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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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밥이 끓는 동안 밥이 끓는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다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 끓고 있는 지금 내가 먹는 것은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허공이다허공만이 실재라는 듯이 현재는 허기다 주린 배로 사냥에 나선피에 젖은 발톱이다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부러진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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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부동의 계절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꿈꾸고 싶지 않다.누가 나에게 무위를 가르쳐주겠는가,누가 계속 살지 않고 사는 길을 가르쳐주겠는가? 어떻게 물이 사는가?돌들의 하늘은 어떤 것인가? 철새들이 그 전성기를 멈출 때까지마침내 그들이 그들 화살과 함께차가운 섬들로 날아갈 때까지부동자세로. 부동자세로, 은밀한 삶을 누리며쏟아부을 수 없는 물방울 같은나날들이 미끄러지는 대로지하에 숨어 사는 도시의 삶:우리의 부활의 순간까지,무너져 누워 있던 것으로부터묻혀 있던 봄의차분한 발걸음으로 돌아올 때까지닳지 않고 죽지 않는끝없는 부동자세로,마침내 무생무위로부터금방 꽃가지 되어 올라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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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고시원 소년은 놓이게 되었습니다 찬장의 그릇처럼 빈방을 채워가는 거미줄처럼 벽지에 눌어붙은 살냄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놓였습니다 소년은 신문으로 창문을 만들어보다가 입구를 찾는 날벌레처럼 머뭇거리며 연습장 한 권을 쓰지 못하고 창틀과 형광등의 차원에 놓인 나방처럼 한 사람이 살던 방으로 날아와 빈 육체를 포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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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목도장 서랍의 거미줄 아래아버지의 목도장이름 세 글자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그림은 비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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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문짝 나는 옷에 배었던 먼지를 털었다.이것으로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른다는 말을 한 셈이다.작은 데 비해청초하여서 손댈 데라고는 없이 가꾸어진 초가집 한 채는<미숀>계, 사절단이었던 한 분이 아직 남아 있다는 반쯤 열린 대문짝이 보인 것이다.그 옆으론 토실한 매한가지로 가꾸어 놓은 나직한 앵두나무 같은 나무들이 줄지어 들어가도 좋다는 맑았던 햇볕이 흐려졌다.이로부터는 아무데구 갈 곳이란 없이 되었다는 흐렸던 햇볕이 다시 맑아지면서,나는 몹시 구겨졌던 마음을 바루 잡노라고 뜰악이 한 번 더 들여다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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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봄의 제전(祭典) 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다여자는 겨울의 머리에서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을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길고 지리한 겨울과의 싸움은 지나갔다북벽으로 이어진 낭하를 지나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차가운 방에얼음 침대에겨울은 유폐되었다여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왕관은 숲속에 버려졌다겨울은 벌써 잊혔다오직 신생만을 얻기 바랐던재투성이 여자는봄이 오는 숲과 들판을 지나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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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두 방울 수풀들 불타고 있었다―그것들 그러나휘감았다 자기들 목을 자기들 손으로장미 꽃다발처럼사람들 뛰었다 피신처로―그가 말했다 그의 아내 머리카락은그 안에 숨을 수 있을 만큼 깊다고담요 한 장에 덮여그들이 속삭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들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일련의 탄원기도를사태가 매우 악화했을 때그들이 뛰어들었다 서로의 눈동자 속으로,그리고 그 눈동자들 꼭꼭 닫았다너무 꼭꼭이라 그들은 화염을 느끼지 않았다그들이 속눈썹으로 올라왔을 때끝까지 그들 용감했다끝까지 그들 충실했다끝까지 그들 비슷했다두 방울,얼굴 가장자리 궁지에 빠진 두 방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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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초기화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믿는다고 했다 그중 하나를 뽑았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었다 하지만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그거 기억나? 나 음악 그만둘 때,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거라 생각했는데…… 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섭섭했던가 냄비 속에서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눈이 소복했다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생상스의 협주곡이 들려온다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한여진(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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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한 손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내고 번쩍번쩍 빛나는 갈치의 목을 딴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두꺼비 손 뚝딱뚝딱 밥이 나오고 공책이 나오고 표준전과가 나오고 마음먹고 산 옷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을 때 사람의 입술이 성벽처럼 완고할 때 돌을 던지고 모래를 흩뿌려댔다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 내 손을 더럽히는 것이었다니 손을 잡고 싶었지만 망설였고 손을 내어줄 수 있었지만 주머니에 넣어 두는 편이 안전하다 믿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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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희망의 수고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가게를 정리하시며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칫솔 네 개행주 네 장때수건 한 장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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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모자이크 거의 다 왔어 거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채울 것이 남아 있었는데조각을 얻지 못한 틈에서성토하듯 빛살이 쏟아졌는데 거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조각만 더 모으면 되는데그 조각만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데의도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것 같은데 모아도 모아도결코 채워지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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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눈물을 빛으로 정면은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요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어요 이젠 그 너머를 봐야겠어요 뿌리들은 무슨 열매를 준비하고알들은 어떤 죽음의 깃털을 다듬고 있는지 세상이 온통 수렁 같을 때도숨을 좀 가다듬고더 깊이, 찬찬히 살펴보면숨어 있는 다른 게 보일지 몰라요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아침 풀밭의 이슬들,유리창에 부딪혀 한쪽 날개가 고장난천사의 쑥스런 표정,냉장고 문을 열면 방긋 웃는 새끼 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