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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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식구 제 몸이 의자인지도 모르고옹기종기 모여 있는 의자들과탁자인지도 모르고 그 가운데 넙적엎드려 있는 탁자와 장롱인지도 모르고속에 온갖 것 담고 투박하게 기대 있는 장롱과침대인지도 모르는 침대와 TV인지도 모르고중얼거리는 TV와 벽인지도 모르고 허공에칸을 질러대는 벽들과, 그 벽 속의 물소리와지붕인지도 모르고 그 위에 수굿이 덮혀 있는지붕과 그 밑 조그만 화분에 발 오그리고아슬히 피어나는 제 몸이 꽃인 줄 모르는 꽃들과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저 들숨 날숨의 -
詩想과 세상 흑백 무지개 요구르트, 그 다디단 것은 한 줄짜리 만화처럼금방 바닥이 났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엄마는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창고 속에서 여자들이 실밥을 머리에 가득 얹고노루발을 밀어 면장갑을 만들었다흰 손바닥들이 언덕을 이루면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심심하면 불을 질러야 했지만성냥불 불꽃마저 희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일부러 길을 잃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의자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방으로 가손거울을 놓고 들여다본 아랫도리는종일 입에 물고 있어 늘어진 검은 고무 꽈리 같았다아무나 쓰러지기를 바랐다 아니면 죽거나그때 내게 옜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누가 던져 주었다면맴돌던 좁은 마당에서 노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면그것도 아니면 파란 혀를 가진 개에게 물려팔뚝에서 보라색 피를 펑펑 흘렸다면 미싱은 멈추었을까백지에 검고 흰 무지개를 그리면 먹구름이 들어왔다찾는 사람도 없는데 이불에 숨어 숫자를 백까지 세었다눈을 떠 보니 흰 머리카락이 무성했다 -
詩想과 세상 센서등 사라질까봐 뒤돌아보길 주저한다너는 또 보이지 않고 나는 구덩이를 판다깊어서 빠져나갈 수 없다 물구나무서서땅을 든다 는개처럼 내리는 불빛그림자극이 시작된다찰나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현관 우산에서 흐르는 빗물가지런히 정박한 신발들저녁 항구는 적막하다 젖은 피부가부레를 찾고 폭우가 거세진다 하늘에서 바다로물길이 이어져 수평선은 무의미해지고구름까지 헤엄쳐 간 고래너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
詩想과 세상 허물 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직립의 슬픔과 배로 가는 슬픔이 서로 감염되어산에 슬픔이 가득했다슬픔을 끌고 산을 나왔다뱀은 느티나무 아래 나를 벗어두고 갔다 -
詩想과 세상 두더지 보내버린 시간을 애도하며 누가 말했는가 밑바탕이 무너지고 있다 인간은 철새처럼 이동해야 할 것 지구를 떠도는 에너지들 과잉들 확성기가 침묵의 끝에 닿을 때 천둥 쳤다 지난날 당신은 꿈이 있었다 들끓는 개미 어쩔 수 없는 마음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이해한다는 말은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과 닮았다 최지인(1990~) 사랑과 희망으로 들끓어야 할 젊은 시인의 시에서 죄책감과 위태로운 미래를 먼저 읽게 된다. 시인은 “보내버린 시간을 애도”하며, 무너져내리는 삶의 “밑바탕”과 흘러넘치는 지구의 “과잉들” 앞에서 침묵하는 당신과 나의 죄를 묻는다. -
詩想과 세상 사람값 ‘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학벌’이 아닌 ‘상식’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드높은 ‘명예’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소수의 풍요’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독점과 지배’보다 ‘공유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새로운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
