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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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도깨비불 동네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후 저녁 아이가 되어 골목 어귀 쭈그려 앉아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검은 나무 아래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어 다가가 보니, 둥지에서 떨어져 날개 꺾인 작은 새가 있었다. 새는 나를 보고선 두려움에 발톱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조심스레 새를 쥐고선 박명 너머 까마득한 하늘 끝에 걸린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 새가 있는 힘껏 내 손을 쪼았다. 나는 그만 새를 떨어뜨렸고, 그 작은 새가 거무튀튀한 흙바닥에 닿기도 전에 난 눈을 질끈 감고선 집을 향해 뛰어가 이불 속에 웅크렸다. 손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바람 소리가, 먹구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갗을 가진 그 소리를 손바닥 안에 쥐고선 나는 지친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불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날 밤 내내 내 손은 문간을 왔다 갔다 하며 내 등을 두드렸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그 자리에 가보니 작은 물웅덩이에 검은 나뭇잎 하나가 동그랗게 말려 있었고, 물의 살결 위로 균형을 잃은 잿빛 불꽃 하나가 반짝였다. 김안(1977~) -
詩想과 세상 1998 폐업 포스터를 뜯어딱지를 접는 소년뜯어진 담장마다개들이 다리를 들어 올리고건너편 공장에 트럭이며칠째 넘어가지 않는다딱지를 내려칠 때마다탁탁 붙었다 터지는 골목그때 민들레 홀씨 하나가어쩔 수 없이 날아가는 것을 본다그리고 소년은 이상해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물어 오지 않는 개와얼굴을 가리고 우는 사람들공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까지소년은 납작한 노을을 주워무릎을 편다고개를 들어 짖기 시작하는 개들수없이 던졌던 질문이딱지를 벗어난다소년은 이제 저녁을한 발자국도 접지 않고 걷는다 -
詩想과 세상 푸른 물방울 내가 살아가는 지구地球는 우주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 나는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생겨나지금 나같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조금 작은 한 방울의 물로 살다가다시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로 돌아가야 할 나는나무 물방울 풀 물방울 물고기 물방울 새 물방울혹은 나를 닮은 물방울 방울세상 모든 물방울들과 함께 거대한 물방울을 이루며 살아가는 -
詩想과 세상 팽목항에서 엄마가 새끼에게밥을 먹이고 있다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맹골수도 바람은 세고바다는 하염없이 끌려간다 바람도 바다도 제 존재를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영혼을 말하고오래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부끼는 리본들은하늘에 있는 것 같다 말은 살아남은 자처럼말이 없다 모든 비유가 열리고 닫힌다 초록이 너무 푸르다 임선기(1968~) 십 년 전, 4월16일 인천에서 떠난 ‘세월호’는 뒤집힌 채로 차가운 맹골수도에 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과 보내지 못하는 유가족의 마음속에 아직도 기울어진 채로 떠 있는 배. 시인은 팽목항에서 그들의 눈물을 대신 받아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모습은 어미들이 새끼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 아닐까. 그 거룩한 밥을 줄 “새끼”를 잃어버린 “엄마”의 슬픔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온전히 그 심연으로 내려갈 수 없다. 자식을 잃은 엄마처럼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바람도 바다도” 알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
詩想과 세상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 ― 붙잡으려는 ―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지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 ―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 ―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
詩想과 세상 검은 돌에 새겨진 子, 혹은 女 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 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 -
詩想과 세상 아 에 이 오 우 외할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미친 너는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다 말고 여전히 미쳐서 설탕 단지를 마루로 내던졌다 마루에 찐득거리는 별가루처럼 쏟아진 흰 설탕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이상하고 조그마한 소리 미친 너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외할머니가 느닷없이 죽은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알았다 그 순간 네게서 ‘미친’이 떨어진 것도 알았다 -
詩想과 세상 새와 토끼 또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졸았다. 광부들이 갱 밖으로 탈출했다. 사장은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고 새의 목을 비틀어 입갱금지 조치를 내렸다. 광부들이 유독가스에 중독돼 쓰러져갔다. 전쟁 때 잠수함 속의 토끼가 죽자 선장의 명령으로 토끼 역할을 대신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병사가 떠올랐다. 누가 병든 새와 토끼를 넣었을 수도 있다. -
詩想과 세상 밝은 곳에 거하기 아이가 물항아리를 들고 내게 왔다 한 손으로 덮개를 꽉 잡은 채 아이는 말한다 자신이 물에서 헤엄치는 빛을 잡았다고 빛을 풀어놓으면 이곳도 밝아질 거라고 아이는 내 앞에서 물항아리를 열어 보였는데 빛은 담겨져 있지 않았고 물만 찰랑거렸다 나는 울상이 되어버린 아이에게 빛은 이곳이 낯설어 무서운 나머지 숨어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詩想과 세상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
詩想과 세상 수도국산 네 식구 단칸방 살 때 도둑이 들었다 자는 척 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 고장 난 비디오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선이 끊어져서 조용히 나갔다 옆집 아저씨 민구(1983~) 시인은 수도국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은 인천 송림산에 배수지를 만들면서 생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가난한 사람들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던, 설움과 애증으로 얼룩진 장소였다. 멀리서도 잘 보였던, 산비탈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집들, 폐자재나 나무판자를 엮어 지었던 무허가 집들, 악다구니와 비명이 연탄재처럼 매일 나뒹굴고 깨졌던 집들, 그 집들의 단칸방에서 서너 가족이 ‘달세’를 내면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
詩想과 세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