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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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한국형 R&B 보컬의 혁명 ‘휘성’ 휘성을 처음 본 건 200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PC통신 ‘나우누리’에는 SNP라는 전설적인 흑인음악 동호회가 있었고, 그는 지금은 음악 및 연예계에서 유명인이 된 데프콘, 정인, 버벌진트 등과 함께 온·오프 모임에 종종 모습을 보이며 가수의 꿈을 꾸던, 아직은 재능보다는 열정이 더 빛나던 청년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RealSlow’라는 아이디로 불렸던 휘성이 가요계의 트렌드를 바꾸는 엄청난 가수로 성장할 줄을. 휘성은 원래 노래보다는 춤에 더 소질이 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자신의 진정한 꿈이 가수에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를 미치게 했던 흑인 가수들의 음색과 기교를 연마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감행한다. 한국인의 목소리나 발음은 흑인들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R&B나 솔 음악에는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에 한국에 흑인음악을 소개했던 김조한이나 박정현의 믿을 수 없는 절창은 오로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만이 배울 수 있었던 ‘본토’ 감성이라고 애써 자위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휘성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가 우상으로 삼았던 시스코나 크레이그 데이비드의 노래를 커버하기 위해 타고난 미성을 버리고 두툼하고 탁한 목소리를 장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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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K팝 세계화 ‘남은 과제’ 몇주 전 세계 대중음악계 최대 축제 중 하나인 제67회 그래미 어워드가 열렸다. 올해 그래미 어워드의 주인공은 무려 여섯 번째 도전 만에 ‘올해의 앨범’ 트로피를 거머쥔 비욘세와 그래미 역사상 최초로 ‘디스(diss) 트랙’으로 주요 부문 두 개를 휩쓴 켄드릭 라마였다. 엄밀히 따지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로컬 음악상에 불과한 그래미를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이 1940년대 이래 대중음악 트렌드의 본거지이자 산업의 중심으로서 여전히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간 그래미 어워드에 쏟아진 다양한 불만, 시상식의 주체인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의 보수성과 경직성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매년 전문가와 대중들이 이 결과를 기다리고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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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오늘 가요에서 K팝으로 1985년 6월, 미국으로 떠났던 이수만이 수년간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갖고 돌아온 것은 학위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산업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불과 1년 전인 1980년, 미국은 MTV의 등장과 함께 대중음악의 혁명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보기’ 시작했고, 마이클 잭슨, 프린스, 마돈나와 같은 퍼포머형 가수들이 새로운 팝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듀란듀란과 조지 마이클로 대표되는 영국 팝음악의 뉴웨이브가 뒤따랐고, 흑인들의 강렬한 비트와 춤사위로 상징되는 솔과 힙합이 포크와 컨트리를 밀어냈다. 그리고 보이밴드 열풍의 주역인 뉴키즈온더블록이 데뷔했다. 이수만은 이 새로운 흐름을 현지에서 관찰하고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에 미칠 변화에 대해서도 정확히 포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