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혜영
논설위원
최신기사
-
구혜영의 이면 박용진, 과감한 전환 요즘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면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대체로 비슷한 평가였다. 10월5일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이후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12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부 종합대책 발표(25일). 국회의원의 문제 제기 이후 정부가 20여일 만에 제도로 응답한 보기 드문 경우다. ‘박용진현상’은 사안 자체부터 인화성이 높았다. 기득권과의 정면 승부였다는 점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유치원 문제는 육아, 교육, 복지를 포괄하는 ‘헬조선 프레임’과 맥이 닿아 있다. 여성들의 삶을 옥죄는 핵심고리이기도 했다. 내 아이를 위해 ‘을’을 자처했던 부모들의 분노는 또 얼마나 컸나. 이런 문제를 다뤄야 할 교육위원회는 유난히 높은 전문성을 요구받는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엉켜 있는 상임위다. 민주당 지도부는 박 의원의 문제 제기 후 사흘이 지나서야 입장을 발표했다. 박 의원의 고군분투를 ‘똘끼’ 정치인의 무모한 돌파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슈의 파괴력, 분노의 조직화, 기득권과의 싸움이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졌다면 좀 더 정교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정감사 기간 내내 ‘박용진현상’을 들여다봤던 까닭이다. 그 자리엔 정당과 국회의 전환이 꿈틀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박 의원의 첫 자서전 제목은 ‘과감한 전환’이다.
-
구혜영 기자가 만난 政치&情치 유시춘 “내 동생 유시민, 정치 안 하면 좋겠다” 1985년 서울 장훈고에서 해직된 이후 ‘유시춘’ 이름 앞엔 온갖 ‘민’자 돌림 단체의 직함이 붙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식 사회를 보고 왔더니 경찰들이 교장 멱살을 잡고 “빨갱이 선생을 데리고 있다”고 소란을 피웠다. 곧바로 해직됐다. 15년 교사, 작가 ‘유시춘’(67)은 그 뒤 민가협 총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민화협 공동의장을 거쳤다. 2001년 말부터 2004년 초반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도 맡았다. 어떤 자리든 ‘의분’이 끌고 왔다. 지난 9월 17일 이후 또 하나의 이력이 더해졌다. EBS 신임 이사장. 유 이사장은 “작가, 인권운동가, 교사, 엄마의 이름은 미래세대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소신이었다. 다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
구혜영의 이면 이해찬에 반(反)하다 확실히 달라졌다. 이해찬 대표 취임 이후 더불어민주당 말이다. 이 대표는 종부세, 공공기관 이전 등 ‘표’ 계산을 해야 할 사안에 정면 대응하고 있다. 부동산, 전교조 합법화, 최저임금 등 청와대와 정부가 엇박자를 내거나 주저하는 정책에도 거침이 없다. 집권여당도 안정궤도를 순항 중이다. 지방선거와 전당대회 때만 해도 민주당은 내분이 불가피해 보였다. 차기 대선주자들이 조기 등판했고, 지지층 내부는 상대 당 후보를 찍자고 할 정도로 대립했다. 이 대표는 강한 여당과 20년 집권론을 앞세워 군기반장을 자임했다.
-
구혜영 기자가 만난 政치&情치 이정미 정의당 대표 “5석 미니정당이 지지율은 15%…실력 다져 이 간극 넘어서겠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52)는 휴대전화기에 노회찬 전 원내대표의 유서를 품고 다닌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은 진보정당 원천기술 보유자, 진보를 시민과 정치 곁에 가까이 두었던 대중정치인, 말 그대로 큰 산이었다. 이 대표에겐 전선·노동운동에 집중했던 이정미를 정치인 이정미로 발돋움하게 해준 선배였다. 노선은 달랐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술잔 속에 깊은 이념의 골도 메웠던 관계다. 지난 7월23일 청천벽력 같은 그의 죽음 이후 문득문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왜 당신이냐, 왜 하필 당신이어야 했냐고 몸서리치게 원망도 했다. 그러나 유서 마지막 ‘당은 당당하게 나아가라’는 글을 보며 송곳 같은 아픔을 거두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유서에 한 줄짜리 답장이라도 보내고 싶다. ‘노회찬 있는 정의당’과 ‘노회찬 없는 정의당’이 절대 다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
