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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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투명한 승부에 끌린다 바둑은 둘 줄 모른다. 할아버지는 바둑을 즐겨 두셨고, 바둑을 두는 친구들과도 가까웠지만 딱히 배우지 않았다. 잡기를 싫어한 건 아니다. 중국과 일본 장기, 체스를 두고 화투와 포커 등도 한다. 바둑을 볼 줄은 안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바둑책을 그냥 읽었고, 신문에 나오는 기보도 매번 들여다봤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집에 있던 책과 잡지, 신문을 다 읽을 때라 그랬다. 그러다 보니 서봉수와 조훈현의 스토리를 알게 됐고 차민수, 이창호, 이세돌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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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다정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혐오의 시대다. 여성을, 장애인을, 중국인을, 또 누군가를 타당한 이유 없이, 나의 이익이나 권리를 침해했다면서 일방적으로 조롱하고, 배척하고, 탄압한다. 초유의 일이 아니고 낯설지도 않다. 희생양을 만들어 진짜 악에서 시선을 돌리려는 음모는 인류사에 항상 존재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조센징 혐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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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폭력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역사는 때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개인의 삶을 뒤틀어버린다. 평소에 개인과 집단, 세상, 사회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건 말건 상관없다. 속세를 떠나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살아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외면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로 개인의 모든 것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 지진처럼, 해일처럼, 언젠가 우주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소행성처럼 무자비하고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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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사상검증을 해야만 살아남는 지옥 대학 시절, 어느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의 경험.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장악했던 시골 마을. 늦은 밤에 자고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손전등을 비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바라보지만, 불빛 때문에 누구인지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그가 묻는다. “너 어느 편이야?” 물어보는 이가 국군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기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반대쪽이라고 말하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린 상황. 가장 두려운 공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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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망상의 세계에서 출몰하는 유령들 12월3일 밤, 10시 반이 지난 시각이었다. 페이스북과 엑스 등 소셜미디어를 뒤적거리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농담인가, 가짜뉴스인가, 소설인가 생각하다가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찾아봤다. 한 줄짜리 속보가 있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현실의 사건이었다. 다시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국회 앞 생중계를 보면서 당황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이전의 계엄이 45년 전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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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인생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 잠이 잘 들지 않는 밤에는, 빗소리나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재클린 듀프레이의 첼로 연주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솔리튜드(Solitude)’와 함께 자주 듣는 음악은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인생의 회전목마(人生のメリ-ゴ-ランド)’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메인 테마곡. 왈츠풍의 ‘인생의 회전목마’는 차분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여 활기찬 어린 시절에서 청년을 거쳐 절정에 이르렀다가 천천히 정리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인생을 회전목마에 비유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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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조용하게, 천천히 가는 사람들 지인들과 만나 대화를 하다가, 첫 기억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봤다. 유치원으로 가던 골목길의 낡은 풍경이 기억났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형과 뛰어놀던 기억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니 화사한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어릴 때 살던 집의 마루였다. 홀로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에 가득 맞고 있었다. 옆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혼자서, 조용히, 햇볕을 즐겼던 걸까. 처음으로 가장 좋았던 기억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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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기억할 만한 작품 ‘로봇 드림’ 9월이 시작되면서 자주 흥얼거린 노래가 있다. ‘Do you remember…’로 시작하는,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셉템버’(September). “말해줘요. 당신은 기억하나요? 우리가 춤추던 9월에는 걱정 없는 나날뿐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춤추던 9월은 황금빛 꿈이 빛나는 날들이었다는 것을.” 가사는 아련하지만, 무척이나 흥겨운 곡이라 절로 몸이 들썩이며 리듬을 타게 된다. 1978년 발표하여 번들거리는 1980년대에 꽤 유행한 사랑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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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아무것도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 처음으로 일본에 간 해는 1998년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인터뷰하러 도쿄에 갔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젊은 여성들이 활보하는 시부야, 만화 <시티 헌터>의 배경인 신주쿠, 첨단 전자제품과 애니메이션의 성지 아키하바라 등 도쿄의 중심가를 경탄하며 걸었다. 당시의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화려한 거리와 느긋한 공원의 비일상적인 풍경,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상품들이 즐비한 세련된 상점도 모두 신기했다. 그 시절, 일본을 다녀올 때면 캐리어에 책과 DVD, CD가 가득 채워졌다.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를 알고 싶으면, 미국이나 일본을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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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완벽하지 않지만, 멋진 선택 우리는 무수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은 인생에 큰 영향이 없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어떤 운동화를 살까, 비가 오는데 산책을 갈까 등등. 하지만 때로는 가벼운 선택이 인생의 경로 자체를 바꿔버린다. 우연히 본 영화인데 마음을 흔들어 삶의 방향이나 태도가 달라진다.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선택은 우리 삶의 정체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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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작고 단단한 일상이 만드는 ‘완벽한 날들’ 새벽에 일어나 싱크대에서 세수하고, 화분에 물을 준다. 도쿄 시부야구의 화장실을 돌며 청소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한적한 신사에서 나무와 햇살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아사쿠사역 근처 허름한 선술집에서 하이볼을 마신다. 작은 다다미방에서, 스탠드 불빛으로 윌리엄 포크너의 문고본을 읽다가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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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 ‘창가의 토토’에게 배운 자유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는 영화를 보러 간다. 문화의날이라 영화 관람료가 절반이다. 하루 중에 할인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일정을 맞춰 보러 간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관람료가 1만5000원까지 올랐기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영화나 보러 갈까라는 선택은 사라졌다.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은지, 몇번이나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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