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연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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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전설 정영수씨의 경제일기 돼지고기 한 근 35전, 인조견 여섯 자 1원32전, 설탕 한 근 35전, 명태 한 쾌 1원, 탁주 한 말 60전. 누님이 아파 점쟁이에게 건넨 복채 10전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는 장부가 있다. 전북 진안의 정영수 어른이 3대에 걸쳐 이어온 생활의 기록, 바로 ‘경제일기’다. 정 어른이 지켜온 장부는 단순한 가계부가 아니다. 부친 회갑 때 들어온 선물을 적은 ‘물선기’에는 국수 한 봉, 돈 100원, 생꿩 한 마리, 유기 식기 한 벌, 고무신 한 켤레 등이 줄지어 있다. 가장 흔한 선물은 국수였다고 한다. 살림 형편에 맞추어 성심껏 보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머슴들의 새경을 기록한 ‘고군기’, 품일꾼들의 삯을 적은 ‘고용기’, 돈의 흐름을 정리한 ‘치부책’, 각 도와 고을 이름을 정리한 지리지에 토지대장과 축문까지 생활의 거의 모든 단면이 담겨 있다. -
시간의 전설 왜 사진인가 사진은 누구나 손가락으로 셔터만 누르면 찍을 수 있다. 어쩌면 그 단순함 때문에 내가 사진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단순한 촬영과 진정한 사진 사이엔 깊은 간극이 있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찾는 이가 적다”(마태복음 7장 13·14절)고 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다. 사진의 길 또한 닮아 있다. 화려한 명성을 좇는 길도, 진실을 좇아 현장을 떠도는 길도 결국은 각자의 선택이며 삶의 태도다. -
시간의 전설 별 하나의 아이 요즘엔 사람을 상대로 사진 작업을 하는 일은 여러 제약으로 쉽지 않다. 특히 아이들을 찍을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나는 학교 교육제도에 관심이 있어, 아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놀고 자라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운 좋게 학교와 학부모의 허락을 받아, 별처럼 소중하고 반짝이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집집마다 여섯, 일곱 아이가 북적였다. 밥 세끼조차 해결하기 어려워 굶어 죽거나 방치돼 병들어 죽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만 한 살을 무사히 넘긴 아기의 돌잔치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생존의 기념식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은 늘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인구가 끝없이 늘다 보면 언젠가 지구가 팽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
시간의 전설 삼천 원의 식사 ‘삼천 원의 식사’ 사진을 찍고 다닐 때, 3000원은 시골 장터국수나 수제비 정도의 값이었다. 시골 장터에서 옥수수 뻥튀기하러 나온 할머니와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드시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차례가 오면 뻥튀기해서 그냥 집에 간다고 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늘어선 뻥튀기 줄이 길어서, 그 시간에 국숫집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따라왔다. 잔치국수가 나오자, 할머니는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양푼을 들고 뜨끈한 국수 국물을 마시며 “맛있네”라고 중얼거렸다. -
시간의 전설 “기왕에 핀 꽃잉께” 문화는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가, 아니면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가. 가끔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흔히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배가 불러야 문화니 예술이니 할 여유도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배가 부르다고 모두가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 문화나 예술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품격 있는 인격체라 보기도 어렵다. 우리가 익히 아는 상류층 부인들의 예술 활동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문화 활동’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허세에 불과한 것일까.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인 체하며 벌이는 그 행위들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때로는 얼마나 민폐인지. -
시간의 전설 모래톱 영산강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안 것은 강에 모래톱이 없다는 것이다. 잘 가꾸어진 산책길과 자전거길, 그러나 강물에 닿을 수는 없었다. 수풀이 우거지고, 그 속을 한참 헤치고 들어가면 강물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턱이 있어 손으로 만질 수 없다. 어린 시절 모래톱 위로 달음질쳐 가서 강물에 풍덩 몸을 담고 물놀이하던 강변은 찾기가 어렵다. -
