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혜영
논설위원
최신기사
-
아침을열며 심상정의 ‘1분’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은 한국 정치의 개혁 원년이었다. 10석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했고, 국회 곳곳에는 그동안 듣지 못했던 약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16년이 지났다. 4·15 총선 후보자 등록 결과 정의당은 비례대표 정당기호 6번을 받았다. 법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면 단 하나의 방법이 선거법 개정이라고, 그래서 원내교섭단체를 꾸리겠다고 장담했던 정의당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어찌 정의당의 비극이기만 하랴. 진보정당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6’이라는 숫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
아침을 열며 광주가 대구에 건네는 위로 대구에 있는 고교 선생님의 안부가 걱정됐다. “기침 때문에 걱정했지만 감기라네. 괜찮아. 난 고립에 익숙한 편이라….” 선생님은 포항에서 교육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뒤 33년 전 고향 대구에 정착했다. 삶의 고통을 잊으려 다시 찾은 고향, 살아내기 위해 겪었던 모든 경험이 고립이었으리라. 선생님은 그때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를 출발해 황톳길 긴 방죽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잊지 않기 위해. 코로나19가 대구를 휘감고 있다. 2월29일 현재 대구 지역 확진자만 2000명이 넘었다. 선생님의 고립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간 홀로 겪었던 고립을, 이번엔 대구 시민들과 함께 겪고 있다. 선생님은 악몽이라고 했다. 악몽의 실체는 혐오를 따라 창궐하는 정치 바이러스였다. 2월18일 31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후 대구는 공포에 빠졌다. 그즈음, 금도를 넘어선 풍경을 목도했다. 4·15 총선에서 대구 동갑에 출마한 미래통합당 후보가 ‘문재인 폐렴이 대구 시민 다 죽인다’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문재인 폐렴’이란 단어를 보며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한나 아렌트가 재판정에서 본 유대인 학살 전범 아이히만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아이히만은 “나는 맡은 일을 했을 뿐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로 인해 죄책감 없이 악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
아침을 열며 여성 장관들의 ‘다른’ 눈물을 보고 싶다 골목마다 현수막이 나부끼는 걸 보니 선거의 계절이 온 것 같다. 그러나 여성 공천 문제는 매번 4년을 주기로 ‘불행 회로’ 속에 갇힌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20년 전 도입된 여성 할당제 얘기가 나온다. 레퍼토리도 한결같다. 역차별, 특혜…. 선거제 개정 이후 여성 할당제 반대론자들의 무기인 당선 가능성마저 강조된다. 다당제 출현으로 후보자 경쟁력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전직 미국 대통령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2년만 통치해도 엄청난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 시대에 227년 전 여성 참정권을 외치다 처형된 올랭프 드 구주를 떠올릴 줄이야. 왕정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여성을 소외시켰다며 “여성은 교수대에 오를 권리도,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구주를 단두대 위에 세웠다. 차별과 반동의 단두대에서 내려오지 못한 여성 정치, 그 시작은 또다시 공천이다.
-
아침을 열며 ‘불만의 겨울’을 건너온 후배에게 정치하겠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어. 뭐하러 그 고생을 하나 싶었거든. 그러나 정치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잘 안된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듣고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라. “정치라는 게 짐승이 하는 거라고 쉽게 말하고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잖아요. 또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나마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치를 하려고요.” 후배 K야. 정동길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 너의 강단 앞에서, 뭐랄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소낙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난 많이 지쳐 있었거든. 올 한 해 정치는 혐오와 불신 이외엔 달리 설명할 게 없었잖니. 사방천지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들이 플래카드라도 들고 가는 곳이 국회 앞이라고, 그래서 아직은 정치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정치부 기자인 선배에게 이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을 텐데 난 네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아침을 열며 21대 국회, 초선 ‘김지영들’ “저 아세요(?)” 