구혜영의 이면 노회찬의 하늘 지난 4월 정의당 노회찬 전 원내대표는 서울 마포 단골 횟집을 찾았다. 참모 두어명과 함께한 저녁자리였다. 노 전 원내대표는 웬만하면 사석에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날은 달랐다. 진보정치 30여년이 잔 속에서 출렁였다. 누군가 물었다. 노회찬의 꿈은 뭐냐고. 그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돼야지. 2022년 대선에서 내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2022년 대선 출마요? 여태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당신들이 도와줘야지.” 정권은 교체됐지만 진보정치는 고달팠다. 사표론이 사라졌나 싶더니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엔 2중대론에 시달렸다. 그도 이런저런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노회찬 그에겐 독자적 진보정당 이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20대 총선 무렵부터는 차세대, 미래를 자주 말하곤 했다. “마들연구소(전 지역구인 서울 노원의 정치학교)를 후배들을 키우는 정치 아카데미로 만들까.” 독자적 진보정당을 넘어 이미 진보적 대중정당까지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
구혜영의 이면 정치의 38선을 넘는 당신에게 푸른 도보다리가 분단의 38선을 단숨에 지웠습니다. 우발적인 오보로 베를린 장벽이 하룻밤 만에 무너졌듯 남북의 70년 장벽도 한번에 허물어지려나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쌓인 그리움에 간절한 염원이 보태져야겠지요. 어떤 순간이 벼락처럼 왔을 때 다 함께 달려나가 허물어뜨리려면 말입니다. 이런 설렘쯤은 괜찮을 줄 알았던 계절, 전 어제 밤새 뒤척였습니다. 당신과 긴 통화를 한 뒤였지요. 어두운 목소리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더군요. “여성 후배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서….” 더불어민주당 6·13 지방선거 경선을 넘지 못한 당신의 소회는 차라리 눈물이었습니다. 사실 남성들에 견줘 돈도 조직도 경험도 많지 않은 여성들에 ‘마을 정치’는 쉽지 않지요. 골목을 장악한 세력들의 굳건한 동맹. 오죽하면 “남성 의원들은 낮에 의회에선 꼼짝 못하다가 밤에 동네로 나오면 활개치더라”는 경험치가 때만 되면 나올까요. 차라리 총선은 바람(시대정신, 중앙정치)에라도 기댈 수 있지요. 내심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의 도약을 기대했습니다. 기존 ‘변명’이 통하지 않는 환경 때문입니다. 미투(#MeToo) 운동의 불씨를 성평등 정치로 살릴 수 있는 적기였지요.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앞장설 거라 확신했답니다. 이번처럼 승리를 낙관한 적도 없었기에 본선 경쟁력 구호에 밀렸던 여성들이 이제 어깨 펴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천 결과는 강력한 백래시였습니다. 17개 광역단체장 후보 전원이 남성이라니, 좀 과장하면 소름 돋았습니다.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 경선도 여성에겐 무덤이었습니다. 들여다보니 지독한 내전이었더군요. 지방선거가 차기 총선을 앞둔 지역위원장(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담합 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주당 승리 예보는 내전을 부추기는 무기였습니다. “권리당원 2000여명을 입당시켰지만 투표를 못한 사람이 많았다. 알아 봤더니 ‘서류 입력을 잘못해서 당원 명부에서 빠졌다. 당비 줄 테니 받아가라’ 했다고 한다.” 지역위원장들이 본인 지지자들만 관리했을 뿐 경쟁자 측 권리당원은 방치했다는 하소연입니다. 권리당원 비중이 공천의 절대 변수였던 경선에서 지역위원장이 밀지 않은 예비후보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요. “지역위원장이 ‘나는 (광역·기초단체장으로) ○○○ 후보를 지지한다. 지지자 명단을 달라’고 하더라. 지역위원장과 내가 미는 후보가 다르면 가번이 절실한 내 입장에선 지역위원장 눈치를 보게 된다.” 큰 단위부터 결정하는 공천 방식이 지역위원장들의 입김을 강화하는 기제가 된 거지요. 민주당이 기초의원 4인 선거구제 무산에 집착했던 이유가 짐작되지 않습니까.
-
구혜영 기자가 만난 政치&情치 “금융계 성차별 채용, 여성행원 승진 발목 잡던 ‘전환고시’의 21세기판” 미투(#MeToo) 운동은 일상화된 차별을 딛고 젠더평등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새겨들으려면 일상의 권력을 성찰해야 한다. 고용과 노동은 여성이 일상의 권력을 실감하는 현실이다. 그간 여성 노동은 어떤 모습이었나. 경력단절, 일·가정 병행, 저출산, 독박육아 등이 그려진다. 고용갑질의 문턱을 넘어도 불평등한 노동현실과 부딪힌다. 사회적으론 ‘돌봄 노동’이 우선이라는 규범을 요구받고, 직업적으론 일에 몰두하는 노동을 요구받는다. 이처럼 노동과 젠더 사이엔 차별과 평등이라는 양극단이 엄존한다.