詩想과 세상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시든 억새를 쥐고 당신에게 가는 길눈구름에 입술을 그리면 어떤 슬픔이 내려앉을까눈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눈빛이 무슨 색으로 변할까은색의 숲이 심장이 뛰기 시작해몸속에 목화들이 우거져당신에게 가는 문병은 어디로 휘어질까마른 목화솜을 쓸어 모으면마음엔 서리지 않는 유리 입김,단 한번 몸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살려주세요 빌 수밖에 없는사람의 몸과 캐럴의 종이 울던 밤솜 같은 당신을 안아보았지 -
詩想과 세상 벨 한겨울 뒤집힌 유리컵 속에 파리 한 마리를 가둬넣고기적을 보듯 아이와 나는 외로움을 보고 있다 마룻바닥에서 햇볕은 x축에서 y축으로나른하게 늘어지고나는 우리가 하늘 저 깊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느낌에울고 싶어진다 유튜브 속에선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리고아이는 저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나를 조른다끝까지 잘 해내고 싶다는 각오를 언제 처음으로 했던가 -
詩想과 세상 이백원 한끼에 이백원 받던 밥집한그릇 먹든 두그릇 퍼 가든 똑같이 이백원세그릇째인 사람은 있어도 한그릇만 퍼 가는 사람은 없던,공짜 밥은 마음 다치게 한다고 따박따박 밥값 요구하던 곳백원짜리 동전 두개 손바닥 가운데 올리고자랑스레 내밀던 손들이 줄을 잇던,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못 써서 그렇지 내가 열권 스무권짜리 책이라고배부른 김에 장광설이 이어지던 식탁하루 한끼 때우던 굴풋한 짐지게들이 문밖에 서 있던,우거지 아니면 시래기 된장국이 끓던 스텐 양은들통에서 솟아나는 뿌연 김 따라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오르면 홈리스 슬리핑백이 쌓여 있던,예수라는 사나이보다 일찍 떠난 혜성이와 함께일주일에 한번 밥 나르러 가던 스물한살사장은 없고 젊은 가톨릭 수사들이 드나들던 곳빌딩 숲 사이 언뜻 얼비치는 용산역 뒤지금은 흔적도 없는 시장 골목 -
詩想과 세상 분멸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짓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진 들이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굴 눈을 감은 얼굴 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군 사라지는 걸 배웅하는 것 같군 불길 같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정성을 다해 추락하는 황홀한 기쁨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 보았을 리 없는 그녀의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
詩想과 세상 첫눈 오늘 밤에정말이지, 앞이 캄캄한 밤에첫눈이 찾아왔지하늘에 모공(毛孔)이 있나 싶었지실처럼가느다란 빛처럼흰 목소리땅속에 파뿌리 내려가듯내려오는 거였어예전에 온 듯도 한데누구이실까손바닥에손바닥에 가만히 앉히니내 피에뜨거운 내 피에 녹아녹아서 사라진얼굴 문태준(1970~) 첫눈이 왔다. 아직 가을을 다 보내지 못했는데, 겨울의 첫 마음이 불쑥 도착했다. 귀뚜라미도 제 울음을 못 그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눈이 펑펑 쏟아졌다. 거리의 은행나무들은 잎을 다 키우지 못한 채, 노란 은행잎 대신 초록 잎사귀들을 서둘러 떨궜다. 간간이 들려오는 이른 첫눈 소식들은 누가 보낸 다급한 전언일까. -
詩想과 세상 일대기 그는 태생상 하나의 성소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누군가가 죽음과 태양을 바로 쳐다보고 존재의 얇은 빙판을 밟게 되는, 위대한 장소는 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는 심하게 먼지 나고 들어가기에 너무 비좁은, 몹시 높고 붉은 쪽문을 가진 다락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곳이 부서진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면. 낡고 쓰다 버린 것이지만 먼 나라의 것이라 낯선 폐품 더미 속에서 잠시 혼이 나간 아이처럼, 도무지 쓰임을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망가진 물건들 사이에서, 또한 모든 이가 어느 다락방에 쌓인 낡은 몰락의 일종이었음이 문득 자연스러워지는 오후 한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