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
작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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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삶의 상세 주소 물건을 구매하고 배송지에 주소를 적는다. 주문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필수 기재 항목을 다 채우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뜬다. 상세 주소란이 문제다. 우리 집은 마을 이름과 번지수가 전부인데, 그 빈칸에 뭘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파란 창고와 푸른 잎이 올라오기 시작한 대추나무가 있는 집.’ 제법 마음에 드는 상세 주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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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기차가 오지 않는 간이역에서 ‘아탕드르(Attendre)’는 ‘기다리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다.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아드-텐데레(ad-tendere)’로, ‘~을 향해 몸을 뻗다’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우리말의 ‘기다림’이 정적이고 수동적인 인내를 연상시킨다면, 아탕드르는 무언가를 향해 몸과 마음을 뻗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전제한다. 즉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확장하는 유연한 운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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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3월의 숨 겨우내 언 땅에 시큰둥했던 강아지가 온종일 마당에 나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번씩 얼굴과 발을 씻겨야 한다. 무른 흙을 밟고 다니며 곳곳에 코를 파묻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따라 나도 흙을 한 줌 쥐고 코를 가까이 대본다. 미지근해진 흙에서 약간의 단내와 옅은 시큼함이 올라온다. 살아 있는 것의 냄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강아지가 귀를 쫑긋 세운다. 뿌리들이 내뱉는 숨소리가 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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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기억이라는 장소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자란 시장에서는 그를 박스 아저씨 혹은 박씨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자전거로 박스를 날랐고, 우리 집 앞 골목 끝에서 실어온 박스들을 정리했다. 아이였던 나는 그가 주운 박스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일을 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 찬 바닥에 앉아 물건을 팔던 사람들처럼 골목에 쌓인 박스와 아저씨의 자전거 역시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자 삶이었다. 삶. 한 음절 안에 자음과 모음과 받침이 서로를 꽉 움켜쥐고 있는 단어. 나는 지금도 그 단어를 말할 때면 소쿠리에 담긴 채소나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들,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골목을 달리던 아저씨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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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국가창업시대’와 저무는 학력사회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창업시대”를 선언하며, 전통적인 방식의 일자리 창출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고용 중심에서 창업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또 하나의 진부한 창업지원정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앞으로 전문직과 생산직을 막론하고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잡아먹는 ‘AI 기본사회’에 대한 적극적 대비책으로 읽혀야 한다. 창업이 그 위험성으로 인해 여전히 기피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일자리 창출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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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다른 이름의 희망 새해 첫날, 프랑스에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 해돋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둑길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희망의 장면을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 섞여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근황을 전하는 글보다 사진 한 장과 동영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그는 휠체어에 앉아 일곱 살 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야윈 얼굴이 낯설었다. 이어진 영상에서는 그가 혼자 휠체어에 앉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 팔을 두 발처럼 쓰는 일이 힘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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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가장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어릴 때 쓰던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있었다. 그 작은 구체는 내게 세계를 한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줬다. 지구는 작고 둥그니까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여행자가 됐다. 유럽의 국경을 마음껏 넘었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게 세계는 지구본만큼 작았고, 딱 내 보폭만큼 넓어 보였다. 내가 밟은 모든 땅은 여행자에게 호의적이었고, 나는 불편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낯섦’을 즐겼다. 더 넓은 선택지, 더 먼 거리, 더 많은 나라.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얼마나 많이 점유하느냐로 측정되는 듯했다. 각 나라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념품을 사면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낯섦’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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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계절의 언어 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기온의 변화일까, 옷차림일까. 어쩌면 스마트폰일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패딩 점퍼 파격 세일’을 알리는 광고 문자가 온다. 스마트폰의 창을 열면 이미 한겨울이다. 내 방 창문보다 먼저 눈앞에 계절을 펼쳐놓는다. 겨울의 입구다. 지갑을 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계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올빼미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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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돌아온 사람 추석 연휴 내내 동네가 북적였다. 컴컴했던 집들이 불빛으로 환해지고, 적막하던 골목에는 늦은 밤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아무리 먼 곳에 터를 잡고 살아도 고향집에 온 사람들은 ‘돌아온’ 사람들이다. “저 왔어요.” 낯선 목소리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파서 자리에 누웠다던 이웃 할머니가 골목 앞에 나와 있다. 노인의 얼굴이 아니라 아이를 마중 나온 젊은 엄마의 얼굴로. 중년의 남성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웃는다. ‘돌아온다’는 말에는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의 회귀도 담겨 있는 모양이다. 직선으로 흐르던 시간이 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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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장소의 얼굴을 그리는 방식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고 글을 쓰며, 강아지와 메리 올리버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친구가 내게 보낸 첫 번째 메일에는 메리 올리버의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으며 친구가 시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친구는 눈이 아닌 손끝으로 글을 읽는다. 여섯 개의 작은 점을 만져 문자를 식별한다. 메리 올리버의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점자 키보드를 보여준 적이 있다. 간단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마법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키보드에서 글자가 튀어나오고, 손바닥에 작은 등불이 켜져 글자가 환해지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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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초보 살림꾼의 꿈 매일 세 끼를 짓는다. 초보 농사꾼이 마당에서 수확한 못생긴 가지, 호박, 토마토와 지역에서 생산한 쌀, 달걀이 주재료다. 끓이고, 굽고, 찌고. 마음도 손도 바쁘지만, 결과물은 언제나 소박하다. 두 식구 먹을 밥을 짓는 일이 이렇게 고된 일인 줄 몰랐다. 어릴 적에는 ‘밥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세 끼 밥상이 족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보상이나 성취감도 없이 노동력만 소모하는 일이라 여겼다. 아마도 나는 살림이 지극히 수동적 행위라 오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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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여름 낮잠은 보약 좋아하는 여름 풍경에는 낮잠 자는 사람들이 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아주머니, 파리채를 손에 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슈퍼 사장님, 가지를 말리는 평상 위에서 고양이와 나란히 잠든 할머니. 무더위가 잠시 주춤해진 7월의 오후, 동네 곳곳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에는 빠뜨리지 않고 낮잠을 잤다. 점심을 먹고 몸이 나른해지는 오후 두 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여름 이불을 깔았다. 깃털처럼 얇고 몸에 닿으면 기분 좋게 까슬까슬했던 그 이불 위에 누우면 이마 위로 바람이 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 줌의 바람, 그 바람의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주던 엄마의 부채질, 여름 낮잠은 보약이라던 엄마의 말. 인생에서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 있다면, 그건 여름날의 낮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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