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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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요양사업 규제의 방향전환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요양사업 민간 참여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논쟁이 다시 거세다. 시설이 부족하니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규제를 풀면 돌봄의 질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맞선다. 이 논쟁에서 자주 소환되는 비교 대상이 일본이다. 일본은 민간이 활발하게 참여하는데도 시스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민간 참여를 강조했지만, 그 설계 방식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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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경조사비 기본 10만원 시대 또? 휴대폰 화면 위에 뜬 경조사 안내(모바일 부고 및 청첩장)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복잡하다. 겨울이 되면 노인 사망이 급증하기에 부고가 잦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겠다는 마음은 가볍고 묵직한 부담이 짓누른다. 이번달에 몇건이지, 지난번엔 얼마를 냈더라, 안 가면 서운해할까.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지난달엔 경조사비 지출 합계 금액이 100만원을 훌쩍 넘었다. 국민연금 이외 별다른 고정 소득이 없는 내게 경조사비가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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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애도에 대하여 추모 중심의 대안 장례 기획자 과정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마지막 순서로 팀별 추모식이 열렸다. 우리 팀은 ‘비혼 여성 노인의 마을 공동체 추모식’을 준비했다. 팀원들이 고인을 어떻게 기억할지, 어떤 관계를 드러낼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의 죽음도 동네에서 이렇게 거두어진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겠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그래서 각기 다르게 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 이후의 풍경은 늘 비슷하게 정리된다. 장례 절차, 조문 방식, 애도의 기간과 태도까지 사회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형식적 틀 안에서 슬픔을 처리하라고 요구한다. 삶은 개인의 것이면서도 죽음은 집단의 일이 되고, 애도는 어느새 사회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표현 가능한 감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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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괜찮아요~ 어느 휴일, 아내와 동네 산책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아내는 순두부찌개, 나는 황태콩나물국밥. 아내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고 잠시 후 종업원이 와서 내 메뉴가 주방에 잘못 들어갔다며 죄송하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좀 늦어도 괜찮다고 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기다리는 동안 아내의 밥을 한 숟가락씩 슬쩍슬쩍 훔치고 있는데, 갑자기 떡갈비를 내어 온다. “죄송해서요. 서비스로 드릴게요.” 덕분에 여유롭고 푸짐하게 밥을 먹고 계산하는데, 또 한 번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한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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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어디서 죽을 것인가 노후 주거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어디서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임종. ‘사망하기 직전’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의미하며,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녀가 곁에서 지켜보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오늘날 의료와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임종 과정은 상상하기 힘들다. 의료 기술의 발전, 병원과 시설 중심의 돌봄체계, 공동체 약화, 시장 논리, 죽음 회피라는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결과다. 특히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죽음조차 관리·치료·연명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임종 과정이 자연스러운 ‘삶의 마무리’가 아닌 ‘의료적 사건’이 된 것이다. 이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분리되어 병원·요양시설 등 전문 공간에서 상품과 서비스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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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지팡이 짚고 가는 동네 사랑방 1929년생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짧은 거리는 걸을 수 있고 인지능력도 좋지만,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힘들다. 활기찬 노년을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과 달리, 집 근처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지루함과 무력감을 느끼신다. 차선책으로 데이케어센터의 문을 두드렸지만 ‘장기요양등급’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어머니처럼 공적 돌봄 서비스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온전히 혼자 사회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계선 위 노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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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나이 들어 살고 싶은 ‘집’ 노년의 삶은 주거·건강·경제력·사회적 관계와 활동 등 다양한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모든 조건을 넘어 중요한 것이 익숙한 공간과 사회관계망 안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다. 말하자면, 노년의 존엄한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간과 관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최근 노후 주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실버타운과 요양원이라는 양극화에서 벗어나 중산층도 이용할 수 있는 노인주거 유형의 다양화와 공급 확대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금의 노인주택과 요양시설은 아프고, 외롭고, 더는 일상생활을 감당하기 힘든 노인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곳이니 시설이 아닌 ‘내 집’에서 거주하며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지역사회 계속 거주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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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아니지만 비슷한 이야기다. 2025년 한국의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과 1기 신도시인 고양시 일산 이야기다. 두 도시 모두 초고령사회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 풍경은 자못 대조적이다. 우연한 기회에 강남 재건축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을 돌아보았다. 유튜브에서 “우리 아파트에 살면 실버타운 갈 필요 없다”고 자랑하던 어느 재건축 조합장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직접 가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여느 실버타운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고 호텔식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 참가자 모집 홍보문이 여러 장 붙어 있다. 20% 남짓 낮은 건폐율로 널찍하게 확보한 지상부는 근사한 조경으로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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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텃밭에서 배우는 공동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공동체의 허상을 좇는 사람도 많다.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세상’ ‘나눔과 배려’ 같은 그럴듯한 말의 뒤에 개인적 욕망을 감춘 이들. 말은 ‘우리’를 향하지만, 속내는 ‘나’를 향한 것이다. 사실은 자신이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공동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가끔은 그럴듯한 자기 말에 스스로 취해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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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나는 어떤 노인이 될까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이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초고령사회 진입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늙음을 화두 삼아 새삼 분주해졌다. 다양한 주제의 행사장마다 사람들로 붐비고, 각종 대책과 담론이 쏟아진다. 그런데 정작 늙음, 노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는 말, 심지어는 ‘장수의 재앙’이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쓰인다. 빈곤, 질병, 고독, 무위(할 일 없음)로 요약되는 노년의 4대 고통. 그래서 흔히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무섭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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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지키자, 국민연금 “고객님은 수급권 확인 대상자이오니, 아래 담당자에게 꼭 연락주시어 수급권 확인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국민연금공단에서 온 우편물을 열어보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수급권 확인 대상자? 왠지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님이 어머님 맞으세요?” “네.” “같이 사는 거 맞으시죠?” “(당연하지) 네.” 담당자는 어머니와 직접 통화하는 걸 원했고, 어머니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또렷이 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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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왜들 그리 남의 나이를 궁금해하나 모르겠어.” 어머니께서 잔뜩 기분이 상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제 90대 중반을 지나 100세를 향해 가는 어머니는 어디를 가도 최고령자이고, 가는 곳마다 당신의 나이가 화제가 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조금만 친해지면 형님, 동생이고 처음 보는 이에게도 이모, 삼촌, 어머님, 아버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정작 나이 확인은 복잡하다. 음력, 양력 생일이 다르다. 누구는 ‘빠른 ○○년’이라 하고 또 누구는 호적이 잘못됐다고 한다.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입학 시기를 정하고 만 나이 기준을 법으로 도입했지만, 나이에 따른 서열문화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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