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훤
작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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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새 벽과 천장 100여명이 겨우 드나드는 협소한 기차역에 들어선다. 곧 철거 예정이라고 한다. 기차역에서 지난 세 달간 만든 연극을 생각한다. <엔들링스>. 최후의 개체들이란 뜻이다. 왜 연극이 떠올랐을까.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철거되는 그것을 꿋꿋이 응시하는 창작자들이기 때문이었을까. 수십명이 설계한 그 작업 또한 곧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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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눈을 감았다 뜨면 헤엄을 무서워하는 뒤통수가 보인다. 뛰어드는 자세를 취했다가 허리를 이내 곧추세운다. 망설이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저건 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강을 향해 몸을 던진다. 수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제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인간을 들일 때도, 강은 울린다. 첫 진동은 더 작은 파동으로 이어진다. 강의 먼 데까지 한 인간의 존재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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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바다와 활주로 믿을 수 있어? 저렇게 커다란 게 우리 위로 날아다닌다는 걸? 비행기를 보던 친구가 말했다. 보잉 737이 이륙한다. 거대했던 비행기가 손톱만큼 작아진다. 이내 사라진다. 나는 이륙하는 비행기 영상을, 빠르게 활공 중인 기내에서 보고 있다. 이동 중인데도 더 멀리 가고 싶나.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곳으로 향하겠다면서 그 많은 카메라는 왜 챙겨왔나. 나는 나로부터 튕겨 나가는 사람처럼 공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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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 차를 타고 3월로 이동 중이다, 사월아. 나는 느리니까 사흘 일찍 출발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보다 더 늦게 넌 이 편지를 읽게 된다. 느린 자들은 가장 먼저 움직이는 자들이기도 하다. 어디로 움직이고 있니. 어제 나는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빨래하고 버섯을 씻고 말렸다. <고상하고 천박하게>가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요즘 시대의 책이란 게 그렇잖아. 너무 빨리 낡잖아. 몇 해 동안 쓴 원고가 출간 몇 주 만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울어진 세숫대야에 담긴 시간처럼 금세 잃어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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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눈사람의 코 입을 벌리면 하늘에서 흩어지던 싸락눈이 혀에 닿는다. 닿자마자 사라진다. 하늘 조각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구나. 입술을 뗀 채로 미숙은 눈밭을 뛰어다닌다. 미숙은 여섯 살이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몇 방울 삼키며 그게 눈 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새빨간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렇지, 그의 귀는 홍시만큼 붉고 차다. 상관없다는 듯 눈사람의 코를 만들고 있다. 코가 계속 떨어져 나가는 게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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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삶은 원래 곤란하다는 듯 “밤사이 내릴 강설로 인해 길이 미끄러울 예정이니 대중교통 이용, 눈길 미끄럼 등 주의 바랍니다.” 늦은 밤 안내문자를 받았다. 현관에 눈 삽과 장갑을 미리 챙겨놓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면 복숭아뼈만큼의 눈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이다. 사는 일이 버거웠던 시절에는 비슷한 문자를 받고 눈물이 핑 돈 적이 있다. 밤새 눈이 온다는, 하늘이 무겁고 땅이 아슬아슬하니 조심하라는 건조한 문구가 내 삶을 관통하는 무심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누구의 삶에나 악천후로 가득 찬 절기가 찾아온다. 신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면, 더 절절한 예보를 미리 발신할 만큼 막막한 시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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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얼굴이 기억 안 나는 사람 목적지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사람을 알고 있다. 일하는 동안 대개 손님을 등지고 있는 자들. 택시 기사는 근무시간 동안 가로 1.8m, 세로 1.6m의 몸을 갖게 된다. 1평이 조금 안 되는 면적이다. 하루 12시간 동안 그들은 호출받는다. 기사들은 동시에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자다. 택시를 기다렸던 누군가 올라탄다. 미터기가 돌아간다. 시민이 여기서 저기로 흐르는 동안 도시는 조금씩 재조립된다. 타지에서 온 부부, 익숙한 병원으로 향하는 노인, 광장으로 가는 젊은이가 택시에 올라탄다. 개인이 가진 소일거리와 그날 일정부터 그가 겪게 될 사회와 탑승객의 역사가 통째로 택시를 통해 운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