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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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애쓰고 있다는 마음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 조용히 파문을 만들고 있다. 보고 감동한 이들이 대관해 상영회를 열 만큼 가슴을 흔드는 힘이 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진료실에서 만나는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주인공 주인이는 부산스럽고 쾌활한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친구와 잘 어울리고, 공부보다 태권도를 좋아하고, 진로 상담을 할 때 선생님과 농담을 하는 사회성 좋은 아이다. 그런데 아동 성폭행범이 출소 후 동네로 오는 걸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려는 친구와 다투면서 숨겨온 사실이 드러난다. 그에게도 트라우마를 남긴 오래전 사건이 있었다. 주인이뿐 아니라 가족의 행동도 모두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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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영포티에게 성호씨, 얼마 전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못다 한 말을 글로 전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먹해하고 긴장을 한 듯했지만 맥주 한 잔 마신 다음부터는 술술 말문을 풀더군요. “열심히 일해서 몇년 전 운좋게 서울에 아파트를 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순조롭게 승진을 했고, 연봉도 만족스럽습니다. 좋아하던 아티스트의 콘서트에 가고, 패션이나 음식 기호도 확고해서 섬세한 취향이라는 평을 들어요. 교육비가 많이 들기 시작했지만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거르지 않습니다. 하프 마라톤을 뛸 정도로 운동도 제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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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소박한 기대와 뜻밖의 결과 주말 오후, 서울 필운동의 자주 가던 카페에 들렀는데 사장이 서비스로 에클레어를 주셨다. 단골 인증을 받아 뿌듯해하며 곧 자리를 양보하고 건너편 편집숍에 트레킹화를 사러 갔다. 맞는 사이즈가 없어 실망하고 나오려는데 40% 세일을 하는 다른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남은 한 켤레가 딱 맞았다. 말 그대로 ‘득템’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기대와 실망을 하며 산다. 뜻밖의 선물을 받으면 기쁘고, 기대했던 물건을 구하지 못해 실망했다 의외의 발견으로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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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에어컨의 안과 밖 1901년 미국 브루클린의 한 인쇄소는 여름마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부풀어 오르는 현상으로 골치가 아팠다. 문제 해결을 위해 버펄로 포지라는 회사의 젊은 엔지니어 윌리스 캐리어가 파견됐다. 몇달간 골머리를 앓던 캐리어는 늦가을 기차역에서 안개를 보고 번뜩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안개와 같이 포화된 공기를 파이프로 통과시키는 방식을 개발해 공기의 습도와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됐고, 지금은 “에어컨의 아버지”라 불린다. 에어컨은 덥고 습해 살기 힘들던 미국 남부, 중동, 동남아 등의 주거 환경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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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이제 고기집게를 넘기세요 나는 고기에 진심이다. 적당히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한 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뒤집고 각자에게 잘라 놓아주는 것까지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대형 고깃집에서 회식이 있었다. 종업원이 등심 한 접시를 가져와서 불판에 무성의하게 두 덩이를 던지듯 올리더니, 마구 뒤집다 자르고 가버렸다. 고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고기는 질기기만 해서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짜증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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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귀한 아들 증후군 병원은 대학 캠퍼스와 붙어 있고, 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건널목에 함께 서 있던 20대 남성의 말이 들렸다. “축제에 재학생만 갈 수 있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봐. 지역 주민들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어야지.” “자기들 행사니 당사자들이 결정하는 게 맞지 않니?” 옆에 있던 어머니가 대꾸했지만, 그는 바로 제 주장을 펼쳤다. 그 주장의 논리보다 내 귀에 박힌 건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명료한 의지를 담은 남성의 태도였다. 응답하는 어머니 말투에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다는 기특한 마음이 커 보였다. 슬쩍 돌아보니 아들 손을 잡은 스킨십과 눈빛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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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집으로 가출한 아이들 4월 초 검정고시가 있었고, 진료실은 결과를 ‘보고’하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내가 진료하는 10대 중 3분의 1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어서다. 예전에 학교 안 다닌 아이는 대개 가출을 반복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 혹은 심한 폭력의 피해자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10년 새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에는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거나 학폭위가 열릴 수준의 충돌을 빚기보다는 학교 다니는 게 최고의 스트레스인 아이들이 많다. 부모는 선량하고 아이를 무척 염려한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부모 모두 양육에 적극적이다. 아이 성향은 내성적인 편이고, 초등학교까지 공부 잘하고 학원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 학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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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록하지 않은 기억 달리기를 한 지 몇년 됐다. 신던 운동화로 뛰다가 러닝화를 샀고, 앱을 설치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몇㎞를 몇분에 뛰는지 평균 속도를 관리하면서 동기부여가 되고 뛰는 거리가 늘고 속도가 빨라졌다. 1년이 지난 후 스마트워치를 사서 차고 나간 다음에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심박수까지 관리가 되면서 더 많은 기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 기록이 기억이 되기 시작했다. 앱을 켜지 않고 뛰다가 한참 후 알게 되면 망연자실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미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기록은 남지 않은 것이니 사실상 뛰지 않은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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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고통은 필수인가 최근 주요 관심사가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노후에 잘 지내기 위해서는 근육량을 최대한 늘려놓는 것이 필수다. 나이 들어 근육량이 1㎏ 더 있으면 노쇠를 막아주고, 그 가치가 무려 1300만원이라는 연구도 있다. 바람과 달리 열심히 하는데도 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무게를 더 늘리고 횟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해야 근육이 찢어지면서 근육량이 느는 데 효과적이라고 트레이너는 말한다. 조언을 따라 운동량을 늘리니 온몸이 아프지만 운동 효과가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면 이제 무게를 늘려야 할 때다. 이건 끝이 나지 않을 시시포스의 언덕 같아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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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습관에서 깨어나기 “깨끗해졌는데요?” 치과에서 들은 말이다. 매번 치아 사이 음식 찌꺼기가 남아서 잇몸 상태가 좋지 않아 혼이 났었다. 반년 전부터 고기나 질긴 채소를 먹고 나면 이 사이에 이물감을 확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치실을 꼬박꼬박 사용하게 됐고, 드디어 칭찬을 들은 것이다. 치아 사이 간격이 넓어지면서 생긴 불편감이 통각의 기준점을 넘어서버렸고 그 끝이 잇몸 상태의 호전이라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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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꼭 다 털어놔야 하는 건 아니에요 힘든 일을 겪고 보호자와 찾아온 분이 있다.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보호자가 툭 치며 말한다. “빨리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놔야 해. 그래야 좋아지지.…” 첫 진료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말을 잘하지 않는다. 부모나 배우자가 내게 물어본다. “선생님이 말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에 있는 걸 다 뱉어내서 비워야 좋아지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