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
작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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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다른 이름의 희망 새해 첫날, 프랑스에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 해돋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둑길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희망의 장면을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 섞여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근황을 전하는 글보다 사진 한 장과 동영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그는 휠체어에 앉아 일곱 살 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야윈 얼굴이 낯설었다. 이어진 영상에서는 그가 혼자 휠체어에 앉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 팔을 두 발처럼 쓰는 일이 힘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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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가장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 어릴 때 쓰던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있었다. 그 작은 구체는 내게 세계를 한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줬다. 지구는 작고 둥그니까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여행자가 됐다. 유럽의 국경을 마음껏 넘었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게 세계는 지구본만큼 작았고, 딱 내 보폭만큼 넓어 보였다. 내가 밟은 모든 땅은 여행자에게 호의적이었고, 나는 불편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낯섦’을 즐겼다. 더 넓은 선택지, 더 먼 거리, 더 많은 나라.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얼마나 많이 점유하느냐로 측정되는 듯했다. 각 나라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아가고, 기념품을 사면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낯섦’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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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계절의 언어 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기온의 변화일까, 옷차림일까. 어쩌면 스마트폰일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패딩 점퍼 파격 세일’을 알리는 광고 문자가 온다. 스마트폰의 창을 열면 이미 한겨울이다. 내 방 창문보다 먼저 눈앞에 계절을 펼쳐놓는다. 겨울의 입구다. 지갑을 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계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올빼미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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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돌아온 사람 추석 연휴 내내 동네가 북적였다. 컴컴했던 집들이 불빛으로 환해지고, 적막하던 골목에는 늦은 밤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아무리 먼 곳에 터를 잡고 살아도 고향집에 온 사람들은 ‘돌아온’ 사람들이다. “저 왔어요.” 낯선 목소리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파서 자리에 누웠다던 이웃 할머니가 골목 앞에 나와 있다. 노인의 얼굴이 아니라 아이를 마중 나온 젊은 엄마의 얼굴로. 중년의 남성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웃는다. ‘돌아온다’는 말에는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의 회귀도 담겨 있는 모양이다. 직선으로 흐르던 시간이 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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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장소의 얼굴을 그리는 방식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고 글을 쓰며, 강아지와 메리 올리버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친구가 내게 보낸 첫 번째 메일에는 메리 올리버의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으며 친구가 시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친구는 눈이 아닌 손끝으로 글을 읽는다. 여섯 개의 작은 점을 만져 문자를 식별한다. 메리 올리버의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점자 키보드를 보여준 적이 있다. 간단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마법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키보드에서 글자가 튀어나오고, 손바닥에 작은 등불이 켜져 글자가 환해지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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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초보 살림꾼의 꿈 매일 세 끼를 짓는다. 초보 농사꾼이 마당에서 수확한 못생긴 가지, 호박, 토마토와 지역에서 생산한 쌀, 달걀이 주재료다. 끓이고, 굽고, 찌고. 마음도 손도 바쁘지만, 결과물은 언제나 소박하다. 두 식구 먹을 밥을 짓는 일이 이렇게 고된 일인 줄 몰랐다. 어릴 적에는 ‘밥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세 끼 밥상이 족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보상이나 성취감도 없이 노동력만 소모하는 일이라 여겼다. 아마도 나는 살림이 지극히 수동적 행위라 오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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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여름 낮잠은 보약 좋아하는 여름 풍경에는 낮잠 자는 사람들이 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아주머니, 파리채를 손에 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슈퍼 사장님, 가지를 말리는 평상 위에서 고양이와 나란히 잠든 할머니. 무더위가 잠시 주춤해진 7월의 오후, 동네 곳곳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에는 빠뜨리지 않고 낮잠을 잤다. 점심을 먹고 몸이 나른해지는 오후 두 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여름 이불을 깔았다. 깃털처럼 얇고 몸에 닿으면 기분 좋게 까슬까슬했던 그 이불 위에 누우면 이마 위로 바람이 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 줌의 바람, 그 바람의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주던 엄마의 부채질, 여름 낮잠은 보약이라던 엄마의 말. 인생에서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 있다면, 그건 여름날의 낮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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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비에 지지 않는 것 장마다. 올해도 폭우가 예상된다는 예보에 겁부터 난다. 작년 이맘때쯤, 반려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비가 샜다. 천장에서 주룩주룩. 할머니 소유였던 가게에 카페를 차린 지 3년이 되어간다. 엄마가 평생 장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람으로 치면 일흔 살 노인쯤 될 것이다. 한때는 번화가의 중심이었고, 이제는 구도심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곳. 사람도 공간도 노화는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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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초록의 이름을 부를 때 밤새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마당에 심은 상추, 오이, 가지가 걱정돼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짙은 풀 냄새가 달려들었다. 지난밤에 쏟아진 게 비가 아니라 초록이었을까. 텃밭의 풀도 나무도 색이 깊어졌다. 초록은 밝기가 아니라 깊이로 말해야 하는 색이다. 광합성의 농도가 아니라 잎의 생애가 반영된 색. 빗물에 떠내려온 것들을 치우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이웃집 할머니 밭으로 들어가는 동네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얼마 전까지 할머니 손에 들려 있던 호미를 들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아흔 노인이 평생 손에 쥐고 있던 호미를 내려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듯하다. 할머니 텃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 밭처럼 돌본다. 한마을에서 같은 계절과 풍경을 오래 나눈 사이란 그런 것일까. 자주 이사를 했던 내게 ‘이웃’이라는 말은 여전히 속뜻을 알 수 없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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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봄에 알게 되는 것 지난주에는 퇴근길에 차가 막혔다. 일 년에 한 번, 벚꽃이 만개할 때 겪는 일이다. 만경강의 벚꽃을 보려고 몰려든 이들이 차창을 열고 천천히 달렸다.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벚나무 아래 해사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나. 그 길에서 조급한 건 꽃잎뿐이었다. 왜 그리 빨리 떨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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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강의 울음 겨울 끝에는 무리 지어 나는 새들과 함께 걸었다. V자를 그리며 비행하던 새들은 만경강 주위를 몇번씩 돌았다. 떠나기 전 비행 연습이자 집단 결속의 몸짓이라지만 사람의 눈에는 영락없는 작별 인사로 보였다. 며칠 전에는 무리에서 낙오된 세 마리의 새를 봤다. 그게 마지막이었을까. 이제 철새가 보이지 않는다. 만경강은 철새들의 겨울 집이다. 겨울에는 사람보다 새가 많고, 사람보다 새가 더 크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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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존재를 비추는 장소 마을을 걷다 보면 오래된 이층 목조 주택이 눈에 띈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가문이 일제강점기에 춘포의 농지를 매입하며 지은 농가다. 시골집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그 집의 이국적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춘포의 또 다른 이름, 대장촌이 떠오른다. 큰 농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본인 지주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지우려 했지만,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의 입에 붙은 건 춘포가 아니라 대장촌인 듯하다. 한 장소에 새겨진 역사는 언어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내게도 그런 언어가 있다. 다라이, 땡깡, 요지, 단도리 같은 일본어. 할머니에게서 배운 말이다. 의식적으로 지웠으나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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