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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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의 행로난 앞서가는 즐거움의 역설 즐거움 하면 주로 기쁨, 쾌락 등이 떠오른다. 덕분에 즐거움은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즐거움을 유발한 것이 마약이라도 이를 긍정할 수 있을까? 경쟁은 또 어떠한가? 즐거워진 이유가 경쟁이라면 이를 두고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갈수록 경쟁이 심화되기에 던져본 물음이다. 경쟁이 즐거움을 안겨준다면 그건 경쟁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경쟁 결과와 무관하게 경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가느냐, 뒤처지느냐에 상관없이 경쟁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걸렸을 때도 이러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
김월회의 행로난 사냥의 정치와 성찰의 정치 맹자는 참으로 거침없고 당당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군주는 국가 장치를 사적으로 악용해서라도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군주 앞에서 맹자는 사뭇 꿋꿋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한번은 군주가 조정의 고위관리에 대해 물었다. 맹자는 먼저 고위관리에는 군주와 친척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두 종류가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고는 후자는 군주가 잘못을 범했을 때 이의 교정을 간했음에도 고치지 않으면 군주를 떠나버리지만 전자는 군주를 쫓아낸다고 했다. 절대 권력을 쥔 군주의 면전에서 당신이 과오를 고치지 않으면 친척 출신 고위관리는 당신을 축출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였다. -
김월회의 행로난 당당하고도 끈질긴 인간의 악 악은 참으로 한결같다. 악은 없었던 적도 없었고 약했던 곳도 없었다. 참으로 한결같이 사악했다. 그중 소위 ‘가진 자’들의 악은 내놓고 당당했으며 더없이 끈질겼다. 인간의 이러한 악함을 기본으로 놓고 그 위에서 사회를 ‘좋게’ 운영해갈 길을 찾았던 한비자는 신하를 ‘가진 자’들의 대표로 제시한 후 이들의 악함을 ‘팔간(八姦)’, 그러니까 여덟 가지 간악함이라는 제목으로 개괄하였다. -
김월회의 행로난 2023년, 평화를 상상하자 1910년 3월26일, 사형 집행 직전 일본인 관리가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세 번 외치고 싶다고 하였다. 물론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한다”(3·1독립선언문)고 선포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동양평화’, 나아가 ‘인류평등’이라는 차원에서 사유하고 실천했음이다. 지속 가능한 평화 구현을 독립의 참된 완성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계묘년 새해에 평화를 화두로 삼은 까닭이다. -
김월회의 행로난 민주, 민이 주인? 아니면 민의 주인? 민주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어다. 근대 이래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널리 퍼진 말로 “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쓰이기 전에 이미 민주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었다. 춘추시대 역사를 서술한 <춘추좌전>에는 노나라 양중이 제나라에 갔다 돌아와서 노나라 군주에게 귀국 보고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제나라 군주가 말이 게으르고 경박하다고 아뢨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문중이 “민주가 게으르고 경박하면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민주는 제나라 군주를 가리킨다. 또 이런 기사도 실려 있다. “조맹은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참으로 게으르고 경박하여 민주답지 못했습니다.” 노나라의 목숙이 맹효백에게 진나라에 다녀온 후 진나라의 집정인 조맹에 대하여 한 말이다. 여기서 민주는 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는 집정을 가리킨다. 집정은 훗날의 재상에 해당된다. -
김월회의 행로난 ‘중.꺾.마’와 전략적 인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카타르 월드컵에서 극적으로 포르투갈을 꺾은 우리 선수들이 경기 후 들고 있던 태극기에 써 있던 말이다. 지난가을, 미국에서 열렸던 2022 롤드컵(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리나라 한 팀이 ‘언더독’으로 우승을 일구어냈을 때부터 곧잘 접하게 된 문구다. 그 팀은 국내 선발전을 어렵게 통과, 롤드컵에 진출하여 강호들을 연이어 꺾고 결승에서 국내 리그 우승팀에 역전승을 거둠으로써 세계대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일구어낸 값진 승리의 퍼레이드였다. -
