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최신기사
-
詩想과 세상 있는 힘 대형 쇼핑센터에 어둠이 밀려오고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있는 힘을 다하여한 줄에 스무 개, 열다섯 줄을어둠을 등에 지고 밀고 있었다가득한 물건 가득한 사람가득한 지구를 위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아침을 향하여경건하고 진지하게 밀고 있었다발등을 세우고 두 손을 움켜쥐고몸통으로 비스듬히 일직선으로밑을 바라보며 밀고 있었다대지란 이런 것이다발걸음이란 이런 것이다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그냥 그래야 하는 것으로기어이 그래야 하는 것으로어둠 속에서모두가 돌아간 곳에서있는 힘을 다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박철(1960~)
-
詩想과 세상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초식동물에게도산다는 것은 본능,적응하는 건 삶의 수단이다. 아가야,옛날 코끼리들에겐 길고 아름다운어금니가 있었단다.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그 불쏘시개로 필요한 상아. 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하는코끼리가 얼마나 많았는지.그래서란다.어금니 없이 태어나는 모잠비크의 코끼리 아가야,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그 슬픈 행복을 너는 아는 거니?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
詩想과 세상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한강(1970~)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열어본다. 시인이 넣어둔 ‘저녁’을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다. 그 어느 날 저녁의 “잎사귀”를 펼쳐본다. 잎사귀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으로 작은 벌레의 시간, 별들의 시간이 흐른다. 잎사귀는 땅속으로 떨어져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흘렀을까. 시인은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지다가, 이내 어두워진다. -
詩想과 세상 오소 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라고만 했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 -
詩想과 세상 가난한 오늘 검지 손가락 첫마디가 잘려 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
詩想과 세상 히말라야 해국(海菊)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 -
詩想과 세상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詩想과 세상 하여간, 어디에선가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
詩想과 세상 빌라에 산다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
詩想과 세상 돌이 천둥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사람을 뒤덮고소원을 뒤덮고울분을 뒤덮고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병을 고치는 사람들.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엄마, 하고 부르면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아주 오래전돌로 하늘을 내리치면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울 곳이 없어돌 속으로 들어왔다.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
詩想과 세상 마을 자연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라는 당신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정적에 묻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얼마나 무거운 게 자연인지 안다.나일강 반사된 햇빛에 마르면서도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스핑크스처럼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로 덮쳐온다.들러붙은 정적에는 자연 또한 포로이다. 자연은 아름답다,라는지나가는 여행자 감상은 젖혀두어야 한다.거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던 사람과거기 아니면 이어갈 수 없는 목숨 사이에서자연은 항상 다채롭고 말이 없다.떠들썩한 날들을 살아본 사람이라면안다 정적의 끝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왜 도마뱀은 일직선으로 벽을 오르고왜 매미는 천년의 이명(耳鳴)을 울리는지도,모두들 떠난 마을이제 정적이 어둠보다 깊다. -
詩想과 세상 위험구간 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한 마음엔불현듯,이라는 구간이 있다 장마 한복판 사거리 이정표 아래서나산마루 노을 질 때 걸리는 붉은 신호등횡단보도를 지운 폭설 앞에서함부로 펼쳐지는 사랑의 구간 어쩌면,이라는 비보호 좌회전성급히 지나온 과속방지턱멈칫거린 황색 경고등이나그럼에도,라는 가로수불안을 단속하는 구간 속도 측정 카메라와부디,라는 유턴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