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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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혜영의 이면 ‘한강’의 역류, 정치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환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상이 온통 한강이다.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때 문학의 희망을 다시 열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환호할 만한 사건이다. 개인적으론 노벨 문학상의 정치성이 가장 빛난 결과가 ‘한강’이라는 점이 특히 반갑고 고마웠다. 2016년 밥 딜런 수상에서 보듯 노벨 문학상의 정치성은 한 사회의 무의식과 호흡하고, 세계를 변혁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한 애정이라 할 수 있겠다. 올해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 문학상의 정치성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
구혜영의 이면 김건희라는 비극 2 지난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불거진 문자 파문은 한국 보수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대통령 직무에 개입한,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정신적·현실적으로 압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김건희라는 비극’의 글에서 윤석열 정권의 실정을 가리는 ‘김건희발’ 불의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처음 불행을 만난 듯 ‘순진한’ 분노가 필요하다고 했다. -
구혜영의 이면 ‘이재명의 민주당’, 이 지독한 균열 앞에서 처음에서 다음으로 가는 길엔 균열이 있게 마련이다. 다음, 그 다음은 진화와 후퇴를 거듭해야 다다르게 된다. 진화하기 보다 때로 바닥으로 가거나 후퇴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바닥은 뭐든 받아내고 힘이 세다. 넘어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 하고, 씨앗도 바닥에서부터 자란다. 진화의 역행이라는 균열을 이겨내기 위해선 성찰이 필요하다. 이 때 성찰은 바닥의 힘을 믿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송기원 만큼 균열과 성찰에 한 생애를 던진 이가 있을까. 특히 시는 그 인생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었다. -
구혜영의 이면 김건희라는 비극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휘젓고 있는 ‘김건희-한동훈 문자 파문’이 심상치 않다. 댓글팀 의혹까지 그야말로 일파만파 형국이다. 여당 한 중진 의원은 “심리적 분당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누가 무슨 의도로 반년이나 묵은 궁중 비사를 터뜨렸을까. 친윤(석열) 세력 기획설이 근거 있게 들린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 장예찬 전 최고위원의 잇단 폭로, 연판장, 기자회견 논란까지 기획설을 뒷받침하는 실행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이런 내막들이 사실이라면 친윤 기획설은 총선 참패 후 지속되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봐야 한다. 윤 대통령이 거부한 채 상병 특검법을 한 후보가 (조건부) 찬성했는데도 지지층은 한 후보 편을 드는 현실까지, 여권 주류의 공포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래서 용산 묵인하에 총선 책임론으로 한 후보를 흠집내 판 흔들기에 나섰단 것이 친윤 기획설의 핵심이다. -
구혜영의 이면 신경림의 당부 격변기 세계사의 위대한 정치인 중엔 시인들이 많다. 유럽의 대혁명기, 중남미의 반독재 저항사엔 파블로 네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체 게바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불의·부조리에 누구보다 예리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시와 정치가 가까웠던 것엔 언어로 시대정신을 만들었던 유사성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최초의 예언자, 공적 발화자로 불렸다. 차이가 있다면 시는 인간의 내면을, 정치는 공동체의 내면을 향한다는 점이다. 광주정신이 지배하던 우리의 1980년대도 시의 시대였다. 김남주, 김지하, 박노해, 백무산 등이 기수였다. 이들은 군사독재의 질곡 최전선에서 자유, 민주주의, 노동해방의 깃발을 들고 영혼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졌다. 당시 국문학과 출신의 학생운동 리더들이 많았던 것도 “당대의 사회적 요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지닌”(마야콥스키) 시의 과업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니 시인을 어찌 정치인, 전사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
