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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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상은 정치적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목할 만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외관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실제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듯 단순한 일상에 숨겨진 복잡한 관계와 변화를 포착하려는 역사가 미시사(microhistory)다. 작은 대상에 꽂힌 집요한 시선을 통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드러난 사실들엔 상식과 통념을 뒤흔들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역사, 그것이 미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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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전쟁에서 교착상태라는 게 있다. 양군의 전력이 엇비슷해 조금의 진전도, 변동도 없는 상황을 뜻한다. 1차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였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초기 돌격이 저지된 후 양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교착상태에 빠졌다. 정치에도 그런 교착상태가 있다. 즉 세력 A와 세력 B가 투쟁할 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 채 둘 다 탈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세력은 도돌이표처럼 각자의 주장만 무한 반복하며 출구나 타협책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에 국민들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 삶을 돌보지 않는 정치에 염증과 무관심을 내보이며 불만과 좌절감을 쌓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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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스프레차투라, 천재의 기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천재들의 시대였다. 조토와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천재적 예술가들이 그토록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출된 것은 기적과도 같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자. 당대에 배출된 것이 천재라기보다 천재의 개념이라고.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의 개념이 나타났고, 이 개념이 그들에게 붙여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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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벨라 피구라, 아름다움 향한 열정 이탈리아어에 ‘벨라 피구라’(bella figura)란 말이 있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뜻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인의 남다른 열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이탈리아인들의 미적 취향은 유명하고, 이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명품을 탄생시킨 원천일지 모른다. 바짓단과 양말 사이 맨살을 보이지 말라는 금기를 지키거나 무심하게 흘러내린 한 올의 머리카락을 연출하는 세심함이 ‘벨라 피구라’의 앙증맞은 디테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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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잔혹하거나 자비롭거나 고전은 세월의 삭풍을 견디고 오늘날에도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켄타우로스에 빗댄다. 켄타우로스란 신화 속 괴수로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말이다. 군주도 인간과 짐승의 모습을 겸비한 존재라는 말일까? 군주는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적대자들에게도 둘러싸인 채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고 싸우는 존재다. 그런데 싸움에는 법에 의한 방법과 힘에 의한 방법이 있는바, 법은 인간의 것이고 힘은 짐승의 것이다. 군주가 켄타우로스에 비유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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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난세를 통과하는 법 세상은 어지럽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정녕 어렵다. 사람들은 난세를 통과하는 법을 알려고 현자에도 문의하고 종교에도 귀의하며 처세술이나 역술에도 의지한다. 그러나 역사만큼 확실한 방법을 귀띔해주는 것도 달리 없다. 과거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야말로 생생한 지침과 교훈을 제공하는 법이다. 그러니 역사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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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마키아벨리의 미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다. 그의 초상화 중 마키아벨리 직후 세대의 화가인 산티 디 티토가 그린 것이 유명하다. 이 초상화에서 마키아벨리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데, 이 미소가 일품이다.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마키아벨리의 미소도 헤아리기 힘든 내면의 깊이와 미묘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소의 의미는 필경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파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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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섬뜩함 이탈리아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재미있는 장면이 잠깐 지나간다. 주인공 두 명이 시골길을 가다 물을 얻으려고 농가에 들른다. 미국인 친구가 벽에 걸린 그 옛날 독재자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보고 몹시 놀라워한다. 그러자 이탈리아 친구가 ‘쿨’하게 대꾸한다. “여기 이탈리아잖아.” 1945년 이탈리아 파시즘이 패망하면서 무솔리니가 최후를 맞이하고 역사의 단죄를 받았건만, 그로부터 무려 40여년이 지난 후에도 독재자의 초상화가 버젓이 걸려 있는 모습은 정녕 놀랍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한적한 농촌의 고립무원 때문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특성으로 설명해볼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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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자는 의존하는 자다 고대 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쓴 한 역사학자가 로마 황제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는 황제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자를 떠올리지만, 실상 그의 권력에는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다. 황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제국의 중심이었으나 현실적으로 그의 정치적 지배력은 중심부 언저리에서만 행사됐을 뿐 먼 지방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이는 제국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제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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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파시즘과 거짓말 정치 사람은 창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햇빛이 비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곧 인간은 거짓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거짓말을 꾸며낼 뿐만 아니라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능력, 바꿔 말해 사실을 부정할뿐더러 사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능력이 폭력 수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활용되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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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파시즘의 두 얼굴 요즘 부쩍 ‘파시즘’이란 말이 유럽과 미국에서, 또 부분적으로 한국에서도 자주 들린다. 사실 파시즘은 역사학의 난제 중 하나인데 이 문제를 푼다고 노벨상이나 필즈상이 주어질 리 없건만, 그간 수많은 연구자가 파시즘 연구에 매달리며 그 정체를 밝히려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여전히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고 해법도 오리무중이지만, 파시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된 공식들은 있다. 가령 파시즘은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은 이념이자 운동이라는 것이다. 파시즘의 원조라 할 이탈리아 파시즘의 경우 파시스트들은 각종 소형 화기와 곤봉, 그리고 구토와 설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정화’의 수단으로 간주된 피마자기름 등으로 무장하고 트럭으로 무리지어 다니며 정적과 비판자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