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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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화인 火印 우리는 더이상 자고 있지 않았다, 우울의 시계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그리고 시곗바늘은 채찍처럼 휘었다,그리고 시곗바늘은 재빠르게 뒤로 되튀어 피가 맺힐 때까지 시간을 채찍질했다,그리고 당신은 차오르는 어스름에 대해 말했다,그리고 당신 말들의 밤에 열두 번 나는 당신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밤이 열렸고 열린 채 머물렀다,그리고 나는 눈 하나를 밤의 품에 안겨주고 다른 하나는 당신 머리칼 속에 땋아주었다그리고 그 두 눈 사이에 도화선을 얽히게 했다, 열린 정맥을 ―그리고 어린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다. 파울 첼란(1920~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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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80㎝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 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 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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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벽 벽에는 푸른 하늘과 연못과 물고기도 있고 눈이 내릴 것이다 벽에는 아이가 살고 아이는 혼자 못가에 앉아서 물고기를 보고 눈이 쌓인 밤엔 빨간 물고기 금 간 벽으로 흘러나가고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하고 간장독처럼 늙은 여자 짜디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남은 벽이니까 그림을 그리는 건 어때? 아이가 말한다 물고기와 눈과 사람이 그려진 벽이 헐리기 직전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밖으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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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무한 타월 옥상에 올라가 수건을 걷었다. 수건은 참 많은 날을 기억하는군. 이건 돌잔치, 저건 9지역 축구 대회, 어느 날은 서울남부교도소 방문 기념일. 돌상 앞에 앉은 내가 지폐 대신 국수를 쥐고, 오빠가 기세 좋게 찬 공이 골대 밖으로 튕겨 나가고, 푸른 수의를 입은 아빠가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날. 수건을 나눠 주며 몰래 한숨을 쉰 엄마가 있다. 수건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오빠가 있다. 비린내가 물씬 나는 수건에 얼굴을 묻고 비는 엄마가 있다. 어쩌다 이 많은 수건이 내게 왔을까. 나는 마른 수건을 개며 칸을 채웠다. 수건을 작게 접는 동안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무언가 쥐여 주었다. 하얀 소창 수건에 ‘축 고희’라고 적혀 있다. 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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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이것이 날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명뿐이다.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점심식사 중이다.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문인수(194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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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무 시골집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를 뽑았다희고 투실투실한 무였다너희들 나눠 주고도 이걸 다 어떻게 하냐시장에 나가서라도 팔아 볼거나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머릿속을 텅 비게 해 주는 무였다손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마음은 쉬었다 뽑아낸 자리마다 근심을 묻었다이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얼마나 시원하려나내 근심 묻은 자리마다 무가 다시 자라날 것을어머니도 알고 나도 알았다애초에 어머니도 무였고 나도 무였으니그러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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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봄의 정치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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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곡비 새벽부터 지붕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열려가슴을 쓸어내렸다 큰 불길 잡히면 또 하나 잡히겠지앞이 보인다 싶으면실핏줄 돌게 마련이지 하다가 왜 이 비는 타버린 폐허 위에 내리는가왜 산불은 해마다 돌아오는가 처마 끝에 앉아서꽃망울 터지고 연둣빛 틔워 올리는앞산을 바라보는 눈길이 젖는다 은 비가 내리고타버린 것들 위에 비는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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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밥이 끓는 동안 밥이 끓는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다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 끓고 있는 지금 내가 먹는 것은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허공이다허공만이 실재라는 듯이 현재는 허기다 주린 배로 사냥에 나선피에 젖은 발톱이다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부러진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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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부동의 계절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꿈꾸고 싶지 않다.누가 나에게 무위를 가르쳐주겠는가,누가 계속 살지 않고 사는 길을 가르쳐주겠는가? 어떻게 물이 사는가?돌들의 하늘은 어떤 것인가? 철새들이 그 전성기를 멈출 때까지마침내 그들이 그들 화살과 함께차가운 섬들로 날아갈 때까지부동자세로. 부동자세로, 은밀한 삶을 누리며쏟아부을 수 없는 물방울 같은나날들이 미끄러지는 대로지하에 숨어 사는 도시의 삶:우리의 부활의 순간까지,무너져 누워 있던 것으로부터묻혀 있던 봄의차분한 발걸음으로 돌아올 때까지닳지 않고 죽지 않는끝없는 부동자세로,마침내 무생무위로부터금방 꽃가지 되어 올라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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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고시원 소년은 놓이게 되었습니다 찬장의 그릇처럼 빈방을 채워가는 거미줄처럼 벽지에 눌어붙은 살냄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놓였습니다 소년은 신문으로 창문을 만들어보다가 입구를 찾는 날벌레처럼 머뭇거리며 연습장 한 권을 쓰지 못하고 창틀과 형광등의 차원에 놓인 나방처럼 한 사람이 살던 방으로 날아와 빈 육체를 포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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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목도장 서랍의 거미줄 아래아버지의 목도장이름 세 글자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그림은 비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