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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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제3시민’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 ‘대표’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허락된 특권인가. 거대 양당이다. 양당을 지지하는 제1·제2 시민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이 진영을 나눠 사활적 투쟁을 벌이는 동안,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제3의 시민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지방민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상력은 서울에서 시작해 서울로 끝난다. 돈도 일자리도 문화도 청년도 수도권에 몰린다. ‘지방자치’라는 말이 있다. 지방이 자율적으로 삶을 설계하고 실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방은 그럴 힘이 없다. 지방민은 투표권을 가졌으나 자신들의 대표를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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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더러운 정치 vs 고결한 반정치 김부겸을 두고 논쟁을 했다. 출마 선언을 한 뒤 권력자처럼 웃고 있는 정청래와 손잡고 찍은 사진을 예로 들며, 한국 정치의 ‘절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말마따나 득의양양한 정청래 옆에서 김부겸은 기뻤을까. 필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김부겸에겐 ‘수모’와 ‘책임감’의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그 수모를 잊지 않고 정치를 바꿔보겠다는 책임 있는 결심, 그것이 고결함과는 거리가 먼 사진 속 김부겸의 손에 쥐여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치에서 ‘더러운 손(dirty hands)’은 늘 뜨거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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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신종 정치 지배계급 9월10일 ‘세계자살예방의날’이 되면 국회에서는 ‘자살예방유공자표창’ 행사를 한다. 아이러니다. 자살률이 줄었다면 모를까 현실은 그 반대이니 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은 한국이 가장 높다. 20년째 1위다. 우리를 뺀 국가들의 자살률은 꾸준히 줄었다. 최근 20년 평균을 계산하면 10만명당 10명 정도다. 우리는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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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한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2세기 전 민주주의는 ‘신분질서 폐지’를 뜻했다. 1835년 출간된 토크빌의 <미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엔 이미 세습 군주와 귀족이 없었다. 프랑스 귀족 출신 토크빌이 보기에 신분 불평등의 종식은 피할 수 없는 ‘섭리’ 같았다. 1세기 전 민주주의는 ‘재산에 따른 권리 부여 제도의 철폐’를 의미했다. 한 지역이 걷은 세금의 크기로 의원 수를 결정했고, 재산 없는 이는 투표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영국에서 재산에 따른 선거권 제한이 철폐된 것은 1918년이었다. 1원 1표에서 1인 1표로 바꾸는 것, 그것이 당시의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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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김병기와 루바쇼프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은 당과 개인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정치 소설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김병기처럼 정보기관 출신이다. 권력서열 2위까지 올라간 그가 어느 날 반역 혐의로 심문을 받는다. 심문의 목적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받아들여 당과 혁명의 대의를 지키라는 것, 심문관은 일관되게 그것을 요구한다. 더불어민주당의 박지원도 김병기에게 같은 것을 말했다. “선당후사의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라. 안 그러면 “당이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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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정치적인 것과 민주적인 것의 분열 정치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정치해서는 안 될 성품과 도덕성을 가진 이들이 국회를 이끌고 정당을 대표한다. 그들이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는지가 경이로울 뿐, 정치가답게 정치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사태의 일면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금 정치를 이끄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지지자를 가진 사람들이다. 쿠데타로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니고 내란으로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당심’이든 ‘민심’이든 지지 여론을 불러일으켜 선출되었다. 정치가로서 그에 합당한 자질과 품성, 실력을 갖췄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민주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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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민주당이 만들려는 세상 정청래 대표의 말만 들으면, 민주주의는 목소리 큰 당원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서바이벌 게임 같다. 여론조사든 당원 총투표든 오로지 이겨야 살아남는다. 쪽수 많은 쪽이 권력을 갖는 게 ‘당원 주권 민주주의’ 아닌가. 이런 관점의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인 것은 맞지만, 대신 삭막하고 편협하다.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이끌 정당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고 도덕적 질문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그런 민주주의관에서는 생각이 다른 당원·대의원·의원을 윽박지르고 싶은 열정, 그것밖에는 느껴지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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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국회의 문제 국회의 역할에 회의감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대개는 의원의 인성을 탓하는 개탄조 얘기다. 그렇게라도 여론을 형성해 제재하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인성론에 한정된 비난은 잠깐이다. 사과하고 비켜 있으면 그만이다. 부여된 권한의 크기에 맞게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의심 대상·폭정 주체가 된 의원들 국회의원은 헌법으로 보장된 정치제도이자 국가기관이다. 개인이 제도이자 기관인 경우는 최고 행정관인 대통령과 입법자인 의원뿐이다. 헌법 제41조는 의원의 권력이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기에 발생한다고 적시한다. 인민주권의 원리가 우선 적용되는 공직자는 의원이지 대통령이 아니다. 헌법 제46조에 따르면 의원은 독립 기관이다. “청렴의 의무”가 있고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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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윤석열을 양산하는 정치 대학병원은 인간을 겸손하게 한다. 아픈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환자와 그 곁을 지키는 이들, 떠날 사람과 남겨질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우리가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조용히 생각해본다. 그러다 보호자 대기 공간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국회 법사위 장면을 보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대체 언제까지 저런 정치를 인내할 수 있을까. 양당 독과점 정치도 지켜보기 괴로운데, 제3당과 위성 정당의 정치인들까지 우리를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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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예의 있는 민주주의 여야가 있는 다원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확고한 합의다. ‘일당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중국과 다르다. 인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한 지도자의 의지에 체제 운영을 맡기는 러시아식 ‘주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여야의 경쟁과 정권의 교체가 허용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우리 관점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다.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은 ‘야당 무시’에서 비롯되었다. 박근혜는 야당과 국회를 꾸짖어달라며 국민 서명운동에 나섰다. 윤석열은 야당과의 대화를 감정적으로 거부했고 국회의 권위를 조롱하며 불법계엄을 도모했다. 그들은 여와 야 사이에서 일을 풀어가는 법을 몰라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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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국민 임명식’ 유감 오래전 조국 장관 후보의 ‘국민 청문회’ 주장만큼이나, 새 대통령의 ‘국민 임명식’ 발상은 과하다. 국회가 인정한 장관이 아니라 국민이 적격 판정한 장관이 되겠다는 것은 황당했는데, “당신을 나의 대통령으로 임명한다!”라고 선포할 이번 국민은 또 누가 될까. 국회에서의 취임식이 “약식”이고 “간소”해서 임명식이 필요하다는 설명은 의아하다. 대통령 취임식은 헌법 제69조에 따른 절차다. 핵심은 ‘취임 선서’에 있다. 목적에 맞게 권력을 제한해 쓰겠다는 공적 약속을 해야 대통령직의 헌법적 정통성이 발생한다. 그 합당한 절차를 거쳤기에 약식이 아니라 정식이었고, 간소해서 아쉽다면 축하 행사를 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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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정당의 변형 민주당 원내대표 선출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승리한 후보는 1987년 국가안전기획부에 입사해 25년을 일하다 정치에 입문한 3선 의원이다. 그가 꺾은 경쟁자는 같은 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운동권 출신 4선 의원이다. 선출 과정에서 논쟁은 없었다. 두 후보 모두 대통령을 위해 일을 잘해내겠다고 했다. 경쟁이 아니라 간택해달라는 요청에 가까웠다. 대통령의 국회 정무수석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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