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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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가방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가방 속엔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재수록한 시그날의 마지막 석양빛이별의 낙수(落水) 소리백합과 접힌 나비건강한 해바라기맞은편에 마른 잎어제의 귀띔나를 부축하던 약속희락의 첫 눈송이물풍선 같은 슬픔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해변을 걸어가는군가방 속에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문태준(1970~) 누구에게나 오래된 가방이 있다. 버리지 못하는, 끝내 버릴 수 없는 낡은 가방 속에는 많은 것이 살고 있다. 어느 해변을 걷다가 주워 온 작은 돌멩이 하나가 가방에서 조용히 구르다가 나를 부른다. 가방 속에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이 언뜻 비친다. “백합과 접힌 나비”의 날개도 보인다. 차가운 등을 보이며 돌아선 “이별의 낙수 소리”도 들린다. 겨울에는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눈송이들을 넣고 다녔다. 폭우 속에서 더 이상 슬플 것도 없이 펑펑 울기도 했던 날들을 가방은 기억한다. -
詩想과 세상 무근성 우영팟 어처구니없이 넘어간 무근성 옛집 우영팟예전처럼 고추며 상추들 착하게 자라고 있다빈집 되면 텃밭도 빈털터리가 되어검질만 왕상할 줄 알았는데, 웬말인가어머니 손 있을 때 자라던 그대로어머니 없어도 기죽지 않고 으?X으?X여리고 푸른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어머니가 왜 집을 떠났는지 물을까 하다가혹시나 눈물 그렁그렁 속이 상할까 꾹 참고곧 오겠지 틀림없이 오실 거야 생각하면서다시 돌아올 어머니에게 예쁘게 보이려고하얗고 노란 꽃망울 반짝반짝 피워 올리면서바람 불면 고개 삐쭉 내밀어이제나 오카 저네나 오카 주왁주왁 흔들리면서 -
詩想과 세상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 나는 최선을 다해 최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갑게 튀기는 빛을 헤치며 걷는 숲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환하고 포근한 풍경에 나는 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아 꼭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입 다물고 걸으면 금세 최악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많았다 너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신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엾게 봐주셔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신 거야 우리는 몹시도 기쁜 마음으로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로 잠깐 바짝 우려낸 차 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최악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말했을 때 누군가,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이야기했고, 아니야, 우리는 이미 최악으로 와 있잖아, 그런데 여기보다 더 먼 곳이 있으면 어쩌지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최악으로 걸어오는 아는 얼굴들이 어른어른 보였다. 권누리(1995~) -
詩想과 세상 물고기 내가 처음 잡은물고기양동이에 얌전히누워 있지 않고퍼덕거리며얼얼한놀라운 공기 빨아들이고무지개 빛깔서서히 쏟아내며죽어갔지. 나중에나는 물고기 몸을 갈라살에서 가시를 발라내고먹었지. 그래서 바다가내 안에 들어 있지. 나는 물고기,물고기는 내 안에서 빛나네, 우린서로 뒤엉켜 다시 바다로돌아가겠지. 고통,그리고 고통, 또 고통으로우리 이 열정의 대장정 이어가고,신비에서 자양분 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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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나는 버드나무가 좋아서 버드나무에물고기 한 마리물고기 두 마리잎잎마다 살게 하였습니다 가지마다 수십 마리의 물고기들차마 다 하지 못한 말처럼바람 불면차곡차곡흔들립니다 바람은 자꾸 아픈 마음을 데려와함께 살라고 합니다나는 낮잠처럼물고기 한 마리 허공에 놓아주고물속으로 놓여난 물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그래도 찬란합니다무엇으로든 빛납니다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봅니다 -
詩想과 세상 바람의 언덕 그런 언덕이라면좋겠습니다 구부러진 길끝에서도 내다보이는 발보다눈이 먼저 닿는 중간중간 능소화 얽힌 담벼락 이어져지나는 사람마다 여름을 약속하는 젖어도 울지 않는 바람도 길을 내어사람의 뒷말 같은 것이 남지 않는 막 걸음을 배운 어린아이도허공만을 쥐고 혼자서 오를 수 있는 누군가는 밤으로 기억하고누군가는 아침으로 기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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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전설 바다의 밤물결 골목이 어제보다 어둡다 그것은 골목 초입의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탓이다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것은 한 사람이 빨래방에 있어서다 그 사람의 앉은키만큼 노란빛이 사라져서다 통유리창 너머로 그 사람의 등을 오래 쳐다본다 그 사람의 등으로 가서 등의 중심으로 가서 나는 백열등을 하나 켤 수도 있으리라 백열등 아래 어항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거기서 인두겁을 벗고 부드러운 비늘을 드러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밤물결을 누비는 인어가 된다 목소리를 잃는 대신 한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다 빨래방에 앉아 있다 그러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장이지(1976~) -
詩想과 세상 화인 火印 우리는 더이상 자고 있지 않았다, 우울의 시계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그리고 시곗바늘은 채찍처럼 휘었다,그리고 시곗바늘은 재빠르게 뒤로 되튀어 피가 맺힐 때까지 시간을 채찍질했다,그리고 당신은 차오르는 어스름에 대해 말했다,그리고 당신 말들의 밤에 열두 번 나는 당신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밤이 열렸고 열린 채 머물렀다,그리고 나는 눈 하나를 밤의 품에 안겨주고 다른 하나는 당신 머리칼 속에 땋아주었다그리고 그 두 눈 사이에 도화선을 얽히게 했다, 열린 정맥을 ―그리고 어린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다. 파울 첼란(1920~1970) -
詩想과 세상 80㎝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 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 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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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벽 벽에는 푸른 하늘과 연못과 물고기도 있고 눈이 내릴 것이다 벽에는 아이가 살고 아이는 혼자 못가에 앉아서 물고기를 보고 눈이 쌓인 밤엔 빨간 물고기 금 간 벽으로 흘러나가고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하고 간장독처럼 늙은 여자 짜디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남은 벽이니까 그림을 그리는 건 어때? 아이가 말한다 물고기와 눈과 사람이 그려진 벽이 헐리기 직전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밖으로 던진다 -
詩想과 세상 무한 타월 옥상에 올라가 수건을 걷었다. 수건은 참 많은 날을 기억하는군. 이건 돌잔치, 저건 9지역 축구 대회, 어느 날은 서울남부교도소 방문 기념일. 돌상 앞에 앉은 내가 지폐 대신 국수를 쥐고, 오빠가 기세 좋게 찬 공이 골대 밖으로 튕겨 나가고, 푸른 수의를 입은 아빠가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날. 수건을 나눠 주며 몰래 한숨을 쉰 엄마가 있다. 수건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오빠가 있다. 비린내가 물씬 나는 수건에 얼굴을 묻고 비는 엄마가 있다. 어쩌다 이 많은 수건이 내게 왔을까. 나는 마른 수건을 개며 칸을 채웠다. 수건을 작게 접는 동안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무언가 쥐여 주었다. 하얀 소창 수건에 ‘축 고희’라고 적혀 있다. 내 것이라고 했다. -
詩想과 세상 이것이 날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명뿐이다.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점심식사 중이다.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문인수(194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