김월회의 행로난 ‘무인도’용 자유 한자권에서 자유라는 말이 개념어로 사용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다. 서구로부터 freedom, liberty 등이 소개되자 이들의 번역어로 자유가 선택되었다. “스스로(自)” “말미암다(由)”로 구성된 자유가 ‘속박됨이 없음’ ‘억압에서 벗어남’ 등을 뜻하는 freedom이나 liberty의 개념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스스로 말미암는다”고 함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간섭받거나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한다는 의미다. -
김월회의 행로난 존엄한 죽음과 전쟁 언론에 따르면 북한은 올 들어 36차례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동해와 서해상으로 수백 발의 포격을 감행했고 수백 대의 전투기를 동원하는 무력시위도 벌였다. 우리나라도 대응조치를 취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포격을 가했다. 지난달 31일부터 5일까지는 한·미의 최첨단 전략자산 등 항공기 240대가 참여한 비질런트 스톰 훈련이 진행되었다. 외부에서 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전쟁 위기의 고조이다. 언제이냐가 특정되지 않았을 뿐 한반도에서는 결국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질 듯도 싶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사뭇 덤덤하다. 휴전 상태가 7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전쟁에 대하여 엄청 둔감해진 탓이다. 정치인의 입에서 전쟁 불사 같은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는 것을 보면 둔감한 게 아니라 아예 무감해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
김월회의 행로난 ‘썩은 어른’들의 시대 어른은 공자가 늘 곱씹었던 화두였다. 살다 보면 자연스레 나이를 먹게 되어 도달하는 생물학적 어른이 아니라 ‘어른다운 어른’, 곧 사회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어른다움에 대하여 줄곧 관심을 기울였다. 나름 알려진 “나이 서른에는 스스로 섰고 마흔엔 미혹되지 않았으며 쉰에는 천명을 알았다. 예순에는 들음의 평정을 얻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언급 외에도, 공자는 “나이 마흔, 쉰이 되어서도 그 이름이 칭해지지 않는” 어른은 두려워할 만하지 못하다고 잘라 말했고, “장성해서는 남들에게서 일컬어지는 게 없고 늙어서는 죽지 않고 있으니 이는 도적일 뿐”이라며 친구 원양을 호되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들고 있던 지팡이로 원양의 정강이를 때리기까지 했다. 평생 임금은 임금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한다고 일깨웠던 공자였던지라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보는 순간 솟구치는 화를 주체치 못했음이다. -
김월회의 행로난 시험받은 건 청력이 아니라 기본 국민이 정치인으로부터 시험받는다는 것은 봉건왕조라면 모르겠지만 민주공화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근자에 우리 국민은 청력 테스트를 강요받았다. 그런데 국민이 시험받은 건 그저 청력이 아니었다. 외양은 청력 테스트였지만 실질은 기본 테스트였다. 국민의 기본 말이다. 국민의 기본은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고 헌법 제1조에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됐으니 제일가는 기본은 주권자라는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의 기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권행사를 바르게 할 줄 아는 역량의 구비가 제일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주권자는 바로 주권을 행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
김월회의 행로난 정치는 책임이다 지록위마, 그러니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는 고사의 21세기 버전이 등장했다. 사슴이 바이든으로, 말이 날리면으로 대체된 ‘지바위날’이 그것이다. 중국발 지록위마를 대체할 ‘K지록위마’가 탄생한 것이다. 지록위마는 2200여년 전 진시황 사후에 권력을 잡은 승상 조고가 벌인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조정의 신하들이 자기를 얼마나 추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황제 앞에 사슴을 끌어다 놓고는 말이라고 했다. 황제는 승상께서는 왜 생뚱맞게 사슴을 말이라 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승상의 말이 맞는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이런 일을 벌인 다음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모두 죽였다. -
김월회의 행로난 원숭이와 민둥산 왕안석은 북송 시대 신법이라 불리는 개혁안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다. 그는 초임은 지방관으로 임용하는 관례에 따라 지방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몇 년 후 황제는 그를 조정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는 지방 실정을 더 파악하고자 중앙으로의 진출을 마다했다. 그의 혁신이 처음에는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에 좌초되었지만, 시일이 흐른 후 적잖이 채택된 것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를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다.