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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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김장은 누가 잇나 이 무렵 도시와 농촌을 지배하는 색깔은 붉은색이다. 크리스마스와 김장. 비슷하나 다르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의상이 한 음료회사가 마케팅을 위해 만든 얕은 색깔이라면 김장의 색은 묵직하고 강렬하며 현실적이다. 그냥 찍어 바르면 나오는 색이 아니다. 고춧가루 하나만으로는 깊은 색을 낼 수 없다. 육수와 온갖 열매를 갈아 넣은 농축액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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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나누고 비우는 겨울 들판이 순식간에 속살을 드러낸다. 추수 마친 검은 논바닥을 홑이불처럼 덮었던 볏짚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공룡알로 변태되며 싹쓸이당했다. 느릿하게 보이던 수확 작업도 거의 마무리되고 사람의 손끝이 필요한 갈무리가 남았다. 털고 때리고 모으고 쟁이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겨울 휴식이다. 보통은 두 달 남짓, 김장 마치고 이듬해 입춘까지는 농한기를 보낸다. 옛날 같으면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화로에 고구마 꽂아두던 그때다. 새끼 안 꼬아도 된다고 해서 놀거나 자빠져 있기를 즐기는 농민은 없다. 과일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화목난로를 때는 집은 쉴 새 없이 나무도 마련해야 한다. 양파 마늘밭도 손길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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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몸이 녹는 한마디 더 바빠지기 전에 날을 잡아야 했다. 1년에 단 한 번, 온 동네가 함께 떠나는 가을 나들이 날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갈 수 있는 날을 잡으니 그날이었다. 장을 보고 떡을 맞추고 술을 받아놓는 일은 전날 마쳤다. 인원 점검도 끝났다. 날씨만 받쳐주면 되는데 그건 하늘의 뜻이었다. 경험상 마을의 나들이는, 가면서 버스와 휴게소에서 취하고 점심 회 한 접시에 취하고 바닷바람 쐬면서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잃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목적지도 여수 목포 순천 남해 거제 통영 등 해안 도시뿐이었다. 좀 바꿔보자고 우겼다. 맨날 보고 사는 게 노고단 자락이지만 지리산 건너편이 어찌 생겼는지 아시냐고 물었다. 허리 구부러지고 다리 휜 어르신들에게 모노레일이라는 거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보자며 경남 함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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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다시 꾸는 꿈 내가 오늘 죽어도 요절(夭折)은 아니다. 천재도 아닌 삶을 꽤 살았고, 앞으로의 기간은 내 생애 가장 열악한 조건으로 지낼 것이 분명하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예상하면 20년 안팎의 시간이 남았다. 별생각을 다 해본다. 뭔가 족적을 남겨야 하나, 흔적도 없이 떠나는 게 더 힘들다는데 그냥 이대로 살면 되지, ‘그냥’도 좋지만 어떻게 그냥 살 건데,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뭘 길게 보려고 하나, 살아서 인생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는데. 뭐 이런 잡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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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수해 그리고 갚지 못할 ‘정’ 잡초와 대출이자는 공통점이 있다. 잠도 안 자고 휴일도 없이 무럭무럭 자란다. 이길 방법이 없다. 5년 전 이즈음 몇군데서 돈을 빌렸고, 금융기관은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대출 만기 알림을 주곤 한다. 그중 한 대출의 상환일이 왔고, 갚아야 했다. 결국 며칠 전 생일 선물처럼 신규 대출을 받았다. 대출의 시작은 2020년 구례 물난리였다. 그때처럼 올여름도 전국 이곳저곳에서 폭우와 산사태, 침수 피해가 잇따랐다. 남 일 같지 않았다. 쓰러진 가재도구와 물에 젖은 침구류, 허탈한 표정, 쓰러진 소들, 화면이 전달하지 못하는 특유의 냄새까지 겹치며 심박수가 치달았다. 허겁지겁 집을 빠져나왔던 기억과 폭격을 맞은 듯 엎어지고 뒤집힌 집의 마루에 들어선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후 겪어야 할, 이번 피해자들은 아직 모를 어려움들이 기다란 카드명세서처럼 머리에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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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귀농·귀촌 후배들에게 가끔 귀농·귀촌 계획을 가진 분들의 연락을 받는다. 유행처럼 쏟아져 내려올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까지는 자신이 없지만 ‘나 혼자 산다’ 정도는 해보고 싶은 딱 그 정도인 듯하다. 빈집도 찾고 내놓은 땅도 둘러보다가 차 한 잔 앞에 두고 살아온 내력을 털어놓는다. 