시간의 전설 오마주와 짝퉁 오마주는 프랑스어로 ‘존경’ ‘경의’를 의미하며, 예술에서 원작자의 작품을 참조하거나 재구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에 짝퉁은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은 2009년 5월23일이다. 나는 그날 시골에서 전구를 사려고 철물 가게에 들렀다. 철물 가게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있었다. 화면에서 속보로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알리는 뉴스가 나왔다. “할아버지, 저게 무슨 소리예요?”라고 물었다. “글씨, 나도 무슨 소린지 모르것네요”라고 할아버지도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느 집 담장에 빨간 장미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그 뒤로 매년 장미가 피는 오월이 오면 그의 선한 미소가 그리워진다. -
시간의 전설 매몰(埋沒) 어린 시절 같은 마을, 혹은 이웃 마을 사람들 사이에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마을에는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반란군, 빨갱이, 경찰 그런 낱말들만 들렸고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증오는 자식대까지 물림을 받아 서로 치고받고 했다. -
시간의 전설 횡재를 불러오는 힘 서민 생활에서 뜻밖의 재물을 얻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뜻밖의 손실을 보는 경우가 더 허다하다. 그래서 실낱같은 뜻밖의 행운을 바라며 겨우 복권이나 한 장씩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횡재는 꼭 재물에만 한정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 윤석열의 횡포가 극한으로 치달을 때, 조국혁신당은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를 냈다. 그 말에 실감하는 많은 국민조차 그것은 허무한 바람이라고 여겼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서슬 퍼런 제왕적 대통령을 어떻게 끌어내린단 말인가. -
시간의 전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시 ‘초혼’의 첫 연이다. 이 시 구절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상급 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밤마다 술에 취해서 이 시를 읊으며 동구 밖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오곤 했다. 아버지는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었다. 아버지는 다 큰 동생을 병으로 잃고서야 그동안 야망도 없이 천하태평으로 살던 생활을 접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됐다. 당시 문맹이 많은 시절에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영향을 받아 산간벽지에 중학교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상당한 재력가였지만 경제 관념이 투철해 그 일에 반대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하나 남은 아들에게 목숨을 걸었다. 아들이 하는 일에는 무엇이든지 힘이 되고자 했다. -
시간의 전설 인간, 그 서늘한 슬픔 ‘인간의 문화는 글자의 시대보다 말의 시대에서 더 발전했다’라는 말을 도올 선생에게서 듣게 되었다. 이 말은 문자의 형성을 통해 인간의 문화가 발전해 왔으리라는 당연한 생각에 적어도 한 번쯤 의문을 품게 한다. 우리는 그동안의 학습효과에 의존해서 너무 틀에 박힌 생각만을 하는 것은 아닐까. 박물관에 들어가면 맨 처음 마주하지만, 그냥 지나치게 되는 빗살무늬토기에 관해서 언제부턴가 관심을 두게 되었다. 토기나 옹기에 대수롭잖은 듯이 그려진 그 무심한 흔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도공의 단순한 해찰이었을까? 아니면 주술적인 의미나 종족 혹은 지역과 시대적 표시 같은 것이었을까? 이 미묘한 작은 표시나 흔적에 현대 추상화 같은 미적 요소가 담겨 있음이 흥미롭다. -
시간의 전설 햇볕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 햇볕이 강한 날 그림자가 짙다는 것은 반대로 그림자가 강한 날 햇살이 좋다는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두 사람이 그림자를 포개며 ‘이러면 그림자 색이 더 짙어질까?’ 하며 그림자를 서로 겹쳐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볕이 흐린 날이라면 ‘그렇다’ ‘아니다’라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생각을 해보며 산책길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의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슬쩍 겹쳐보았다. 그림자 농도는 변함이 없었다. 한 사람의 슬픔에 다른 사람의 슬픔이 더하더라도 슬픔에는 차이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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