구혜영의 이면 총선이 지운 이름 ‘민주시민’ 알렉시 드 토크빌은 “선거에 의한 대의 공화제가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공익 논쟁의 무대가 민주주의이고, 이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을 다투면서 공익을 합의하는 게 정치(선거)라는 뜻이다. 이번 총선은 오래된 속설을 멀찌감치 비켜갔다. 가장 나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한 정치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체인벨트 역할을 포기한 (무쟁점) 정치. 어디에도 정치와 민주주의의 권위는 없다. 한 정치학자는 “모든 정당, 보편적인 정치가 붕괴됐음을 확인한 첫 선거”라고 한탄했다. 주권자 입장에선 더 나쁜 세력을 막기 위해 덜 나쁜 세력에게 표를 준 선거로 변질됐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했던 기존 선거와 달리 최악을 면하기 위해 차악을 골라야 했던 것이다. 차악이라 해도 ‘악’은 악이다. 악이 만들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있을 리 없다. 선거 내내 자질 논란을 빚었던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지역구에서 승패 득표 차(2377표)보다 무효표(4696표)가 더 많았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도 총선 2주가 지나도록 승자의 성찰도, 패자의 반성도 없다. -
이제 주권자의 시간이다 4·10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28일 개막됐다.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출발한 여야는 각각 ‘심판론’을 호소하며 본격적인 선거전에 나섰다. 국민의힘은 ‘이(재명)·조(국) 심판’을 앞세워 ‘거야 심판론’을 지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범죄자 세력이 선량한 시민들을 지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이·조 심판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
구혜영의 이면 박용진이 드러낸 어떤 상처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엎드린 그를 보며 착잡했다. 2011년 혁신과통합 합류 뒤 그는 민주당의 대변인, 재선 의원으로 활동했다. 오래전 “노무현 정신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 그의 자책은 14년차 당원 정체성의 기반이 됐다. 너럭바위를 짚고 주저앉은 그의 등은 꽤 오래 굽어 있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22대 국회로 가던 그의 발걸음은 지난 19일 결국 끊겼다. -
여적 민주당의 인재영입 ‘유감’ 선거 때마다 다양한 인사들이 여야의 얼굴로 나선다. 그 정당의 지향·가치에 부합하는 공천을 하고, 그런 인사를 내세워 선거에 임해야 하는 건 인재 영입의 중요한 원칙이다. 그래야 민주주의도 강화되고 사회를 개혁·통합하는 정당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정당은 ‘모셔 오려는’ 인재들에게 영입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영입된 인재들이 그 정당의 노선·비전을 상징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인재 영입이 정당 혁신, 정치 개혁의 결과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경향의 눈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싫다’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젊은 여성들은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죄와 벌)라는 구절을 소환하며 김수영을 여성혐오 시인의 첫 줄에 세웠다. 반면 2013년 무렵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 대자보가 나붙던 시절엔 언론자유를 다룬 그의 시(김일성 만세)를 패러디한 글이 쏟아졌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4·19 혁명과 반동을 겪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포로수용소에 2년이나 갇혔던 자신을 친공 포로도, 반공 포로도 아닌 민간 억류인이라 했던 것처럼. 적당히 뭉개지 않고 평생을 시대의 이분법과 싸운 현재진행형의 시인 김수영은 그래서 가장 정치적인 시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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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비례 1번’의 탈당 2004년 총선에서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복수의 정당과 다양한 각계 대표자들을 국회로 진출시켰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소속 정당 지지자를 대표하는 대리인 성격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비례 1번은 여야의 지향점·비전을 대표하는 ‘대리인 1호’로 간주된다. 비례대표 1번의 탈당, 그것도 진보정당 비례 1번이 당을 떠나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정당 정치 퇴행일 뿐 아니라 진보정당 가치를 최선두에서 부정하는 ‘치명적 사건’이다. 정의당 비례 1번, 류호정 의원이 15일 탈당을 선언했다. -
경향의 눈 이재명이 버려야 할 아홉켤레 구두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박정희 정권 개발독재에 맞섰던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을 다뤘다. 서울 도심개발 지역에서 쫓겨나 광주대단지로 강제 이주된 주인공 안동 권씨에겐 윤기 나는 구두 열 켤레가 있었다. 딱지에 불과한 전매입주권, 칠흑 같은 루핑집, 갚을 길 없는 토지취득세 고지서. 이런 진흙탕 같은 삶과 반짝이는 구두 꾸러미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페르소나를 품고 살았던 권씨였다. ‘이래 봬도’ 대학 나온 사람 권씨와 ‘광주대단지 토지불하 가격시정 투쟁위원회’ 위원장 권씨라는 간극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