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
돌봄주거활동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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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실버스테이와 동네스테이 실버스테이는 ‘고가의 실버타운과 저소득층용 고령자복지주택 사이 사각지대에 있는 중산층 고령자를 위한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이다. 정책자료와 기사를 읽다 보면 몇호를 공급할지, 어떤 시설을 갖출지에 대한 설명은 넘쳐난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노인은 어떤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실버스테이 정책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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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실버타운은 죄가 없다 매일 아침 고령자 주거 관련 뉴스를 모니터링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실버타운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뉴스 빈도만 보면 대한민국의 고령자 주거는 실버타운밖에 없는 것 같다. 전 국민이 노후엔 실버타운에 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오는 듯한 분위기다. 과연 이게 정상일까. 현실은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국민은 나이 들어도 지금 살던 지역과 집, 익숙한 관계 속에서 늙어가기를 원한다. 이른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의 시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7.2%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반면 “식사 및 생활편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노인전용주택(실버타운 등)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응답은 4.7%에 불과하다. 즉 내가 살아온 동네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다. 그런데 언론이 보여주는 노후의 모습은 지나치게 편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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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살던 곳에서 죽을 수 있으려면 통합돌봄의 핵심은 ‘지역사회 계속 거주(aging in place)’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의료와 돌봄의 통합이 아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 개개인의 욕구에 맞춰 주거, 의료, 요양, 생활지원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누리며 살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에는 빠진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 살던 곳에서 계속 살 수 있다면, 삶의 마지막도 그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통합돌봄은 ‘살던 곳에서 맞이하는 죽음(dying in place)’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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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나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려라 죽음 준비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관계는 의외로 가족이다. 우리는 노년의 부모를 걱정하고 여러모로 챙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지 못한다.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이다. 죽음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고, 부모에게는 불효처럼 느껴질까봐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족은 이 대화를 끝까지 미룬다.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사회 분위기는 점점 커지고 있지만, 가족 간에는 침묵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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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가장자리에 서다 나이 50이 넘어 뒤늦게 시작한 활동가 생활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다. 전업 생활자와 다르게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매년 2~3월은 총회 시즌이다. 올해는 주거 영역에서의 역할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웰다잉과 돌봄 영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6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내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티 나지 않는 가장자리에서 노년을 준비하며 시민의 삶을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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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요양사업 규제의 방향전환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요양사업 민간 참여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논쟁이 다시 거세다. 시설이 부족하니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규제를 풀면 돌봄의 질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맞선다. 이 논쟁에서 자주 소환되는 비교 대상이 일본이다. 일본은 민간이 활발하게 참여하는데도 시스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민간 참여를 강조했지만, 그 설계 방식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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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경조사비 기본 10만원 시대 또? 휴대폰 화면 위에 뜬 경조사 안내(모바일 부고 및 청첩장)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복잡하다. 겨울이 되면 노인 사망이 급증하기에 부고가 잦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겠다는 마음은 가볍고 묵직한 부담이 짓누른다. 이번달에 몇건이지, 지난번엔 얼마를 냈더라, 안 가면 서운해할까.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지난달엔 경조사비 지출 합계 금액이 100만원을 훌쩍 넘었다. 국민연금 이외 별다른 고정 소득이 없는 내게 경조사비가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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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애도에 대하여 추모 중심의 대안 장례 기획자 과정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마지막 순서로 팀별 추모식이 열렸다. 우리 팀은 ‘비혼 여성 노인의 마을 공동체 추모식’을 준비했다. 팀원들이 고인을 어떻게 기억할지, 어떤 관계를 드러낼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의 죽음도 동네에서 이렇게 거두어진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겠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그래서 각기 다르게 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이후의 풍경은 늘 비슷하게 정리된다. 장례 절차, 조문 방식, 애도의 기간과 태도까지 사회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형식적 틀 안에서 슬픔을 처리하라고 요구한다. 삶은 개인의 것이면서도 죽음은 집단의 일이 되고, 애도는 어느새 사회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표현 가능한 감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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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괜찮아요~ 어느 휴일, 아내와 동네 산책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아내는 순두부찌개, 나는 황태콩나물국밥. 아내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고 잠시 후 종업원이 와서 내 메뉴가 주방에 잘못 들어갔다며 죄송하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좀 늦어도 괜찮다고 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기다리는 동안 아내의 밥을 한 숟가락씩 슬쩍슬쩍 훔치고 있는데, 갑자기 떡갈비를 내어 온다. “죄송해서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덕분에 여유롭고 푸짐하게 밥을 먹고 계산하는데, 또 한 번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한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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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어디서 죽을 것인가 노후 주거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어디서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임종. ‘사망하기 직전’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의미하며,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녀가 곁에서 지켜보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오늘날 의료와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임종 과정은 상상하기 힘들다. 의료 기술의 발전, 병원과 시설 중심의 돌봄체계, 공동체 약화, 시장 논리, 죽음 회피라는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결과다. 특히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죽음조차 관리·치료·연명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임종 과정이 자연스러운 ‘삶의 마무리’가 아닌 ‘의료적 사건’이 된 것이다. 이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분리되어 병원·요양시설 등 전문 공간에서 상품과 서비스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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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지팡이 짚고 가는 동네 사랑방 1929년생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짧은 거리는 걸을 수 있고 인지능력도 좋지만,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힘들다. 활기찬 노년을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과 달리, 집 근처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지루함과 무력감을 느끼신다. 차선책으로 데이케어센터의 문을 두드렸지만 ‘장기요양등급’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어머니처럼 공적 돌봄 서비스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온전히 혼자 사회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계선 위 노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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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나이 들어 살고 싶은 ‘집’ 노년의 삶은 주거·건강·경제력·사회적 관계와 활동 등 다양한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모든 조건을 넘어 중요한 것이 익숙한 공간과 사회관계망 안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다. 말하자면, 노년의 존엄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간과 관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최근 노후 주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실버타운과 요양원이라는 양극화에서 벗어나 중산층도 이용할 수 있는 노인주거 유형의 다양화와 공급 확대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금의 노인주택과 요양시설은 아프고, 외롭고, 더는 일상생활을 감당하기 힘든 노인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곳이니 시설이 아닌 ‘내 집’에서 거주하며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지역사회 계속 거주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