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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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당기시오 밀어도 열렸다 하지 말란 건 꼭 하고 싶을 때가 있다하지 말란 말이 끝나기 전에 해버린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을 여는 건밀고 당기는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사람은 막는 것이었다 여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잠가두었다 그때 부탁이 있다 했다잊지 말라고 했다 강력한 태풍이 북상중 창문마다 신문지를 붙이다네가 아닌 너의 이름을 본다 -
詩想과 세상 밤에, 소년이 있었다 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요소년이 내게 말했다 고요히나는 소년의 솜털 부숭한귓불을 쓰다듬었다 이따금소년의 귀에선 내가 쓰다 버린문장들이 흘러나왔다나는 그 문장들을 기워새를 만들었다 그보다는내 가슴을 오려새를 만들었으면 좋았을걸어두운 벤치 위에 소년은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쁜 숨 몰아쉬며눈동자를 흐리며 그만눅눅한 공기 속으로 소년은깃을 치며 날아갔다나는 그저 돌아갈밖에얇고 여린 소년의 껍질이어깨 위에 가볍게 걸쳐진 채자꾸 나부끼던 밤이었다 -
詩想과 세상 미니멀라이프 무인 세탁소에서 누군가의 이불이무인 카페에서 음악이무인 제과점에서 밀가루와 버터와 설탕이무인 정육점에서 어제 죽은 동물이무인 부동산에서 무너진 집들이무인 도로 위에 식물들이무인 책방에서 글자들이움직이고 있다인간 없는 곳에서인간 없이도 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들이움직이고 있다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 너는 현관문을 열고집 안의 물건을 하나씩 밖으로 옮긴다나를 잘못 쓴 원고처럼 구겨져 던진다 -
詩想과 세상 가을이 올 때 뜰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아버지는 문에 창호를 새로 바르셨다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잘 마른 창호지 바른 문을 새로 단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달그림자가 길어져서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바람이 찾아와서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우리 집 방문에서,가을이 깊어갔다 -
詩想과 세상 불면증 화장대 거울 속 달은수백만 킬로미터 너머를 바라본다,(아마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하지만 절대, 절대로 미소 짓지 않는다)잠 못 들고 아득히 멀리, 혹은달은 낮에 자는지. 우주로부터 버림받으면,달은 지옥에나 가버려, 말할 것이고,곧장 물웅덩이나 거울을 발견하고는,그 안에 깃들 것이다.그러니 걱정 따위 거미줄로 싸서우물에 처박아 버리길. -
詩想과 세상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면서사람들이 소원을 빈다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하늘에서별똥별이 찾아온 것 같지만우리가 별똥별을 찾아가는 것 지구가 공전하는 길 위에별똥별이 사는 곳이 있고그곳을 지날 때 중력에별똥별이 끌려 들어온다 행운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 같지만어딘가에 있을 행운을우리가 찾아가는 것이다 하상만(1974~) -
詩想과 세상 끝말 잊기 물고기가 처음 수면 위로 튀어오른 여름여름 옥수수밭으로 쏟아지는 빗방울빗방울을 맞으며 김을 매는 어머니어머니를 태우고 밤길을 달리는 버스버스에서 졸고 있는 어린 손잡이손잡이에 매달려 간신히 흔들리는 누나의 노래노래가 소용돌이치며 흘러다니는 개울가개울가에서 혼자 물고기를 파묻는 소년소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버지아버지가 버스에 태워 보낸 도시의 가을가을마다 고층빌딩이 쏟아내는 매연매연 속에서 점점 엉켜가는 골목골목에서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손가락이 밤마다 기다리는 볼펜볼펜이 풀지 못한 가족들의 숙제숙제를 미루고 달아나는 하늘하늘 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마을마을에서 가장 배고픈 유리창유리창에서 병 조각처럼 깨지는 불빛불빛 속에서 물고기처럼 우는 사내사내가 부숴버린 어항이 조각조각 널린 방바닥방바닥에서 퍼덕거리다 죽어가는 물고기 -
詩想과 세상 사인용 식탁 여느 날처럼 침묵을 두르고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외로움은 일인분의 식사가 아니다사인용 식탁의 빈자리들이다 그리움은 인간을 본뜬 석고를보며 그린 소묘를또다시 베끼는 일이다 그걸 베끼고 또 베끼다보면언젠가는추상적인 동그라미 몇 개만 남게 될 것이다 식기를 치우면책상이 되기도 하는식탁 앞에 앉아닫힌 창문을 보며 창밖을 그렸다 -
詩想과 세상 모임 물을 붓고 불을 켠다 네가 탄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복도에서 발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인다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까지 불꽃이 일렁인다 기포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오고 있니? 가고 있어 아직 오지 않은 너는 수화기 너머에 있다 잘 가라는 소리가 들린다 복도가 울린다 누군가 멀어진다 물을 다시 붓는다 들끓던 수면이 잦아든다 모르는 사람이 좋아지기도 해 낯선 말투로 울렁이게도 하고 같은 곳에서 만났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헤어져 -
詩想과 세상 매미가 운다 여름은 타오르고 매미가 운다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제 몸을 거는 것오랜 어둠을 지나온 목숨만이할 수 있는 일이다 매미가 울고 배롱나무는 아프다이 세상에 울음이 없다면 노래도 없고처마를 와락 껴안는 소나기도 없다 뙤약볕은 보름이고 쏟아지라지그래도 울음은 그칠 수 없고새로운 숨소리는 조금 가까워졌다피도 어제보다 자랐다 매미가 울고 계곡물은 멈추지 않는데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역사를 대어보는 것은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존재만이가진 긍지다 -
詩想과 세상 재개발 이 집에는빛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 국도의 수많은 차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창가에 걸터앉아라디오 안테나를 고치다서성이듯 기침이나 뱉는 하루 앞집 담벼락의 가시철조망처럼내일이 가슴을 파고든다 어제도 덜 잊었는데오늘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새 현관에 칠해진 독백을 헤아린다 아무리 찢어도 쌓이는 아무것도 아직 추하지 않아서접시를 씻는 어머니는 우리가 철거당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어두운 뒷모습 속에도 성실히피가 돌고 있다 -
詩想과 세상 붉은 악보 오늘은 7월14일불란서 혁명 기념일 그래서 그런지담장의 장미꽃들이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피의 폭죽을펑, 펑, 터뜨리고 있다 저 불순한 것들이어정쩡히 살아온 나를박열朴烈 같은 젊은 아나키스트로잘 못 본 것일까 오늘 밤만은장렬한 불꽃 축제에주저 없이 가담하여함께폭죽을 쏘아 올리자고자꾸만 손짓한다 이가림(1943~2015) 죽은 시인이 오래전 보낸 투병통신이 지금 도착했다.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를 꺼내 천천히 펼치니 “오늘은 7월14일”이고, “불란서 혁명 기념일”이라고 적혀 있다. 한때 시인의 눈동자에 담겼을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시인은 붉은 장미를 보며, 젊은 혁명가 박열을 떠올린다. 한 혁명가의 붉은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정쩡히 살아온” 자신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