-
구혜영의 이면 오재영 1주기, 흰장미를 놓으며 아직 봄이라기엔 이른 3월18일, 마석 모란공원 한 묘비 앞에 진보정당 지도부와 당원들이 모였다. 오재영 옛 민주노동당 조직실장 1주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50세에 접어든 지난해 3월22일 그는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진보청년회 동지인 부인 권신윤씨가 연대와 지지의 꽃 흰장미를 안고 묘비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 18번이 ‘낭만에 대하여’란 것도 여태 몰랐네”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도 될지 물었을 때 잡았더라면”. 그의 대답을 심상정 의원이 대신했다. ‘우리의 청춘은 뜨거웠고, 우리의 중년은 고달팠다. 우리는 너무 거창하게 살았고 그래서 자신에게 가혹했다.’ 그의 뜨거웠던 청춘과 고달팠던 중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가혹할 만큼 공적인 삶이었다는 것도 안다. 1주기란 시간은 추모도, 기념도 어려운 때다. 한 인간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 죽음이라는 것만 분명할 뿐. 그러나 작은 진보정당, 알려지지 않은 한 활동가의 1주기엔 많은 서사가 담겨 있었다. 진보와 정치라는 서사. 진보도 어렵고 정치도 어렵다. 둘을 합한 진보정치는 더 어렵다. 세상이 좋아질수록 과거 진보정치의 문제의식이 보편적 의제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성평등, 복지를 외치지 않는 정치세력이 어디 있나. 세상의 첫 길을 낼 때는 박수를 받다가도 그 길을 조금이라도 넓히려 하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한다. 진보정당이 늘 대중적이고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이유다. 흰장미가 차곡차곡 묘비 앞에 놓였다.
-
안희정 쇼크 “공적 됨됨이” 외친 30년 정치인생, 하루아침에 추락 안희정 ‘전’ 충남지사(53·사진)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의·신뢰·평화의 가치를 높이고 기회의 공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2016년 9월14일 경향신문 인터뷰)라고 ‘안희정 브랜드’를 소개했다. 특히 민주주의와 정의는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딘 1989년부터 변치 않는 소신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적 됨됨이’를 강조했다. 저서 <안희정의 함께, 혁명>에서 “정치는 공적 삶의 영역이다. 공적 소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 전 지사는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의혹 속에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쳐 온 30년 공적 소신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
“공적 됨됨이·신뢰”외친 30년 정치인생 ‘추한 추락’ 안희정 ‘전’ 충남지사(53)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의·신뢰·평화의 가치를 높이고 기회의 공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2016년 9월14일 경향신문 인터뷰)라고 ‘안희정 브랜드’를 소개했다. 특히 민주주의와 정의는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딘 1989년부터 변치 않는 소신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적 됨됨이’를 강조했다. 저서 <안희정의 함께, 혁명>에서 “정치는 공적 삶의 영역이다. 공적 소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 전 지사는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의혹 속에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쳐 온 30년 공적 소신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
구혜영이 만난 정치 이희호 여사 인터뷰 “남과 북, 더 자주 만나야…미투운동, 놀라워” 이희호 여사(96)가 휠체어에 앉아 서울 동교동 자택 접견실로 들어왔다. 봄날의 보라색 블라우스가 단아했다. 고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보라색은 이 여사의 평생과 함께했다. 1976년 3·1구국운동 사건 때도 그랬고,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에 설 때마다 그는 보라색 옷을 자주 입었다. “유난히 보라색을 좋아하셨잖아요. 보라색 스카프도 자주 매셨고요.” 10년 전 그의 자서전(<동행>)을 쓴 유시춘 작가도 동석해 먼저 안부를 물었다. 이 여사는 “네네. 정월 초하룻날에도 입었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모두 긴장했었다. 지난 1일 오후 3시, 약속을 잡고 동교동을 찾을 때까지도 다들 말을 아꼈다. 건강이 괜찮을지, 인터뷰가 가능할지…. 걱정했던 맘은 이 여사가 일행들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고마워요” “반가워요” 인사를 건네면서 풀어졌다. 유 작가는 이 여사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기자의 질문을 이 여사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뷰는 평창 올림픽과 막 특사단이 오가기 시작한 남북 얘기로 시작됐다.
-
구혜영이 만난 정치 이희호 여사 인터뷰 “DJ 특별히 보고 싶진 않아요, 하하하…생일날 가장 많이 생각나” 지난 1일 찾은 서울 동교동 178-1번지 자택 대문에는 ‘김대중·이희호’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붙어 있었다. 1963년 이사한 뒤 ‘동교동 감옥’으로 불릴 때나, ‘대통령의 사저’였을 때나,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후 9년이 지난 지금도 문패는 그대로였다. 이 여사 인터뷰에 동석한 유시춘 작가는 “김 전 대통령이 동교동으로 이사한 다음 날, 부부 이름이 나란히 있는 문패를 갖고 왔다. 당시 사회 분위기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처음엔 당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았지만 달고 나니 동지 의식이 커졌다’며 직접 문패를 달았다”고 전했다. 3남인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굳이 저 문패를 뗄 이유가 있겠나”라며 문패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