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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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작고 작은 이 세상 11월 마지막 주말의 제주는 화창했다. 전날까지 비가 오다 갠 오후의 섬은 황금빛 특유의 따뜻한 색조로 가득했다. 공항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가면 나오는 작은 포구인 종달리에 위치한 ‘해녀의 부엌’에 도착했을 때는 바다가 이미 검푸름해졌다. 둘러앉은 이들 앞에서 8세 때부터 물질을 시작해 80세까지 바다에 들어갔다는 88세의 해녀 할머니가 주름 가득한 얼굴로 꺼낸 화두는 4·3이었다. 세계사의 교차로에서 이념이 대립하는 가운데 그저 물질하며 살던 어느 작은 마을의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닥친 학살의 순간에 대한 미시적 기억이 덤덤하게 풀어져 나왔다. 겨울 바다에도 입고, 임신하고도 입고 들어갔다는, 천으로 된 작고 얇은 해녀복은 생존 이후 그의 삶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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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새벽은 분주하다. 지난 두어 주 공론장을 강타한 쿠팡 새벽배송 논쟁은 국가의 관리를 벗어나 질주하는 시장의 복잡한 이면을 드러냈다. 하나의 사업 모델로 출발한 새벽배송은 한국 사회의 노동권, 노동자들의 분화, 건강과 소득, 규제와 자유, 소비의 필요와 윤리, 그리고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사실 새벽은 그 이전에도 국가적으로, 산업적으로, 종교적으로 전략적인 시간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朝鮮)’의 후예들에게 새벽은 과연 어떤 시간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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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사법부를 생각하다 사법부는 이념적으로는 자유와 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 불리지만, 역사는 권력에 굴종했던 법관과 조직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물었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사법부는 실제 자유와 인권의 최종 수호자였는가, 아니면 단지 국법 절차의 최종 국면에 불과했는가. 사법부는 혹 스스로 권력이 되려 하지는 않았는가.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용기 있는 공직자인가, 신분 보장의 뒤에 숨어 안주하는 공무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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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출근길의 풍경 매일 아침이면 많은 시민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길을 나선다. 이 길의 모습 속에는 한 사회의 구조와 구성원들의 신뢰, 공적 건강, 그리고 민주주의의 질을 가늠하는 척도들이 녹아 있다. 줌렌즈로 풍경을 담듯 출근길을 들여다보면 이 사회의 복잡다단한 풍경이 펼쳐진다. 편향되긴 하지만 일단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수도권 통계를 보자. 2024년 서울시의 추정에 따르면 평일 하루 수도권을 오가는 인구 이동은 7135만건이고, 수도권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시간은 평균 71분,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출근하는 시간도 평균 59.4분이 걸린다. 도로는 막히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짐짝이 된다.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이들은 최소한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낙을 누릴 수는 있지만, 다른 수단에 비해 정신적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진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반대로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하는 이들은 운전의 피로감 대신 몸들이 부대끼는 과정에서 밀려오는 불쾌감과 피로를 감내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은 모습을 바꾼 ‘오늘의 운세’다. 갑자기 접촉사고나 싱크홀이 발생하거나, 눈·비·작동 오류로 도로가 막히고 지하철이 연착된다는 방송이 들려올 때면 현실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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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도서관 예찬 최근 개관한 동네 도서관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공간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중시한 건축 철학 덕에,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미래 세계의 가상공간처럼 넉넉하고, 세련되고, 조용하고, 부드럽다. 방학을 맞은 아이와 부모들에게는 휴양지나 다름없다. 오전 9시에 개관하는 동네 도서관은 미리 가 있어야 개인 좌석을 잡을 수 있을 정도다. 선뜻 구입해서 읽기 부담스러운 전문서적들, 사진이 가득한 두꺼운 기록집들, 다양한 관점의 시사잡지들, 그리고 성인에게도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들을 둘러보고 있으면 사악한 괴물을 피해 들어온 숲속의 통나무집 같은 기분이 든다. 벽난로 앞에는 ‘민주주의’라는 요정과 ‘지적 자유’라는 난쟁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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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국민의 슬픔과 싸우지 않는 나라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한다. 범죄, 조세, 경제규제 같은 영역에서 공공성을 침해하는 민간 행위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승률은 국가의 질서 유지 능력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 유능함은 때로는 과거의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발휘된다. 