소설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은 같은 학원 남학생이 버스 정류장에서 치근댈 때 이 말을 확 내뱉고 싶었지만 그냥 삼켰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은 달랐다. 커피숍에서 1500원짜리 아이스커피를 쏟아 안절부절못할 때 맘충이라고 비아냥대는 남성들을 돌아보며 이 말을 쏘아붙였다. 여성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조차 힘겹다. 심각한 일을 수백 번 당하거나, 아주 사소한 수백 가지 사건을 한두 번 겪거나. 여성들은 이렇게 성장한다. 이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 자신의 문제가 중요한지 판단도 어렵다. 일부는 김지영 일대기가 중산층 여성의 삶이라며 계급성을 따지고, 맘충이라 비하한 적 없다며 냉소적으로 대한다. 나는 이런 반응이 여성 서사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산층 여성의 삶? 중산층이든 아니든 여성 서사가 이렇게 보편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나. 그만큼 여성들은 개별성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김지영도 ‘빙의’에 기대 겨우 자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맘충이라 비하한 적 없다는 남성들은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으로 환원된다. 김지영이 “애를 낳으면 오빠는 뭘 잃어?”라고 묻자 정대현은 “친구들도 못 만날 거고, 회식도 편하게 못할 거고”라고 답한다. 직장과 미래를 다 잃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부인에게 겨우 친구, 회식이라니. 82년생 김지영이 누른 버튼은 자기 아내의, 동료의 고통을 방관해온 남성들에 대한 경고음이다. 그러니 더 고단한 여성, 더 가부장적인 남성도 있다는 말은 시대를 거꾸로 돌리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
아침을 열며 지키는 자를 누가 지킬 것인가 온 사회가, 아니 온 시민의 일상 속에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가치를 신봉하는 세력 간 다툼이 마치 ‘신들의 전쟁’(막스 베버)처럼 화해 불가능할 정도로 격렬하다. 좋고 싫은 것이 그리 강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해하게 된 나이인지라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영화나 볼까 했지만 DMZ 국제다큐영화제로 발길을 돌렸다. 정치색 짙은 작품 두 편을 골랐다. <사마에게>. 아랍의 봄 시절, 시리아 내전의 혁명도시 알레포를 지키기 위해 6년을 싸운 대학생 와브와 남편 함자, 동지들의 다큐멘터리다. 사마는 와브와 함자의 딸이다. 시리아 내전은 알아사드 독재정권이 반독재 민주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2011년 3월 시작됐다. 오로지 혁명만 생각했던 대학생 와브는 러시아군 참전으로 폐허가 된 알레포에서 ‘혁명은 떠나지 않는 것’이라 믿으며 항전을 이어갔다. 와브는 내전 중 혁명지도자인 함자와 결혼하고 딸 사마를 낳았다. 와브와 함자는 사선을 넘나드는 공포 속에서 딸 사마를 보며 삶의 이유를 얻는다. ‘혁명은 떠나지 않는 것’이라 다짐했던 와브는 알레포를 떠나면 공습하지 않겠다는 아사드 정권의 선전포고(정확히 유엔 중재)로 결국 짐을 꾸린다. <사마에게>는 세상과 단절된 알레포의 6년을 와브가 촬영한 다큐멘터리다. 실패한 혁명이지만 와브는 딸 사마가 알레포의 항전을 기억하길 바라며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
아침을 열며 조국이 당긴 방아쇠 세상이 오직 ‘조국’ 한 단어다. 공직후보자 한 사람을 두고 1만개 넘는 기사와 실시간 포스팅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휴전 제안까지 나왔다. 존재하는 모든 전선이 힘 대 힘으로 충돌한다. 사퇴냐 버티기냐 차원을 넘어선 것 같다. 조 후보자가 장관에 취임하더라도, 물러나더라도 사회 전체가 감당할 비용이 적지 않다는 걱정이 앞선다. ‘조국이 당긴 방아쇠’가 무엇을, 어디를 정조준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심리적 참전을 택하기로 했다. ‘조국 현상’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의혹의 결이 노골적 부패와 명백한 불법성을 띠고 있진 않다. 진보세력 상층부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대물림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것이 본질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세대 ‘리더들’의 ‘권력 점유’는 새삼스러운 진단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조국 현상’을 통해 민주화세대 리더들의 생활 기득권 실체를 보게 됐다. 이들의 ‘권력 점유’가 작동하는 방식도 포착됐다. “국가(정치)와 시장(경제)을 가로지르며 세대 권력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연결망’을 통해 사회 지배를 공고화했다.”(이철승 서강대 교수,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심화’) 촘촘한 네트워크 위계로 정치·생활 기득권을 재생산했고, 그 결과 격차 사회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조 후보자 딸의 논문·입시 관련 의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진보 상층부, 그것도 개혁을 상징했던 인사가 가용 자원을 동원해 자식을 기득권 체제에 밀어넣은 것. 그로 인해 ‘내 자식’은 기울어진 운동장도 아닌 아예 다른 운동장에 서 있는 현실을 확인한 시민들이 울분을 거둘 수 있겠는가. 보수세력은 ‘내로남불’로, 상층부에서 밀려난 동세대들은 ‘체념형 지지’로 대응하고 있다. “불법은 아니다”라는 해명은 역린을 건드렸다.
