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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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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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같군요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 말하는 어른 여자를 만난 저녁 주꾸미를 먹었습니다 뛰지 않는 심장과 뛰려는 심장 사이에 사랑을 접어놓고 마음이란 뭘까요 호호 불어 먹고 싶은 마음이란 어디에 간직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은 오늘 내 손을 꼭 잡고 귓속에 뜨거운 말을 부어주었습니다그것을 안고 멀리 갈 거예요당신이 나를 처음 본 날,쉬운 퀴즈를 풀듯 나를 맞혀버렸다는 걸 기억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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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새벽 한 시의 전복 이 나의 관심사다. 이런 순간 말이다.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도시를 느끼는 것.표준시간대 사이, 바다 사이, 심야의 뉴스 사이에서모든 것의 만남, 전쟁, 꿈, 겨울밤이쏟아져 들어오는 것을.어린 소녀들이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홀로사랑에 빠지게 하는, 혹은 세계의 절반에서화염을 비처럼 맞는 어린아이들이 ― 우리 말이야 ―누군가를 부르며 ― 우리 말이야 ― 와서 좀 도와달라고 외치게만드는 눈더미 속 불빛.이제 어둠의 경계에서야나는 달빛의 극단을 본다.홀로, 내 모든 희망은너무 멀어 들리지도 않는, 한 현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세계의 절반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져 있다.내게 말해본다.경험을 믿으라고. 그 리듬을 믿으라고.네 경험의 그 깊은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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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늑대들 늑대들이 왔다 피냄새를 맡고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 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제 피인 줄도 모르고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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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합정 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며나는 한낮에 걷고 있었죠처형터라 물이 필요해 우물을 팠는데민물조개가 많이 나왔다는 곳이후 그곳에 지어진 건물을 직장 삼으면서오랜 시간이 지나 여기 있구나, 감각하면서는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나는 움직임이 느려지기도 했죠걷다가 사로잡히기도 했으니까흰 개가 지나다니는 합정다리가 세 개뿐인 흰 개와 함께 걷는 산책자 인간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둘 사이 어디 즈음 마중나갈 수도 있을까복을 빌어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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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우리라는 슬픔 거짓말의 길이에 대해서 생각한다차 벽을 향해 걸어가면서 거짓말의 밑바닥은 몇 마리인지 세어본다차 벽을 두고 돌아오면서 잊어버리면 픽 웃으며한 발자국에 한 마리씩다시 한 마리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라는 말이광장에 뿌려졌을 때이걸 선물이라 좋아해야 할지이걸 폭탄이라 두려워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리는 꿈에도 사라진 희미하고뚜렷한 우리가 되어서차 벽을 향해 걸어가고차 벽을 두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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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응강 그늘이나 응달이 고향에서는 응강인데 꼭 응강이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시래기는 뒤란 처마 밑 응강에서 꼬들꼬들 말라갔으며 장두감을 설강 위 응강에 오래 두어야 다디단 홍시가 되어갔는데, 무엇보다도 어릴적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내가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버린, 고향에서는 정지라고 부르는 부엌 구석 어둑한 응강의 찬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하였으니 거기가 서늘하고 깊고 시퍼런 물줄기를 가진 강 중의 강이기는 하였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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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그 밤에 사로잡혀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다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다시 하기 신해욱(1974~) 우리는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로,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자주 뒤집힌다. 정면이 보이질 않는다. 창문들도 모두 흐릿하다. 다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이 밤”. 초과한 것들, 부유하는 것들, 대치하는 것들로 늘 흔들린다. 시인은 혼돈의 순간, 주문처럼 외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매일매일 짓고 부수는 병든 마음의 벽들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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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미아리 언제부터 한쪽이 결린다던 누나는얼마 안 가 해만 지면 몸져누웠다이웃들도 의사들도 점집에나 보내보라 했지만싫다고 싫다고 악을 썼는데이번에는 내가 앓아눕자누나는 조용히 내림굿을 받았다누나가 늘 바라던 방이 그때 생겼다 차림이고 낯이고 전부 다 어두운인간처의 낮에는 방울 소리 지나서마음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닳도록 손 비비는 소리는 저녁상 치우면 들렸다문득 잠에서 깨 오줌 누러 가는 한밤초에 켠 불이 많아 아늑하게 깊숙하게밝은 그 방으로 모르는 할머니가 들어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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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있는 힘 대형 쇼핑센터에 어둠이 밀려오고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있는 힘을 다하여한 줄에 스무 개, 열다섯 줄을어둠을 등에 지고 밀고 있었다가득한 물건 가득한 사람가득한 지구를 위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아침을 향하여경건하고 진지하게 밀고 있었다발등을 세우고 두 손을 움켜쥐고몸통으로 비스듬히 일직선으로밑을 바라보며 밀고 있었다대지란 이런 것이다발걸음이란 이런 것이다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그냥 그래야 하는 것으로기어이 그래야 하는 것으로어둠 속에서모두가 돌아간 곳에서있는 힘을 다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박철(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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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초식동물에게도산다는 것은 본능,적응하는 건 삶의 수단이다. 아가야,옛날 코끼리들에겐 길고 아름다운어금니가 있었단다.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그 불쏘시개로 필요한 상아. 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하는코끼리가 얼마나 많았는지.그래서란다.어금니 없이 태어나는 모잠비크의 코끼리 아가야,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그 슬픈 행복을 너는 아는 거니?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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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한강(1970~)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열어본다. 시인이 넣어둔 ‘저녁’을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다. 그 어느 날 저녁의 “잎사귀”를 펼쳐본다. 잎사귀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으로 작은 벌레의 시간, 별들의 시간이 흐른다. 잎사귀는 땅속으로 떨어져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흘렀을까. 시인은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지다가, 이내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