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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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붕괴한 현실의 거울, 공포 영화 <살목지>가 8일 개봉했다. 최근 아이돌 캐스팅과 과도한 자극에 의존하던 일부 호러 영화들과는 달리, 스토리 전개에 설득력이 있으며 공포감을 적절하게 유지한다. 김혜윤과 이종원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추정컨대 순제작비가 약 30억원인 영화는 손익분기점(70만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1998년 <여고괴담>의 신드롬, 2003년 <장화, 홍련>의 대성공으로 한국 호러는 잠시 인기 장르였다. 하지만 외국 호러의 느슨한 모방과 충격 효과(점프 스케어와 거슬리는 효과음)에 기댄 소모성 기획물이 양산되면서 관객의 신뢰를 잃었고, 오랜 정체기에 들어갔다. <파묘>(2024)가 천만 관객을 넘으며 비로소 호러 영화는 산업의 기대를 받는 장르가 됐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춤이 끝나고, 고독한 자신을 만나자 2월20일 넷플릭스에 공개한 영화 <파반느>가 조용한 찬사를 받고 있다. 첫 주 글로벌 톱10 비영어권 7위로 시작해, 입소문을 타고 2주차 4위로 세 계단을 거슬러 올라 역주행을 했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서정적인 영상과 ‘파반느’라는 제목에 걸맞은 우아하고 정적인 연출이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날카롭게 그려냈다. 영화의 배경은 지금에서 5년 전쯤으로 모호하게 옮겼다. 외모에 대한 낙인과 혐오가 시대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실임을 드러낸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성공은 누구의 것일까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The Eras Tour)는 공연 기록 경신을 넘어, 음악 산업과 경제 효과의 판도를 바꾼 하나의 ‘현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2023년 3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21개월간, 5개 대륙 51개 도시에서 총 149회 공연, 약 1016만명이 관람했다. 티켓 매출로만 20억달러를 돌파하며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투어다. 공연 실황과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가 공개되었고, 공연 이후 소식이 전해지며 대중이 감동한 지점은 화려한 숫자가 아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공연을 함께 만든 스태프에게 약 1억9700만달러(약 2800억원)가 넘는 보너스를 지급했다. 주요 역할을 담당한 스태프는 물론 트럭 운전사, 무대 설치팀, 백댄서 등 모두에게 1억원 이상의 보너스가 돌아간 것이다. 메시지는 간단하다. 성공은, 결코 나 혼자만의 천재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선언이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너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스포츠에는 열광한다. 기록과 점수로 증명되는 세계는 깔끔하고 공정하니까. 참가자들이 각자의 노래를 부르며 축제처럼 즐기는 가요제도 괜찮다. 하지만 음악이나 요리처럼 주관적인 영역에서 ‘과제’를 내주고, 우열을 가려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과정은 어딘가 불편하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다정함은 우리 시대의 펑크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고, 밤의 여행자들이다.’ 하룻밤 머물 공간을 내어줄 배려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다정함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가족이 될 수 있다. 지난 17일 개봉한 <파리, 밤의 여행자들>(2022)이 건네는 메시지다. 1980년대 파리,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엘리자베트는 10대의 남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출산과 유방암 투병으로 경력단절이 된 그는 즐겨 듣던 라디오 심야 방송의 전화교환원으로 일하게 된다. 청취자들이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DJ와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양육비를 제대로 받지 못한 엘리자베트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남편의 배신, 경제적 어려움 등등 가볍지 않은 생활이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정통과 파격, 모두를 아우르는 시스템 지난 8월22일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마침내 2025년 영화 흥행 순위 정상에 올랐다. 11월19일 기준 누적 관객 수 563만명. 상반기 인기를 끌었던 웹툰 원작 <좀비딸>과 같은 관객 수다. 하지만 <귀멸의 칼날>은 여전히 하루 1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고 있어, 곧 단독 1위가 될 예정이다. 올해 영화 흥행 순위에서 흥미로운 점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다. 지난 9월24일 개봉한 <체인소맨: 레제편>은 312만명으로 6위이고, 3월 개봉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은 94만명이다. 그 외에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그림이야기> 등 익숙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10만 넘는 관객을 기록했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선하고 이타적인 영웅의 시대 지난 18일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LA 다저스와 밀워키 브루어스의 4차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탄생했다. 다저스 선발투수로 나선 오타니 쇼헤이는 1회초 삼진 3개를 잡아 이닝을 끝내고 1회말 톱타자로 바로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쳤다. 오타니는 6이닝 동안 삼진 10개를 잡고,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타자로는 1·4·7회에 홈런 3개를 기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오타니가 음악의 베토벤, 희곡의 셰익스피어, 농구의 마이클 조던, 골프의 타이거 우즈에 필적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오타니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야구 선수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뾰족하고 모난 콘텐츠를 만들자 9월11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얼굴·사진>은 24일까지 77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개봉일 1위였던 <얼굴>은 하루 만에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에 뒤졌다가 15일부터 다시 10일째 1위를 기록했다. 100만명을 넘을지 궁금하다. <부산행>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고,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과 <기생수: 더 그레이>가 인기를 끌며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 제작에 참여한 <계시록>을 연출했고, <선산> <괴이> <방법> 등 각본과 제작 등을 맡은 다수의 드라마를 성공시켰고, 일본의 고전 <가스인간>을 리메이크하는 등 국내외 차기작이 줄줄이 늘어선 연상호에게 <얼굴>의 100만 관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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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제2의 ○○○은 없다 마침내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2억3600만뷰로, 넷플릭스에서 가장 스트리밍이 많이 된 영화에 등극했다. 극장에서 개봉한 싱얼롱 버전은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한편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일본에선 자국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고, 미국에선 외국어 영화 최대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전지적 ‘독자’ 시점 20여년 전, 할리우드는 인터랙티브 영화 개발에 나섰다. 게임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부러워하며, 사람들은 이야기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이 크다고 판단했다. 영화에 게임 방식을 접목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화면이 멈추면 선택지가 나온다. 관객이 좌석에 달린 번호판에서 원하는 버튼을 누르면, 다수가 선택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DVD 플레이어에서 영화를 볼 때도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선택한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K컬처의 새로운 피 지난 6월20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영화 부문에서 4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 등 41개국에서 1위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는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 등에서 1위를 기록했고, 삽입곡인 ‘골든’(Golden)과 ‘소다 팝’(Soda Pop)은 유튜브 공개 10여일 만에 1000만뷰와 600만뷰 이상이 나왔다. -
김봉석의 문화유랑 인간에게 필요한, 사소한 것들 휴머니즘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이 너무나 추악하고 잔인한 짓을 해도, 결국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에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그린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휴머니즘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반세기가 지난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타인을 짓밟는 존재인 것일까? 인간은 사악하게 태어난 걸까? 그런 생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대사에 공감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 생각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