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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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다시 만난 세계-‘헬!조선’에서 ‘광장의 파토스’로 순간 멘붕에 빠졌다. 고등학교라 생각했는데, 강의 며칠 전 중학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고딩’이나 ‘중딩’이나 그게 그거 아냐?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교육 현장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쫌! 아는 이들은 즉각 이렇게 반응한다. ‘아휴! 어쩌다가?’ 코로나 이전, 한 10여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고등학생들을 만났다. 그때 본 교육 현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시설과 환경은 최고 수준이었지만 교실의 활기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활발한 교감을 기대하고 갔다가 곧잘 기를 완전히 빼앗긴 채 돌아오기 일쑤였다. 1987년 민주항쟁 때 목놓아 외친 구호 중 하나가 ‘교육민주화’였다. 그때 이런 교실의 풍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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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양자역학과 마음의 혁명 직업이 고전평론가다 보니 하는 일이 주로 강의와 세미나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줌이 일상화하면서 시공간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등과도 연결되었다. 시간의 폭도 넓어져서 이른 새벽, 늦은 저녁에도 부담 없이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 이미 예견된 세상이기도 하다. 손바닥 안에 세계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세상 모든 곳과 동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히 원더풀 월드다! 이런 마법의 원천은 양자역학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특수 상대성 원리’가 발견되었고, 그와 동시에 양자역학의 세계가 열렸다. 하여, 과학계에선 1905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17세기 이래 서구문명을 지배해온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이 전복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원리들이 일상을 온통 장악하게 된 것은 SNS, 그리고 줌을 통해서다. 코로나가 ‘결정타’였다. 대체 양자역학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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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빚’에 중독된 시대 나랏빚과 가계빚이 3000조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조’라는 단위도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거기에 또 3000이 붙으니 흡사 ‘신화적 상징기호’처럼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빚은 도처에 퍼져 있다. 부자는 부자라서 서민은 서민이라서,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은 또 중년대로. 결국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물적 토대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뜻인데, 생각만으로도 왠지 서글퍼진다. 빚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빚에 담긴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래를 당겨 쓰는 것. 다시 말해 현재의 역량으론 실현 불가능한 물질적 혜택을 ‘지금 당장’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몫을 점유하는 것. 질량불변의 법칙상 내가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누린다면 누군가는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전자가 시간적 엇박자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관계의 어깃장에 해당한다. 둘 다 삶에 치명적이다. 먼저 미래를 끌어다 살게 되면 시선이 늘 ‘저 먼 곳에’ 가 있게 된다. ‘지금 여기’의 현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래서인가. 채무자들 가운데 빚을 차근차근 갚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계속 돌려막기를 하거나 아니면 그저 한방에! 해결되기만을 고대한다. 또 타인의 몫을 가로채는 데 길들여지면 타자와의 교감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부채 콤플렉스’가 신체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타나는 병적 증상이 바로 허언증 혹은 거짓말이다. 빚을 돌려막기하다 보면 말도 계속 ‘돌려막게’ 되고, 그것이 야기하는 혐오감은 주변관계를 다 초토화시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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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자립하고(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不惑). 오십에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이 되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 주지하듯, 공자가 구현한 생애주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생애주기도 있다. 학습기(스승을 찾아 베다의 진리를 배우는 시기), 가주기(결혼과 직업을 통해 사회적 다르마(의무)를 실행하는 시기), 임서기(숲으로 가서 명상과 성찰에 들어가는 시기), 유랑기(천하를 유행하며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 이것은 아슈라마, 곧 인도의 힌두교가 제시하는 생애주기다. 공자와 힌두교 모두 BC 5세기 전후에 등장한 영적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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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백수는 미래다! #1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어려웠다. 대기업, 언론사같이 ‘잘나가는’ 직종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책도 읽고 저자들도 만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출판계를 지망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꽤 규모 있는 출판사에 들어갔다. 경제적 자립은 가능했으나 업무가 너무 지루하고 따분했다. 결국 8개월 만에 ‘때려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2 대학을 졸업하고 ‘잘나가는’ 회사에 들어갔다. 20대에 연봉 5000만원을 받을 정도로 성공한 청춘이었다. 