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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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어느 무연고 시민 장례식 지난 11월14~16일에는 어느 무연고 시민의 장례가 치러졌다. 장애가 있었던 고인이 법적 무연고자인 이유는 그가 유아일 때 유기된 상태로 발견되어 아동시립병원을 거쳐 시설에 들어가 36년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시설에서 나온 후 어느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나, 이때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연고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행 장사법 체계상 무연고자 사망 시 일단 상속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가족’을 찾아야 한다. 연고자의 존재 유무는 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바로 확인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어 연고자가 있다면 그들이 시신을 인수할 것인지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고인이 관계를 맺어 왔던, 기꺼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할 이들에게 장례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는 건 그다음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서는 자칫 고인의 시신이 차가운 안치실 안에 불특정 기간 동안 누워 있어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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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법이 말하지 않는다 해서 지난 10월23일 대법원에서는 소매점에 이동식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장애인들의 접근성을 확보할 의무를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시행령을 느슨하게 규정하여 20년 넘게 접근권이 침해되었음을 다투는 소송의 공개변론이 열렸다. 정부는 장애인들에게 온라인 구매 등 대체수단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한 대법관에게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라는 것이냐”고 지적당했다. 현대 입헌주의 국가에서 인간은 헌법에 의해 기본권을 보장받는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하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이 가장 유명하지만, 헌법은 좀 더 특별한 고려를 할 가치 혹은 국가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한적으로 열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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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는 과거 ‘선감도’라 불렸던 지역이 있다. 그곳에는 1942년부터 1982년까지 5000여명의 강제수용된 어린이들에게 강제노동, 학대, 암매장 등이 행해졌던 선감학원이 있었다. 수백명의 아이들은 과거 섬이었던 그곳을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선감학원의 학대생존자들은 2020년 12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자마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22년부터 아이들이 암매장된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시굴이 행해졌으며, 경기도는 지난 8월 본격적인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희생자들의 작아도 너무 작은 분묘는 185기여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아홉 번째 선감학원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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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공직 인사와 민주주의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도전 중 하나는 정치가 정책을 통해 사회문제를 푸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하면서 정책을 집행하는 기술관료제가 국가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선출된 권력에 기반한 대의기구와 전문성에 기반한 기술관료제는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오늘날 국가권력을 분점한다. 기술관료제의 구성요소인 공공조직의 수장인 장관, 위원장, 공공기관장 등의 임명은 대의제와 기술관료제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선거만큼이나 중요한 민주적 행사다. 수장을 관료제 내부 출신으로 임명하면 ‘관피아’라는 말에서 보듯이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약화될 우려가 있다. 물론 그 내부자가 외부의 정치세력과 긴밀한 인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민주적 통제의 약화가 아니라 과잉을 염려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수장을 정치인으로 임명하면 논리상으로는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전문성이 객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데도 정치인을 임명하는 이유는 논공행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민주적 통제를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런 정치적 임명은 현재 한국의 제도와 관행의 기본이면서, 과거부터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 같은 비판에 시달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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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국민동의청원과 민주주의 지난 6월 국회에 올라온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청원과 7월 올라온 그 반대 청원이 언론을 장식한 이후, 대다수 시민들이 존재조차 몰랐을 국회 국민동의청원 웹사이트는 여름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다. 7월의 마지막 날 접속해 본 국민동의청원 웹사이트는 팝업창으로 먼저 방문자를 반겼다. “국방부 장관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및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 임명 요청에 관한 청원이 (…) 50,000명의 동의를 받아, 소관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다소 무심하게 팝업창을 닫았더니 뒤에 팝업창 하나가 더 숨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정당해산심판청구 촉구 결의안에 관한 청원이 2024년 7월22일 10시25분 기준으로 50,000명의 동의를 받아, 소관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어 이러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 팝업창을 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팝업창들을 모두 닫고 난 웹사이트 대문에 ‘동의 진행 중’으로 떠 있는 청원 중 하나는 “국민의힘 정당해산심판청구 촉구 결의안에 관한 청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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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안전’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용어가 뒤트는 진실은 그것이 ‘사회’인 한 여전히 사람이 가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생산자로서의 존엄함도 원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화성시 리튬전지 생산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를 돌아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고도화라는 시스템 중심적 사고에 묻힌 생산자로서의 시민을 위한 자리는 어디 있는지 묻게 된다. 이 화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 화재방지와 대피시스템이 고도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단일 화재로 23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은 고도화될수록 설계자도, 그 안의 사람들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취약지점들을 만들어낸다. 