듣다 보면 이후의 흐름과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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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친환경 농사의 딜레마 담장의 능소화가 바닥으로 흐른다. 먼 산은 봄 단풍 블라우스를 벗고 진초록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반복되는 변화지만 늘 새롭다. 자연에 반해 시골로 오는 사람들이 있다. 15년 전 나도 그랬다. 지켜보면 늘 곱기만 하던 자연이지만 더불어 살다 보니 좀 달랐다. 벼농사는 모내기 두 달 전 볍씨를 물에 담그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판이 못자리에서 자라는 동안 메뚜기 이마보다 빤지르르하게 논두렁을 깎는다. 논을 갈아엎고, 흙을 잘게 부수고, 물을 쏟아붓고 진흙을 만들어 화투판 담요처럼 빤빤하게 펼쳐야 한다. 거기에 약 10㎝ 깊이로 물 높이를 유지하며 새는 곳을 찾아 미장하듯 손으로 처발라도 물은 꾸준히 샌다. 기계가 작업하기 편하도록 물을 뺐다가 이앙기가 6줄로 예쁘게 똥을 싸듯 모를 꽂으며 돌아다니면 모내기가 끝난다. 그리고 바로 물을 다시 대고 풀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사실 모든 작업이 자연에 반(反)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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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국가안보에 중요한 농업 연두·분홍이 어우러지던 봄 단풍이 끝나고 대기를 점령하던 소나무 꽃가루도 가라앉았다. 밀이 가득 찬 논에는 노란빛이 퍼지고 그 옆 곱게 정리된 논에는 물이 들어차 고요하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얼핏 보면 그렇다. 실상은 전쟁이다. 트랙터 바퀴가 진흙을 공중에 흩뿌리며 다니고 바닥의 잔해들이 처참해서만은 아니다. 논마다 물을 대기 위한 눈치싸움이 치열하고, 때를 맞추기 위해 밤에도 논 작업을 해야 하는 시간싸움이 일상이다. 힘을 써야 하는 힘든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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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P형님의 정년퇴직을 응원한다 “밥은 묵었는가?” 아침 6시. 일어나기도 빠듯한 시간에 무슨 밥을 먹었겠나. 인사성 질문을 던진 P형님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방울뱀 소리를 냈다. 입가심을 하려는지 창고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따르며 내게 권했다. 손바닥을 보이자 예상한 답인 듯 P형님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들이켰다. 사람들이 좀 더 나와야 하니 기다리기 무료한 척 두 번째 잔을 채웠다. 대농이자 작업 창고의 주인인 형님은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 작업을 앞두고 노동에 적합한 혈중알코올농도를 맞추는 중이다. 이리 해야 기운이 난다며 영양제 마시듯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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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세상 쉬운 정부의 쌀 대책 뭘 했다고, 3월이 끝났다. 온 나라가 아프고 아침저녁으로 북풍이 남아 있는데 속없이 새로운 4월이다. 태생적 게으름으로 할 일만 태산이고 한 일은 미약하다. 감자 두둑이 곱게 늘어서고 고추 고랑을 다듬는 어머니들의 괭이질이 분주하지만 나는 텃밭 정리도 마치지 못했다. 나의 지지부진과 관계없이 형님들의 트랙터는 진흙을 하늘로 날리며 달리고 어르신들 논 한편에 내려앉은 못자리가 곱다. 여지 없이 씨나락을 준비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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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아무튼 봄 굳이 봄이다. 엊그제 눈 치우느라 애먹었고 계곡엔 살얼음도 남아있지만 달래, 냉이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봄이다. 움트고, 피어나고, 깨어나는 봄이 이곳 남도에서는 느낌이 좀 다르게 다가온다. 요맘때면 이유 없이 두통이 빈번해지고 경운기 시동 소리에 맞춰 심장이 요동을 친다. 고혈압이나 심부전의 문제가 아니라 계절성 정신질환에 가깝다. 몇년 새 증상이 악화하는 추세에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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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경우가 없는 사람 “거 아주 경우가 없는 사람이여. 상종을 말어.” 농장 뒤편 아저씨의 느닷없는 말씀이다. 바른 말씀 잘하시는 아저씨는 방금 지나친 김씨를 가리켰다. “저놈이 몸 아픈 즈그 어매 모시기 싫어 요양원 델따놓고는 생전 가보도 않고…”로 시작해 마을 일에 협조 안 해 애먹었던 일, 자녀들이 속 썩여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욕먹던 일, 핥아놓은 개밥 그릇 같은 얼굴로 아줌마들깨나 꼬셨던 일까지 이어졌다. 어르신의 장광설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 지금도 차가 마주쳤는데 나보고 후진하라고 버팅기는겨. 지는 조금만 뒤로 가면 비켜설 데가 있고 나는 쩌어그 감밭 위에꺼정 빠꾸로 올라가야 허는디. 이건 경우가 아니잖어. 안 그런가?” 아저씨가 앞자락을 깔았던 건 단지 양보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와 살아온 내력을 기반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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