-
미투 운동에 지지…“여성들이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어요” 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지난해 3월1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만났다. 3남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어머니의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일지 모른다”고 했다. 당시는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던 무렵이었고 평창 동계올림픽 직후였다. ‘김대중의 부인’이 아닌 여성·평화운동가였던 ‘이희호’의 온전한 삶을 돌아보고 싶었다. 이 이사장 타계를 접한 지금 뒤늦게 깨달았다. ‘이희호’는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였음을. 1년3개월 전 나눈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는 것으로 한 시대가 저문 안타까움을 대신한다.
-
구혜영의 이면 황교안의 두번째 자개 명패 큰 저택에 널따란 정원을 가진 한 거인이 있었다. 거인이 집을 비울 때면 가난한 동네 아이들은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일곱 해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온 거인은 ‘불법침입한’ 아이들을 정원에서 내쫓았다. 아이들이 사라진 정원엔 매서운 북풍만 몰아쳤다. 어느 날, 거인의 정원에 다시 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었다. 담벽 사이 구멍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인은 그제야 알았다. 그의 정원에 봄이 오지 않은 이유를. 망치로 담장을 부수고 다시 아이들을 맞아들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아는 거인’이다. 지난주 두개의 담장이 한반도를 에워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냉전의 담장을 깨는 동안, 황교안 대표를 선택한 자유한국당은 냉전의 담장을 쌓아 올렸다.
-
구혜영의 이면 거꾸로 읽는 ‘유시민’ 지난해 2월, 사석에서 만난 유시민 작가는 “행복하다”고 했다. 뭐 그리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되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농경사회는 인적 네트워크가 70~80명 정도다. 이 정도까진 못 줄이겠지만 더 좁아져야 된다”고 했다. 정계 복귀 답변을 끌어내려 애썼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불러도 절대 안 갈 것”이라고 하며 말려들지 않았다. 1년이 지났다. 호칭부터 달라졌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유 이사장은 가짜뉴스 척결과 정책 내비게이터를 자처하며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 ‘고칠레오’를 맡았다. 여전히 정치 복귀엔 손사래를 쳤다. 행복하기 위해 좁아지겠다던 유 작가는 오히려 넓어졌다. ‘알릴레오’는 일주일 만에 구독자 약 73만명을 확보했다.
-
구혜영의 이면 ‘2018 정치’의 북쪽에서 한 시절 스스로 몰아치는 강물이 있다. 한국 정치는 험한 물줄기와 함께 몇번을 굽이쳤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한 해 ‘정치의 이면’을 되새겨 본다. ‘참모정치’가 도드라졌다. 행정관 인사 문제와 대통령 보좌진의 발언이 주요 기사로 등장했다. 참모의 비전이 리더를 통해 투영되는 정치가 참모정치다. 비전이 버겁다면 직언이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당나라 현종의 참모 한휴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현종은 “한휴 덕분에 나는 야위었다. 그러나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참모정치는 선글라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첫눈이 대신했다. ‘참모’만 있고 ‘정치’는 없는 참모정치. 지난 2월 칼럼은 ‘말과 글의 참모, 양정철’을 썼다. 그는 언어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꺼냈다. 이후 안부 인사에 “광장에 나오는 이명훈 심정” “허망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답했다. 요즘 ‘양비’ 역할론이 자주 들린다.
-
구혜영 기자가 만난 政치&情치 “얼굴 없는 비서 반대…출근 사흘째부터 이 총리에 잔소리 쏟아냈죠” 정운현 신임 국무총리비서실장(59)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딸깍발이’라고 부른다. 도끼를 옆에 놓고 광화문 앞에 꿇어 엎드려 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면암 최익현 같은 사람. 말이 좋아 꼬장꼬장한 선비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판에 박힌 공직생활을 해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뜻밖에도 새 일을 즐거워했다. 이명박 정권 초기 언론재단에서 쫓겨난 지 만 10년을 백수로 지내며 새벽녘까지 글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은 180도 달라진 생활을 하고 있다. 오전 5시20분에 기상, 6시30분에 집을 나서면 7시 반에 광화문 청사에 도착한다. 고3 때부터 만 40년간 피워오던 담배도 거짓말처럼 끊었다. 아직 얼떨떨한 심경을 “흙 묻은 발로 귀인의 침실을 습격한 기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