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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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수돗물 좀 꼭꼭 잠가 주세요 30년생 태인 씨, 다음부터 수돗물은 꼭꼭 잠가 주세요. 태인 씨가 수돗물을 잠그지 못할 때마다 나는 정말 많이 속이 상해요 물이 아니라 태인 씨 마음, 태인 씨 몫의 시간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 속으로 자꾸만 안타깝게 끄르륵 끄르륵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까짓 물값이야 뭔 대수겠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수돗물은 꼭꼭 잠그셔서 자꾸만 춤을 추는 태인 씨 마음, 태인 씨 몫의 시간 좀 꼭꼭 붙잡아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화장실 다녀간 우리 태인 씨, 또 마음을 안 잠그셨네. 태인 씨 센 머리칼처럼 하얀 전등불 밑으로 85년 된 마음이 콸콸. -
詩想과 세상 미궁의 문 우리 집 정문 쪽은 병원 장례식장 후문입니다. 가끔 검은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수구문처럼 이 문을 드나드는데, 그 몰골이 도드라져 보이는 날이면 열이 나는 아이를 안고 발 동동 구르며 드나들던 시간이나 간이 신통치 않던 내게 문병을 왔다가 병도 없는 곳으로 가버린 핏줄들의 발자취도 떠올리곤 합니다. 치유도 병도, 생과 사도 문을 바꿔 드나들기 좋은 곳에 있어서 어쩌면 여기는 일주문 같은 곳인가 봅니다. 잠깐 걸어가면 작은 상가가 있는데 1층은 느티나무보신탕집입니다. 2층은 행복한동물병원입니다. 아이러니는 늘 서로를 버리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동물을 즐겨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개는 아프면 인간에게 미안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입구와 출구는 하나의 구멍임이 분명했으나 영원히 교란된 미궁이기도 했습니다. 두 문 사이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사람일 이유도 없었고 왜 내가 나인지도 헷갈릴 때가 있었습니다. -
詩想과 세상 별의 입구 별을 향해 걷다 보면 걸어서는 끝내 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발맘발맘 걸어서 다다른 종점 근처에 아직도 저만큼 떠 있는 별 보폭이 같은 사람들과 웃고 울다가 누가 걸음을 멈추면 그이를 땅에 심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별의 입구 일생 딱 한 번 축복처럼 열리는 작은 문 함께 걷던 이들이 눈망울에 비친 기억들을 문 앞에 떨궈놓고 이내 총총 흩어진다 -
詩想과 세상 파커 만년필에는 파커 만년필에는 시가 많이 들어 있다, 1킬로미터나 죽,잉크병엔 더 많이 있다,몇 마일이 있다. 종이는 우편물로, 고지서로, 광고로,채우라는 서식으로 들어온다.나는 자신 있게 미래와 마주한다. 울라브 하우게(Olav H. Hauge·1908~1994)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는 울빅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시인은 농업학교를 나와 정원사가 되었는데, 빙하가 만든 피오르드가 보이는 곳에서 매일 노동하며 시를 썼다. 시인이 노래한 자연 속 소박하고 명징한 일상은 우리를 서늘한 고요로 이끈다. 그에게는 ‘시를 셀 수 있는가?’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가 있는데, 에밀리 디킨슨을 소환해 ‘그녀가 시를 세었을 리 없’다고 쓴다. 나는 시 몇 편 썼어. 말하다가 머뭇거린다. 시를 어떻게 셀 수 있지? 바람이나 물결을 셀 수 없듯이, 나도 잠시 시인처럼 자연의 필경사가 된다. -
詩想과 세상 수면 위의 수면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홍제천을 산책하다물결 속 바위 위에 잠든 청둥오리 가족을 본다 흐름에 몸 맡긴 고요한 풍경에도선잠이 든 놈이 있다 두런두런, 허방을 짚는 발걸음에고갤 쳐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살금과 슬금 사이의 불안한수면 위의 수면 어둠과 수풀 너머 사냥의 본능순간의 방심은 생의 목덜미에송곳니 푸드득, 허공을 때리는 다급한 날갯짓 -
詩想과 세상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
詩想과 세상 꿈틀거리다 꿈틀거리다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매미도 껍질을 찢고 꿈틀꿈틀 생살로 나오는데어느 아픈 날 밤중에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꾸는 것은 아픈 것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꿈틀꿈틀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
詩想과 세상 사랑의 순서 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당신은 엇비슷하게 걸어갑니다나는 공복이라 하였고 당신은 기근이라 하였습니다당신은 성북동이라 하였고 나는 종암동이라 하였습니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일치합니다 노인들이 바둑 두는 호숫가에 다시 와 생각합니다흰 머리카락을 고르듯 무심히 당신을 뽑아냅니다은행알을 으깨며 유모차가 지나갑니다눈물 없이 우는 기분입니다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은행알도 초록인걸요떼로 몰려드는 잉어의 벌린 입을 보세요씨 없는 가시덩굴이 기어이 벽을 타고 오릅니다 -
詩想과 세상 무릎 1.새도 무릎이 있던가 뼈와 뼈 사이에 둥근 언덕이 박혀 있다 무릎을 꺾으니 계단이 되었다 꿇는 줄도 모르고 무릎 꿇은 일 적지 않았으리라 2.달콤한 샘에 입 대기 위해 나비는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접지 않고 어찌 문이 열리랴 금동부처의 사타구니 사이로 머리 내미는 검은 달 3.사람이 사람의 무릎 꿇리는 건 나쁜 일이다 4.무릎이 다 닳아 새가 된 사람을 너는 안다 쌀자루를 이고 다니다 무릎이 다 녹은 것이다 나비처럼 너는 언덕을 넘고 싶다 검은 달을 향해 컹컹, 너는 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