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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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모든 것을 살리는 힘, 물 세밑에 서서 2025년을 돌이켜본다. 신년부터 탄핵과 관련해 정치권이 어지러웠고, 2024년 12월부터 이어진 정치적 사태들로 봄을 봄답지 못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조기 대선을 치렀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청문회와 폭로가 피곤하기도 했지만, 문화 면에서 기쁜 일들이 있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한국을 찾는 해외 방문객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이어지는 고민들도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도 걱정스럽고,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에 고층빌딩이 세워지기로 결정이 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인 종묘의 경관이 망가지게 될까봐 속상하다. 새해에는 모든 게 순리대로,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책을 읽다가 노자의 상선약수가 머리를 스쳤다. -
루페로 보는 시선 바다를 닮은 얼굴, 제주의 가장들 11월 중순, 제주도 세화에서 운영하는 워케이션 프로그램에 다녀왔다. 바다가 보이는 공간도 마음에 들었지만, 운영 프로그램 중 ‘해녀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끌렸다.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주도에 매해 가서 사진을 찍었고 해녀 박물관에도 갔었지만, 해녀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한 경험은 없었다. 해녀라는 직업은 독특하다. 가부장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노동력이나 번식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주 해녀들은 남성의 노동력을 제압할 정도로 많은 수익을 내니 분명 대접을 받아야 할 텐데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의문이었다. 드라마로 소비되는 해녀들의 모습은 가난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이거나 불우한 운명의 주인공일 뿐, 해녀의 항일운동 역사나 그들의 업적은 뭉뚱그려진 채 캐릭터로만 그려진다고 느껴졌다. -
루페로 보는 시선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한 청년이 사망했다. 과도한 노동의 결과다. 그의 부고를 접하자마자 슬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 독일 언어학자 로렌츠 디펜바흐가 1873년 출간한 소설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산업화 초기 빈곤과 불안이 가득한 독일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윤리를 제시한다. 주인공 프리드리히는 노동의 가치를 천시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
루페로 보는 시선 데마고그에서 유튜브까지 업무차 마산에 갔다가 김주열 동상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들렀다. 1960년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죽음은 2차 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를 흔히 ‘피로 쓰인 민주주의 역사’라고 한다. 가끔은 의문이 든다. 민주주의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쟁취하는가. -
루페로 보는 시선 혐오는 누군가의 작은 손짓부터 시작한다 장면 하나. 대학원 시절 도심으로 향하는 새벽 4시의 야간 버스 안, 나는 유일한 동양인 승객이었다.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는 흑인 승객들은 내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나를 바라봤다. 무서웠다. 마치 낯선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장면 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마지막 뮤지컬을 보고 자정이 넘은 시각,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내가 탄 칸에는 흑인 남자와 나, 둘뿐이었다. 네 정거장 동안 나는 속으로 저 남자가 착한 사람이기를, 그가 손을 꽂아 넣은 주머니에 총이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해치지 말아줘, 속으로 말하면서. -
루페로 보는 시선 우리는 서로에게 타자다 한 청년이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에는 트라우마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어 ‘신체적 상처’에서 유래된 단어 ‘트라우마’는 19세기에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며 연구하던 심리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가 심리적 충격이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심리적 외상 또는 정신적 외상의 개념으로 확장됐고,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라는 개념이 대중화됐다. -
루페로 보는 시선 젊음은 마음으로부터 늙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한다. 당연하다. 인간에게 죽음은 숙명이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생명 연장과 함께 젊음에 대한 욕망이 트렌드다. 중년에 접어든 40대는 ‘영포티(Young Forty)’라는 신조어를 붙여 ‘늙지 않음’을 강조하고, 인터넷만 연결하면 동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성형 광고를 볼 수 있다.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어려 보이는 화장, 패션 콘텐츠가 흥한다. 젊어 보이려는 노력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젊음이 왜 외모에만 적용되는지 의문이다. -
루페로 보는 시선 보이지 않는 로드블록 길을 가다가 갑자기 살해 위협을 받는다면, 길에서 나눠주는 물품을 받으려고 서 있다가 갑자기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로드블록(roadblock)은 도로에 설치된 물리적 장애물, 진행을 방해하는 심리적 방해물을 뜻하는 단어다. 1994년 르완다 투치족에 대한 집단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세타: 로드블록 너머(Iseta: Behind the Roadblock)>를 보면 도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후투 민병대가 투치족을 마체테로 학살하는 장면이 그대로 등장한다. 길에 널린 시체들과 시체 앞에서 춤을 추는 민병대의 모습은 끔찍함 그 자체다. 르완다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전형적인 사례로 민족주의와 권력, 국제적 무관심이 결합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
루페로 보는 시선 제국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베를린의 상징은 곰과 베를린 전승탑이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난 다음부터 그렇다. 높이가 66.89m인 탑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치장된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탑은 프로이센이 연달아 세 차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강한 나라를 꿈꿨던 프로이센은 결속된 독일 민족과 독일 제국의 확장을 꿈꾸며 베를린 전승탑을 만들었다. -
루페로 보는 시선 도시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없는 사람 살기엔 서울이 제일이다.” 일이 있어 용산전자상가를 지나게 됐다. 다니는 사람도 없고 건물들은 다 닫혀 있었다. 스산한 느낌이 들어 잰걸음으로 걷다가 어릴 때 들었던 엄마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최고라는. 엄마는 10대 시절 충청도 산골 마을에서 상경해 곧 여든이 되는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공부 잘하는 큰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매가 손을 잡고 대처에 나와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집안 기둥이라 믿었던 오빠의 등록금을 다 대고는 둘 다 서울 남자를 만나 서울에 정착했다. 돌아가신 이모도 그랬다. 어린 나에게 과자를 물려주며 사탕공장에서 사탕 껍질을 싸며 힘들었단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그래도 서울에서 살아 좋다고 말하곤 했다. -
루페로 보는 시선 한 사람의 투표가 바꿀 수 있는 것들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가 있다.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의리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쿠니미츠가 세상을 바꾸려는 친구의 결의에 감동해 정치에 입문하는 내용이다. 쿠니미츠의 첫 번째 임무는 낙선한 정치인의 비서가 되어 그를 작은 시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쿠니미츠가 도착한 장소는 부패한 시장이 세금을 착복하느라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지고 공공시설과 영세한 가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중이었다. 이권만 생각하는 정치인들과 마을 유지 사이의 정경유착이 굳건해 사람들은 ‘어차피 항의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살면서 몰락하게 된 도시의 모습에 쿠니미츠는 “누군가 바꿔줄 거라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점점 더 썩어간다”고 말하며 도덕적인 정치인을 돕기 시작한다. 쿠니미츠는 직접 사람들을 만나 투표를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상기시켰고, 결국 시민들의 90%가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
루페로 보는 시선 다시 5월이다 유치원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걷다가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어딘가로 들어갔고, 엄마도 내 손을 잡고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뛰던 엄마가 내 손을 놓쳤다. 겁에 질려 멍하니 서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어두운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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