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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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흘러야 강이다 댐은 대체로 수력 발전과 연관되어 있어 뭔가 긍정적인 시설로 생각한다. 댐 건설을 통한 수력 발전이 친환경적인 대안으로 부상한 적도 있다. 그런 시대는 이미 갔다. 거대한 댐뿐만 아니라 작은 댐도 여러 가지 반환경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댐 건설과정에서 생기는 이산화탄소가 문제이고 게다가 메탄도 다량으로 반출된다. 둘 다 ‘기후 위기’에 이바지하는 물질이다. 댐 주변에 생기는 안개 등도 생태계 교란을 일으켜 근처 지역 농사를 망치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가 주도한 4대강 ‘살리기’ 캠페인은 수많은 문제를 드러냈고 중간중간에 세운 일종의 미니 댐인 ‘보’는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여 녹조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펄, 악취, 수질 오염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보 근처 물속에서는 오염수의 지표인 실지렁이와 깔따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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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그 많던 기부금은 어디로 갔나 최근 유명인이 기부금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중에는 거액을 낸 연예인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하춘화, 아이유, 장나라, 션과 정혜영 부부, 김제동, 김장훈, 박상민, 송혜교 등이다. ‘가왕’으로 불리는 조용필도 그동안 모은 재산을 기부한다고 한다. 재난재해 피해자를 돕기 위한 수재의연금 같은 기부금, ‘불우이웃’을 위한 후원, 대학교에 대한 기부금 등은 쉽게 접하는 소식이다(물론 션의 경우는 독특하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집을 마련하는 데 지속해서 주동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은 기부금 용도가 다원화되면서 동물 구조, 미혼모 돕기도 눈에 띄고, ‘독도 알리기’ 같은 활동에 후원금을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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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호국’과 ‘민주’의 정치학 지난 6월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달이며 동시에 ‘호국 보훈’의 달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군부독재 시대에 호국이 민주를 거의 압사시켰던 기억이 생생해서 그렇기도 하다. 지금도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호국’이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떤 도전도 허락하지 않는 성역이었고 그 개념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호국’은 그것이 정권 안보와 중첩되어 있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대통령, 당대표, 국회의원 등에 당선되면 그다음 날 당선자는 ‘호국’의 상징인 국립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물론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보훈’의 내용이 충실해졌다(내게는 일단 ‘호국’ 하면 1970년대, 1980년대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교련과 모의 수류탄 던지기 등의 훈련을 통하여 사회를 군사주의로 포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또한 준군사조직으로 전락한 ‘학도호국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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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뭉치면 산다? 얼마 전 열린 여당 제22대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똘똘 뭉치자” “단일대오를 형성하자” 등의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총선거 패배 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치에 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 모임에서 여전히 ‘하나로 뭉치자’라는 담론이 지배적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민주주의나 다원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단계에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전근대적 풍토와 전체주의/권위주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통합’이나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같은 구호를 반복하고 있다. 분열의 언어는 즉각 지탄받기 마련이고 통합의 언어, 화해의 언어는 바로 주목을 받는다(때로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보수언론도 ‘국론 분열’을 개탄하며 비주류 의견을 억압하고 무슨 ‘내전’이 벌어질 것처럼 은근히 시민들에게 겁을 준다). 개별성 및 내부 균열에 따른 소수 의견 존중, 수평적인 관계, 다양한 이견(異見)의 존재와 그것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 등이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의 모습일 텐데 말이다. ‘단일대오’는 요즘 군대나 집단 스포츠에도 어울리지 않는 어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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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전쟁에 반대할 자유 유학 시절에 강의 조교 월급만으로 부족해 기숙사 부사감을 한 적이 있다. 다양한 사건을 경험했지만 지금도 생생한 것은 누군가가 어떤 유대계 학생 방문에 ‘나치 문양’(Hakenkreuz)을 붙여놓고 달아난 일이다. 소문은 몇 시간 만에 대학 전체로 퍼졌다. 학교 당국에서는 절차에 따라 그것을 붙인 학생을 찾아내 바로 정학시켰다. 표현의 자유가 잘 보장되는 미국 사회지만 학교는 유럽의 프로축구에서처럼 인종차별적인 일에 대해서는 좀 엄격한 편이다. 그래도 그 학생은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히틀러 경례’를 형사 처벌하는 독일에서라면 최소한 벌금형은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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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새것 콤플렉스’ 문학평론가/불문학자 고(故) 김현(1942~1990)은 ‘새것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새것이라면 무조건 바로 수용해버리는 한국 사회의 풍토에 대한 지적이었다. 테크놀로지건 학문적 경향이건 문화이론이건 새로운 것이라면 별다른 고민이나 성찰 없이 즉각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자생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외부의 힘으로 식민화된 처지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서구의 기술산업 문명, 좁게는 일본을 통해서 이식된 외국의 문물에 대한 ‘자발적인’ 감탄과 자조적인 자기비하가 원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 선구적인 ‘조선’ 지식인들은 서구/일본 제국주의의 자장 안에 흡수되면서 오래된 것, 낡은 것, 전통적인 것은 모두 버려야만 우리가 근대국가 및 근대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새것 콤플렉스’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압도적인 경향이 아니다. 낡은 것, 오래된 것을 중시하는 흐름도 있고 서구 중심적 이론에 맞선 탈식민주의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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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정치 과잉과 정치 부족 한국 사회는 늘 정치에 관한 관심으로 꽉 차 있다. 선거철이 되면 몇배로 증폭된다. 어떻게 보면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다. 내 주변에서도 정치 얘기만 나오면 특정 정치인들의 계보와 학연, 지연, 경력 등에 대해서 줄줄 읊어대는 사람들이 천지다. 명색이 정치학자인 내가 끼어들 새도 없이 자기들끼리 정치 논쟁하느라 바쁘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구조적인, 역사적인 이해력은 거의 없다. 사실 나는 글로벌 정치나 녹색 정치 등에 집중해서인지 정치인들에 관한 세세한 사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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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운동권’ 때리기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이 비극적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종로에 있는 TOEFL 학원에 등록했다. 어느 날 거기서 서클(동아리) 후배와 마주쳤다. 나와 그는 눈인사만 한 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계엄령하 살벌한 상황에서 서울 뚝섬 근처에서 20여명의 선후배가 시위하다가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1980년이다. 지난 2월 초부터 갑자기 ‘운동권’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여당과 극보수 언론이 이 기회에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한다고 연일 운동가 출신 야당 정치인을 공격한다. 노리는 것은 ‘운동권’ 전체에 대한 폄하인 듯하다. 사실 따져보면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묘한 의미를 내포한다. 뭔가 특수한 부류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전문시위꾼’으로 매도하기 딱 좋다. 운동가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갈라치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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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오디션과 이데올로기 한국 사람들은 정말 노래를 좋아하는 듯하다.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흔히 보는 게 가수 오디션이다. 게다가 다 죽어가던 어떤 보수 방송의 연예 분야가 트로트 가수 오디션을 통해서 기사회생하자 그에 질세라 몇몇 방송들이 기를 쓰고 흉내를 내고 있다. 이런저런 음악 오디션에 참가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몇십만명을 넘어선다니 애청자들까지 합치면 한국인들 몇백만명이 가수 뽑기에 몰입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6·25전쟁 때도 남북한 군인들이 낮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도 밤이면 맹렬하게 가무를 즐겼다는 증언을 접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