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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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다시 5월이다 유치원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걷다가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어딘가로 들어갔고, 엄마도 내 손을 잡고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뛰던 엄마가 내 손을 놓쳤다. 겁에 질려 멍하니 서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어두운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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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새로운 날은 과거의 실수를 제물로 삼아 온다 햇볕이 부쩍 맑고 따뜻해졌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니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마흔 중반을 훌쩍 넘겼으니, 봄꽃을 본 날이 어쩌면 봄꽃을 볼 날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더 곱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번 봄꽃이 유난히 반가운 것은 겨울이 그만큼 추웠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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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작센하우젠의 실험대 공무원 역사 시험 ‘일타강사’가 눈물을 흘리며 연단에 서서 탄핵 반대를 외치는 뉴스를 보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이 있었다. “어떤 교사도 역사 교육의 목적이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특정한 날짜와 사실들을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건으로 보이는 그 결과들의 원인이 되는 힘들을 찾고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출처는 <나의 투쟁(Mein Kampf)>. 저자는 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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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사라지는 공간의 역사,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 동두천 성병관리소까지 가는 길은 몇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전과는 달리 건물에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철조망에는 철거를 반대하는 표지판과 현수막, ‘사유지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2023년 소요산 관광 사업을 위해 성병관리소 건물을 해체하겠다는 동두천시의 발표 이후 달라진 풍경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철조망 주변을 빙빙 돌면서 최대한 건물을 담아보려고 애썼다. 필름 현상 후 스캔을 한 사진 속 동두천 성병관리소, ‘옛 낙검자 수용소’는 예전에 바다였던 장소가 증발해 드러난, 오래전에 가라앉은 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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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모두가 작품이 될 필요는 없다 설이 오기 전에 도쿄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세 군데의 전시장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회고전 ‘소리를 보다, 시간을 듣다’를 보기 위해 도쿄도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까지는 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 주변에 아기자기한 카페나 잡화점이 많아서 발길이 닿는 대로 골목을 걸어보기로 하고 동네를 기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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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푸른색 한 줄기 에밀리 디킨슨의 시 ‘푸른색 한 줄기(A Slash of Blue)’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황금의 물결 ― 하루의 둑 ― 바로 아침 하늘을 만들어내는 것.(A Wave of Gold - A Bank of Day - This just makes out the Morning Sky.)” 에밀리 디킨슨은 서쪽으로 지는 해의 황금빛과 서서히 다가오는 밤의 푸른빛이 섞인 저녁 하늘을 묘사하면서, 일몰의 태양이 다음날을 만들어낸다고 노래한다. 떠오르는 해는 일반적으로 희망이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일출 사진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새로운 시작, 떠오르는 희망, 어쩌면 새해에는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러나 해가 떠오르기 위해서는 그 전날 해가 사라져야만 한다. 아침 하늘의 청량한 빛은 황금의 물결과 푸른빛이 섞인 황홀하고도 차가운 저녁을 거쳐야 올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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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고맙다는 말에 담긴 함께 사는 세상 20대 후반 업무로 알게 된 분이 있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 e메일을 드렸는데, 아주 상세하게 답변을 보내주셨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발신자의 이름과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낯섦이었다. 분명히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감사하다는 인사로 끝을 맺다니.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번 더 메일을 주고받으니 나도 뭔가 그분이 감사해야 할 일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도 요청받은 일들을 메일로 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끝에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를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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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희망은 있다, 연대하는 마음 안에 멀티 유니버스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계엄령이 떨어졌고, 무장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했다. 군인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잠입해 서버를 확인했다. 소식을 재빠르게 접한 시민들이 입구를 봉쇄한 군인들과 대치했고, 야당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갔다. 국회 본회의장을 지키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며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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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선택된 피사체, 결국 진실의 일부일 뿐 2024년 12월3일은 여러모로 역사에 남을 날이다. 대통령의 긴급 담화 이후 45년 만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눈이 조금만 와도 울리던 재난문자는 잠잠했다. 갑자기 선포된 계엄령은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6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시작도 끝도 지독하게 급작스러웠다. 3일 저녁,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왓츠앱 메신저가 계속 울렸다.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울리는 진동에 메신저를 켜 내용을 확인해보니 영국과 미국 친구들이 나의 안전을 묻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계엄령이 발표되었다는 기사가 속보로 뜨고 있었다. 현지시간으로 한낮에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친구들이 BBC와 CNN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에 놀라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나중에 유튜브로 해외 보도를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국회 앞 풍경만 보도되다 보니 전쟁이라도 난 듯 무섭고 위험해 보였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포위하고 있고 시민들이 국회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급하게 국회 담장을 넘는 국회의원들과 항의하는 국회의원에게 총구를 겨누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보도되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안전하게 있으라는 친구들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나니 미디어에 비치는 현실이 과연 다 진실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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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나’와 함께하는 ‘우리’를 알게 해준 ‘깍두기’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건축 연도가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지나다가 놀이터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 오후 네 시쯤이면 하교 후 숙제를 마친 아이들이 놀이터로 하나둘씩 모였다. 저녁밥을 먹기 전까지 아이들은 놀이터에 모여 신나게 놀았다. 놀이터에는 각자의 영역이 있었다. 여자애들은 주로 편을 갈라 고무줄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납작한 돌을 세우고 돌을 던져 쓰러뜨리는 비사치기나 막대로 나무토막을 멀리 보내는 자치기를 하곤 했다. 남녀 구분 없이 술래잡기나 망줍기 같은 놀이를 하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거나 체력이 좋은 아이들은 정글짐에 빨리 올라가기처럼 단순한 놀이를 하기도 했다. 각자 제일 친한 친구는 있었지만 팀을 나누는 놀이를 할 때는 자연스럽게 규칙에 따라 편을 갈랐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어린 동생들에게 놀이의 규칙을 알려주었고, 새로운 아이가 이사 오면 같이 놀면서 얼굴을 익히는 장소도 놀이터였다. 어른들이 정해둔 규칙이 아니라 어울리면서 만들어내는 아이들만의 규칙이 동네마다 자연스럽게 생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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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노동의 가치는 어디로 갔는가 1993년 개통된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이다. 총 800m 길이로 18대의 에스컬레이터와 3대의 무빙 워크로 이어져 있다. 에스컬레이터 중간마다 여러 개의 출구가 있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가능하다. 매일 수천명이 이용하는 이 기계는 홍콩의 혁신을 상징한다. 홍콩의 가파른 지형을 보완해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 홍콩 시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에스컬레이터 주변의 식당과 바, 아기자기한 상점들은 자연스레 관광지가 되었다. 왕가위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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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맥락을 파악한다는 것, 결국은 독서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강의 작품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했다. 발표되자마자 각계 반응은 뜨거웠다. 가장 격렬히 환영한 곳은 역시 출판계였다. 수상 발표 후 일주일 만에 한강의 책 판매량이 100만부를 돌파했고, 반동효과로 전반적인 문학서적의 판매율이 같이 오르고 독서모임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책에 대한 환영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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