문제는 회사가 잘될수록, 능력을 인정받을수록 야근이 잦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출구를 찾고자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고 글쓰기를 하면서 마침내 내면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죽고 싶어요!” 결국 청년은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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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거짓말’의 정치경제학 가족들은 왜 그렇게 비밀이 많을까? 드라마를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대부분 은밀한 사연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이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겉으로는 지극히 애틋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속이고 속인다는 것, 이것이 가족드라마의 기본설정이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잘 갖추고 있으면 ‘주말’드라마, 다소 거칠게 진행되면 ‘일일’드라마다. 진행패턴은 대체로 비슷하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스위트 홈’에 어둠의 그림자가 들이닥치고 각종 비밀들이 폭로되면서 그동안의 행복이 다 가짜였음이 판명된다. 충격과 배신감, 분노와 갈등으로 파국을 겪지만 우여곡절 끝에 일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급마무리! 배우들의 비주얼과 탁월한 연출효과 등에 압도되다 보면 이 비극의 배후에 ‘운명의 장난’ 혹은 ‘신의 저주’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사건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관통하는 건 결국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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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출산율과 독서율의 ‘기묘한’ 평행이론 최근 한 유튜브 채널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가 ‘출산율 저하와 인문학의 위기’였는데, 처음엔 좀 뜨악했다. 저출산이 심각한 건 알겠는데 그게 인문학의 위기랑 어떻게 연결되지? 한데,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발표한 자료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세계 최하였다. 직업의 가치를 묻는 항목 역시 마찬가지. 이 자료들을 하나로 엮어보면, 관계나 활동은 됐고, 오직 ‘한방’으로 큰돈을 챙겨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로 정리될 수 있겠다. 대략 감은 잡았지만 막상 수치로 확인을 하니 좀 당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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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바보야, 문제는 ‘인복’이라니까! 고전평론가로 오랫동안 전국 곳곳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시대의 변화상을 다방면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예컨대, 20세기엔 노동자들이 야학을 했지만, 요즘은 CEO들이 새벽에 인문학을 한다. 또 이전엔 남성들이 지식을 독점했지만 요즘 모든 인문학 강연장의 90%는 여성이다. 여성의 뇌는 감성편향이라 이성적 사유는 좀 어렵다고 했던 담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장 놀라운 변화는 청년들의 무기력이다. 중고생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기가 어려울 지경이고, 대학생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 짓눌려 있다. 이 청년들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해온 부모와 교육당국자들은 이런 광경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좋은 나이에, 그 멋진 캠퍼스에서,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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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가속노화’ 시대의 기묘한 ‘세대공감’ 나는 고전평론가다. ‘고전의 지혜’를 현대인의 ‘삶의 현장’과 연결시켜 주는 전령사라는 뜻이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냥 백수다. 또 사회적인 범주로는 60대 독거노인이다. 좀 처량해 보이지만 나름 ‘명랑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1인 가구가 대세가 되었고, 그것도 전 연령에 걸쳐 있다고 한다. 그럼 이렇게 분화된 1인들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것은 정치경제학을 넘어 인류학적 과제에 속한다. 이런 차원에서 일단 내 주변의 상황부터 추적, 관찰을 시도해 보았다. 나의 일상은 주로 남산 아래 필동에 있는 공부공동체(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이뤄진다. 감이당은 6080세대가, 남산강학원은 2030세대가 주를 이룬다. 세대 간 장벽이 두꺼울 법도 한데, 현장은 의외로 잘 ‘통’한다. 채널은 대략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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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영화 ‘파묘’-전지적 ‘귀신’ 시점 실로 ‘오만년’ 만에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 이후엔 영화관에 가는 게 영 낯설어진 탓이다. 해서 이번엔 600만명을 통과할 즈음 직관을 감행했다. 눈치챘듯이, <파묘> 이야기다. 일단 오컬트 장르라고 하는데, 별로 무섭지 않았다. 풍수와 음양오행, 무속 등 동양의 오래된 서사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기괴한 일들을 수시로 겪다보니 웬만한 충격에는 덤덤해진 탓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공포와 전율을 쥐어짜기 위해 쉼없이 몰아치는 서양식 오컬트와는 꽤 달랐다. 그래서인가. 개봉 초부터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MZ무당, 항일코드, 세키가하라 전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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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명심탐구 푸바오에 대한 명랑하고 심오한 탐구 다시 봄이다. 하나 마음은 영 심란하기만 하다. 도처가 전쟁에 기후재앙이고, 영끌과 우울증, 몰락과 퇴행의 언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정녕 몰랐다. 포스트 코로나가 이럴 줄은. 그 정도의 전 지구적 재난을 겪었으면 문명의 방향이 바뀔 줄 알았다. 욕망에서 교감으로! 소유에서 자유로! 완전 망상이었다. 그렇다고 새삼 허무에 빠지자니 자존심이 영 허락하질 않는다. 하여,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명랑하게’ 잘 살아보기로. 그것이 대단한 저항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와 나의 벗들의 울적함을 덜어주는 효과는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