고도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사용해 메시지가 희석됐다는 자기반성도 전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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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동안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전원생활교육과 귀농귀촌종합센터에서 수탁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 기본공통과정, 일종의 ‘생활형 농촌 교육’을 연이어 받았다. 경제활동의 토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리한 생활·문화 인프라와 촘촘한 사회적 연결감 등 도시를 쉬이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전업 귀농으로 삶을 전환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그마하더라도 텃밭과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고, 그 속에서 거둔 것들로 밥상을 차려내는 생활을 그린 지 제법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