누구도 이 지점에서 시스템의 안정성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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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진정 협치를 원하는가 대한민국 제21대 국회(2020~2024)와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겹친 지난 2년간, 대통령에 의한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14번 있었다. 21대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개정되었어야 할 30여건의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위헌 상황을 방치한 셈이다. 지난 5일 개원한 제22대 국회 첫 본회의는 여당과 야당 간 합의 불발로 인해 야당 단독으로 개최되었다. 정치평론가들은 이미 여당에서 8표만 이탈하면 대통령의 거부권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시민 입장에서 이런 정치를 바라보고 있자면 지칠 수밖에 없다. 물론 갈등과 경쟁에는 역동성이 있어서 더 나은 대안과 공익의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정쟁에도 미덕은 있고, 나름 이유도 있다. 단독 개원한 이번 국회도 야당은 국회법을 준수하자는, 여당은 법사위와 운영위를 제2당에 배분한 관습을 준수하자는 나름의 입장 간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나 각자 부분적으로만 맞을 뿐, 큰 그림에서는 결국 시민들의 삶과 정책의 시의성은 한쪽에 밀어두고 하위 차원의 쟁점들이 주도하는 정국을 통해 우리는 ‘협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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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그 하나의 이름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끝날 때 흐르는 ‘카나타 하루카’(저편 아득히)라는 곡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몇천년 후의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따위보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웃는 네가 보고 싶어.” 경세가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가사는 어쩌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른다. 대의냐 한 인간이냐라는 프레임은 많은 서사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다.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은 기계의 침공 앞에서 한 줌 남은 인류를 구할지 자신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할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병사 한 명을 구하다가 해병대 분대원이 전부 전사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무려 5억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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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기억은 공간을 통해 이어진다 미국 워싱턴에는 동쪽 끝에 의회 의사당이, 서쪽 끝에 링컨 대통령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는 “내셔널 몰”이라 불리는 긴 공간이 있다. 동쪽으로는 각종 역사박물관들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홀로코스트와 2차 대전·한국전쟁·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추모공원, 마틴 루서 킹 목사 추모공원 등이 자리해 있다. 미국 정치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워싱턴은 백악관과 의사당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실상 거대한 추모의 공간이다. 비행기를 타고 뉴욕 맨해튼으로 날아가면 9·11 테러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그라운드 제로”라 불리는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평지에 서서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상징하는 네모난 분수가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고, 당시의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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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다 제2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두 주 정도 남았다. 미뤄지던 공천 작업이 급물살을 타고 후보들이 구체화되면서 유권자들, 특히 대안적 정치를 꿈꾸는 이들 중에서는 총선을 바라보는 답답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절망은 선거가 그만큼 중요한 행사라는 징표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거를 달리 바라볼 이유들도 있다. 선거란 늘 그랬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선거에 관한 한 반복적으로 검증되어 왔다. 이맘때쯤이면 이번 선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선거인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한국의 향후 10년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강조하며 저마다 투표를 독려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정당들은 저마다 이번 총선에서 자신들이 승리해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된 선거의 결과들을 돌아볼 때 선거 결과 때문에 민주주의나 사람들의 삶이 상처받을 수는 있으나, 우리의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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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말 한마디 정치 공사 영역을 불문하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의 침묵과 날선 말들로 인해 시민들이 상처받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가장 부족한 미덕 중 하나는 사과일 것이다. 많은 공직자들이 시민들에게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를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자기들의 정당성을 집요하게 변호하는 모습을 본다. 참사가 터졌을 때, 국가의 관리·감독 실패가 발견되었을 때, 시민들이 위정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피해 보상과 책임자 처벌 이전에 납득할 만한 설명과 진심 어린 사과이다. 생각해 보자. 동일한 실패에 대해 사과에 앞장선 사람과 변명을 일삼은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지를. 하지만 이 시대의 권력자들은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사라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는 듯하다. 혹은 사과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못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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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대표를 다시 생각한다 2023년 8월 어느 더운 날, 국회에서는 전국에 소재한 1500여곳의 집단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2만8000명을 지역사회에서 어울려 살도록 전환하는 탈시설 정책을 추진하면 예산이 얼마나 소요될지 가늠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여섯 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축사를 전하거나 직접 참여했다. 이들의 소속 정당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으로 다양했던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한결같이 ‘초선’의 ‘여성’ ‘비례대표’ 의원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삶들을 위한 세미나에 축사를 보낸 이들 역시 그리 주류는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