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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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드림시커 얼마 전 생일에 엄마가 갖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엄마가 재고용 되는 거.” 엄마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생활 지원사였고, 그와 같은 국가 일자리는 1년에 한 번씩 고용을 갱신한다. 그의 운명은 곧 그에게 통보될 예정이었다. 그건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선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낮게 웃었다. “야, 말도 꺼내지 마. 나 덜덜 떨고 있으니까.”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엄마는 재고용이 아니라 추워서 떨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시골의 추위는 매섭고, 기름보일러를 한 번 채우는 값은 60만원이다. 그것만은 절대 변함없는 한 가지 진실이었다. 우리는 자주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기름값의 신이시여. 저희에게 낼 돈을 주소서. 기도는 전해지지 않았고, 엄마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이가 너무 많은가 봐.” 꿈에서 깬 사람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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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드라이브 마이 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엄마의 얼굴이다. 안방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비상계엄령 선포됐대.” 엄마는 웃느라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알아.” 그러곤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웃음이 나와?” “웃음만 나와.” 그 웃음소리가 집 안에 비상하게 울려 퍼졌다. 12월3일의 엄마는 이른 저녁부터 졸음이 몰려왔다. 몸이 축 처지고 무거운 것이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잠이 든 엄마를 깨운 것은 옆집 이모의 전화였다. 소식을 들은 그때부터 터지기 시작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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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복싱핑을 그리며 나는 시골 학교의 보조 교사다. 내 고객님들은 초등학생이며, 그중에서도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다. 나는 그런 그들을 도와줄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세상을 따라가기 어려워하는 어른이다. 나는 아침마다 분모와 분자를 모르는 5학년 친구 옆에 앉는다. 친구는 내가 오면 옆자리를 정돈하며 ‘내 선생님 왔다’라고 말한다. 내가 “이것이 분모고 이것이 분자야”라고 말한 뒤 “무엇이 분모라고?” 물으면 그는 웃는다. 그렇게 수줍게 웃는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발그레한 볼이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것은 ‘모른다’라는 뜻이다. 서울 어딘가에는 유치원 때 이미 한글을 떼고 영어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충북 어딘가에는 5학년임에도 한글만 보면 속이 메스꺼워지는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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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소가 우는 마을 소가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소스라치듯 몸을 일으켰다. 사이렌처럼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매 하는 평범한 울음이 아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생명이었지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온몸이 부서지라 외치는 피맺힌 절규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고, 수백 마리가 하나 되어 죽을 힘을 다해 울고 있었다. 듣고만 있어도 내 몸이 절망으로 울리는 듯했다. 뺨이라도 맞은 듯 볼이 얼얼했다. 불이라도 났나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을 전체가 절망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산과 들이 말없이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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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테무 아줌마 어느 무더운 날 옆방 아주머니(엄마)와 밥을 먹는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그의 세찬 목울대가 시선을 끌었다. 그는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기실 자랑을 하고 있었다. 내 컵 좀 보라고, 새끼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뭐야, 그게.” 아줌마는 대답 대신 컵을 내밀었다. 그것에 손이 닿자마자 놓쳐버렸다. “읏, 차!” 내동댕이쳐진 컵은 바닥을 도르르 굴러갔다. 아줌마는 하나 놀라는 기색 없이 그것을 주워 들었다. “얼음컵이지.” 망치처럼 그것을 식탁에 쾅쾅 내리쳤다. “어떤 것이든 즉시 시원해지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능숙한 손짓으로 컵을 까뒤집어 각얼음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얼음컵이자 얼음 트레이였던 거다. 감탄과 무관심에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말했다. “1300원.” 유유히 방으로 퇴장하는 뒷모습에게 물었다. “어, 어디서…?” 문지방 위에 서서 그가 입술을 오므렸다. “테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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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스님 우리 만나요 이것은 엄마가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을 뵙고 온 이야기다. 아빠는 나이 50을 목전에 두고 엄마와 이혼했다. 그리고 스님이 됐다. 할머니는 종종 전화를 걸어왔다. “에미야, 아쉬울 것 있냐. 너도 절에 가서 공양주로 일해라.”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엄마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이후로도 쭉 무교였고 절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골로 내려갔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구름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사는 대신 딱 엄마 혼자 살기 좋은 집을 지었다. 안방 구석엔 셋이 찍은 가족사진을 걸었다.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컬러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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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미래를 구원하는 사람 엄마가 생활보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매일 작은 경차를 타고 시골의 좁은 길을 따라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간다. 그중엔 일주일에 한두 번, 엄마가 찾아가는 것이 사람과의 유일한 접촉인 사람들도 있다. 요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것은 아니니 그나마 상황이 나은 사람들이다. 엄마는 그들의 냉장고에 반찬은 있는지, 보일러가 고장나지는 않았는지, 집 안이 어지럽지는 않은지 생활 전반을 살핀다. 그리고 마주 앉아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아침은 드셨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거리는 없는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