가해 사실을 일단 부정하고, 피해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음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입증 책임을 다투고, 기계적 항소를 거듭하면서 일그러진 소송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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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어느 시민단체의 20년 지난주 금요일, 한 자그만 시민단체가 서울 종로의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설립 2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시민단체가 20년을 버텨왔다면 아마도 거기에는 공익에 뜻을 둔 사회적 명망가가 설립자로 있고, 지금쯤이면 조직 규모나 예산도 안정적일 것이라 상상할지 모른다. 이 단체의 상근자는 20년 전에도 지금도 다섯 명이다. 창 없는 좁은 사무실 공간을, 자신들과 유사한 작은 단체들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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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여름이 오고 있다 2022년 8월11일을 돌아본다. 망설이는 마음을 뒤로하고 오후 8시경 어두운 정장 차림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마지막을 위해 홀로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신림동 반지하방에 살다가 폭우로 밀려들어온 빗물에 방이 순식간에 잠겨 도시 한복판에서 황망하게 사망한 가족의 장례식이었다. 세 명의 영정이 나란히 놓여 있던 빈소에는 정치인들의 조화와 노조 조끼를 입은 조문객들이 이 죽음의 맥락을 말해주고 있었다. 봉투에 ‘시민’이라고 적고 헌화한 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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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소소한 존재들의 헌법 지난겨울 한국 사회는 속성으로 헌법을 공부했다. 헌법의 귀퉁이 난제들에 골몰했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생중계를 강의처럼 지켜보았다. 여름마다 장마가 오듯 상처받은 헌법은 이제 개헌론에 직면하고 있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할지, 4년 중임으로 할지를 규정한 법인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누가 임명할지 규정한 법인가? 개헌론은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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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제도의 해커들 해커란 보통 컴퓨터 시스템과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시스템에 침입, 정보를 빼내거나 시스템의 작동을 저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해킹은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프로그래밍 기술, 그리고 고의가 결합한 전문적 행위다. 법체계 역시 컴퓨터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조문 하나하나는 프로그램의 코드들이고, 이 코드들은 논리적으로 발생 가능한 모든 경우를 아우르는 포괄성, 의미의 명확성, 그리고 다른 코드(조문)들과 논리적으로 일치하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조문이 미비하거나, 모호하거나, 다른 조문과 충돌할 경우 프로그램이 오류를 일으키듯이 그 법에 의존해 작동하는 국가 제도도 오류를 일으킨다. 법원이 처리하는 수많은 소송들 가운데 법리 다툼이 있는 소송은 바로 그 오류를 제거해 나가는 사회적 디버깅에 해당한다. 헌법재판은 가장 상위의 디버깅 작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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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분립, 독립, 민주주의 3개월째 이어지는 계엄과 탄핵 시국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권 구성 원리인 삼권 분립, 그리고 작고 강한 독립 기구의 의의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삼권 분립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위한 분업의 원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을 쪼개고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원리다. 그러다 보니 문제 해결 요구가 강해지면 권력의 비효율적 작동을 의도하는 삼권 분립은 늘 흔들렸다. 동시에 삼권 분립은 아이러니하게 대중에 대한 불신에도 기반해 있다. 국가 권력이 한 군데 집중되어 있을 경우 응집력 있는 소수 집단이 등장해 그 전체를 쉽게 장악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계엄 선포권과 해제요구권이 분리되고, 그 위법성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 삼권 분립은 권력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원리지만, 그렇기에 시민은 국가의 자의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삼권 분립은 긴장과 역동으로 가득한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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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마음으로 필사하는 사회계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당시 서구 사회의 변화에 ‘탈신비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주술과 마법의 힘에 의존하고, 인간의 이해를 넘는 신비한 영역을 인정하던 시대를 지나, 무엇이든 설명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합리적·과학적 신념이 퍼져나가던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말이었다. 그가 언급한 관료제는 오로지 합리성과 법에 의해 권위를 확보하는, 신비함이 벗겨진 의사결정 기계다. 베버는 어디까지 옳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