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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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희망의 수고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가게를 정리하시며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칫솔 네 개행주 네 장때수건 한 장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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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모자이크 거의 다 왔어 거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채울 것이 남아 있었는데조각을 얻지 못한 틈에서성토하듯 빛살이 쏟아졌는데 거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조각만 더 모으면 되는데그 조각만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데의도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것 같은데 모아도 모아도결코 채워지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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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눈물을 빛으로 정면은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요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어요 이젠 그 너머를 봐야겠어요 뿌리들은 무슨 열매를 준비하고알들은 어떤 죽음의 깃털을 다듬고 있는지 세상이 온통 수렁 같을 때도숨을 좀 가다듬고더 깊이, 찬찬히 살펴보면숨어 있는 다른 게 보일지 몰라요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아침 풀밭의 이슬들,유리창에 부딪혀 한쪽 날개가 고장난천사의 쑥스런 표정,냉장고 문을 열면 방긋 웃는 새끼 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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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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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같군요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 말하는 어른 여자를 만난 저녁 주꾸미를 먹었습니다 뛰지 않는 심장과 뛰려는 심장 사이에 사랑을 접어놓고 마음이란 뭘까요 호호 불어 먹고 싶은 마음이란 어디에 간직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은 오늘 내 손을 꼭 잡고 귓속에 뜨거운 말을 부어주었습니다그것을 안고 멀리 갈 거예요당신이 나를 처음 본 날,쉬운 퀴즈를 풀듯 나를 맞혀버렸다는 걸 기억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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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새벽 한 시의 전복 이 나의 관심사다. 이런 순간 말이다.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도시를 느끼는 것.표준시간대 사이, 바다 사이, 심야의 뉴스 사이에서모든 것의 만남, 전쟁, 꿈, 겨울밤이쏟아져 들어오는 것을.어린 소녀들이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홀로사랑에 빠지게 하는, 혹은 세계의 절반에서화염을 비처럼 맞는 어린아이들이 ― 우리 말이야 ―누군가를 부르며 ― 우리 말이야 ― 와서 좀 도와달라고 외치게만드는 눈더미 속 불빛.이제 어둠의 경계에서야나는 달빛의 극단을 본다.홀로, 내 모든 희망은너무 멀어 들리지도 않는, 한 현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세계의 절반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져 있다.내게 말해본다.경험을 믿으라고. 그 리듬을 믿으라고.네 경험의 그 깊은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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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늑대들 늑대들이 왔다 피냄새를 맡고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 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제 피인 줄도 모르고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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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합정 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며나는 한낮에 걷고 있었죠처형터라 물이 필요해 우물을 팠는데민물조개가 많이 나왔다는 곳이후 그곳에 지어진 건물을 직장 삼으면서오랜 시간이 지나 여기 있구나, 감각하면서는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나는 움직임이 느려지기도 했죠걷다가 사로잡히기도 했으니까흰 개가 지나다니는 합정다리가 세 개뿐인 흰 개와 함께 걷는 산책자 인간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둘 사이 어디 즈음 마중나갈 수도 있을까복을 빌어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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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우리라는 슬픔 거짓말의 길이에 대해서 생각한다차 벽을 향해 걸어가면서 거짓말의 밑바닥은 몇 마리인지 세어본다차 벽을 두고 돌아오면서 잊어버리면 픽 웃으며한 발자국에 한 마리씩다시 한 마리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라는 말이광장에 뿌려졌을 때이걸 선물이라 좋아해야 할지이걸 폭탄이라 두려워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리는 꿈에도 사라진 희미하고뚜렷한 우리가 되어서차 벽을 향해 걸어가고차 벽을 두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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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응강 그늘이나 응달이 고향에서는 응강인데 꼭 응강이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시래기는 뒤란 처마 밑 응강에서 꼬들꼬들 말라갔으며 장두감을 설강 위 응강에 오래 두어야 다디단 홍시가 되어갔는데, 무엇보다도 어릴적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내가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버린, 고향에서는 정지라고 부르는 부엌 구석 어둑한 응강의 찬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하였으니 거기가 서늘하고 깊고 시퍼런 물줄기를 가진 강 중의 강이기는 하였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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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그 밤에 사로잡혀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다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다시 하기 신해욱(1974~) 우리는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로,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자주 뒤집힌다. 정면이 보이질 않는다. 창문들도 모두 흐릿하다. 다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이 밤”. 초과한 것들, 부유하는 것들, 대치하는 것들로 늘 흔들린다. 시인은 혼돈의 순간, 주문처럼 외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매일매일 짓고 부수는 병든 마음의 벽들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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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미아리 언제부터 한쪽이 결린다던 누나는얼마 안 가 해만 지면 몸져누웠다이웃들도 의사들도 점집에나 보내보라 했지만싫다고 싫다고 악을 썼는데이번에는 내가 앓아눕자누나는 조용히 내림굿을 받았다누나가 늘 바라던 방이 그때 생겼다 차림이고 낯이고 전부 다 어두운인간처의 낮에는 방울 소리 지나서마음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닳도록 손 비비는 소리는 저녁상 치우면 들렸다문득 잠에서 깨 오줌 누러 가는 한밤초에 켠 불이 많아 아늑하게 깊숙하게밝은 그 방으로 모르는 할머니가 들어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